설교문

오늘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신가?(성탄절)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8
조회
1291
(12월 25일 성탄절)

설교제목: 오늘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신가?
성경본문:마가복음 8장 27절-34절
찬송:112, 94
교독:교독문 57(성탄절)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올해는 이제까지와 다른 눈으로 성탄절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이 날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시발점입니다. 오늘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신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의 핵심은 예수를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경을 보고 믿는다고 하지만 각기 자신의 상황에 따라 예수를 달리 보고 있습니다. 각기 믿음의 정도에 따라 좋아하는 성경 구절도 다르고 또한 같은 성경 구절을 보더라도 그 해석을 달리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은 의도적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인생역정과 현재 부닥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질병이 있거나 몸이 아픈 분에게는 치유하는 기적을 예수님에게서 보고 싶고, 마음에 상처가 많은 분은 위로자 예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 부조리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분은 그것을 고쳐주는 예수님에게 열광하고, 혁명을 원하는 분은 혁명가 예수상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다양한 예수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그 이전에 한 행보를 보면, 산상설교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복음을 충분히 전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여러 곳을 다니면서 기적을 행하고 아픈 자를 치유해주셨습니다. 특히 열두 제자를 택해 자신처럼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고, 굶주리는 자들에게 배불리 먹을 있는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었다고 생각한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과 빌립보의 경계지역인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한적한 분위기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에 한 분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본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다양한 행동 중에서 자기의 상황에 따라 특별히 그런 행동을 부각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예수님에게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행동도 있었고, 엘리야처럼 기적을 행하고 당시 예레미야나 선지자처럼 미래에 대해 예언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면으로 예수님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을 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뒤를 이어서 선포한 것으로 거의 세례자 요한의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 부정부패에 물들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회개하여야 로마로부터 독립을 기대할 수 있었던 백성들로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독재자 헤롯왕에게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백성들은 제2, 제 3의 요한이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바로 그런 기대를 예수님이 해주시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엘리야라고 보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엘리야는 기원 전 9세기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길르앗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여호와께 대한 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으로 이세벨의 바알 숭배에 투쟁한 지도자입니다. 극심한 가뭄, 450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 죽은 후의 승천 등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예언자입니다. 특히 그가 행하였던 다양한 기적들은 절망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소망이 될 수 있었습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많은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고치시는 예수님을 바로 엘리야로 부르는 것은 당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엘리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레미야나 선지자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친 예레미야가 다시 태어나서 로마의 멸망을 외쳐주기를 바라고 있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서 바로 그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다시 지배자들의 학정을 폭로하고 징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과 함께 복음전도를 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자 가운데도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으로, 엘리야로, 또는 예레미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유다의 대답이 없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였을까요?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란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고백은 그 후의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그렇게 진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본인이 직접 체험해서 알았다기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고백을 진정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고통의 시간이 지나야 했습니다.
실상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줄 메시아, 힘 있는 권능자를 기대했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병 고침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로서는 당연히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았고, 급기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에는 예수의 제자임을 부인하면서 멀리 도망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낮은 자를 향하여, 힘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분인데, 그런 것을 알 수 없는 강한 메시아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불완전한 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고백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로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 메시아(기름부은 자)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때 그 분도 우리의 견고한 핵심을 지적하시며 우리를 신앙공동체의 기초로 삼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성탄절 아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낮고 힘없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바로 그런 삶이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를 고백하는 삶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복음의 메시지는 이 한 마디에 다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라.

하나님의 길은 스스로 낮아지고 약해지는 길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소식은 바로 하나님이 작고 약해져서 우리 가운데 열매를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열매가 풍성한 삶은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신적 능력에 매달리지 않고 우리처럼 되셨습니다(빌 2:6-7). 예수님은 약할 대로 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2005년 성탄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시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도 상업주의에 빠져 흥청망청하는 크리스마스를 즐겨왔던 것이 아닌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오늘 그 분은 타인의 돌봄과 보호에 의존하는 어린아이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도 없이 가난한 설교자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무익한 범죄자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극도의 연약함 속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실존의 열매가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최근 헨리 나우엔의 “예수, 우리의 복음”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나우엔은 예일에서 10년 동안 대학교수로 봉직하다가 하버드에서 2년 동안 교수직을 하는 동안 장애인 공동체인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의 담임사제로 초빙되었습니다. 10여 동안 그곳에서 사역하면서 나우엔은 계속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실존의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직업인 나우엔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행동의 사람인 나우엔은 제 몸조차 못 움직이는 장애인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연약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오신 예수는 오늘 나에게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