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재대신 화관을(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4
조회
1903
(2005년 12월 18일 대강절 3주째)

제목 : 재대신 화관을(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 이사야61:1-4
찬송:167, 204
교독; 56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공의의 나무, 주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 구원은 약속어음이 아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의 어느 날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장의 요청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책을 펼치시고는 오늘의 본문을 낭독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로 시작해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구절까지 읽으신 후에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고 조용히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예수께로 쏠렸습니다. 주님은 천천히, 또박또박, 마치 선언을 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4:21). 사람들은 그 뜻밖의 말에 놀랐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가 올 것이지만, 은연중에 ‘지금’은 아니고 생각하던 그들이었기에 놀람도 컸을 것입니다. 구원은 약속어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적 사건입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로 다가가셨습니다. 병자들은 고쳐주셨고, 마음이 상한 자들은 사랑으로 싸매어 주셨습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소중한 사람임을 발견했습니다. ‘다음에’라는 말이 그분에게 없습니다. 지금 못하면 다음에도 하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할 일이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이 추운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이 서울에서만 10만 명이 넘는답니다. 기쁜 소식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해집니다. 그런 이들을 찾아가고, 손을 잡아주고, 필요한 것을 마련해줄 때 우리는 비로소 복된 소식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고, 또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석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아주 시급한 과제입니다. 일제시대에 정신대로 끌려가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영영 박탈당했던 할머니들의 한이 풀리지 않고는 우리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가슴에 묻은 민주화실천 가족운동 협의회 어머니들의 피맺힌 아픔을 외면하면서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시는 까닭은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뭔가에 포로가 되어 사는 사람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술과 마약과 돈과 쾌락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는 왜 술을 마시느냐는 어린 왕자의 질문에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합니다. 왜 부끄러우냐고 묻자 ‘술을 먹어서’라고 대답합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스스로 이런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이 악순환을 끊어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천성이 나쁜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길을 잘못 들었을 뿐입니다.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인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도 그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그런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 어려움은 주님과 우리를 묶어주는 든든한 줄이 될 것입니다.

● 연약한 사람들 속에 숨겨놓은 귀한 선물
주님이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것은 찬송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이에게 구정물을 끼얹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남만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불행합니다.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저는 패션 디자이너인 앙드레 김 선생을 좋아합니다. 그분의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 그리고 말투는 참 특이하지요. 한마디로 제 스타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제가 닮고 싶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누구를 대하든 그에게서 장점을 찾아내 칭찬해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아직 내공이 약해서 좋고 싫음이 얼굴에 너무 드러납니다. 에둘러서 말하거나, 감정을 숨기고 엉너리치는 재주도 부족합니다. 문제는 제가 처세에 능치 못한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기쁘게 하는 일에 아직 서툽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거나 배려할 때 영혼이 자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랑나눔교회>가 있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창고 같은 건물을 임대해 교회를 시작할 때 우리 교회도 성심껏 도왔습니다. 며칠 전에 그 교회에서 교역자회의가 있었습니다. 오랜 만에 가본 그 교회는 아늑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건물은 여전히 초라했지만 사랑의 공간으로서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의 성도는 전원이 청각장애인들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지만, 그분들은 봉사와 섬김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군부대를 위문하고, 치매노인들과 중증 장애인들의 수용시설에 가서 호떡을 구워 대접하기도 하고, 교도소를 찾아서 재소자들을 위로하고, 지방 도시의 독거노인들을 위해 김장을 담아 나눠드리기도 합니다. 수화로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무정한 세상에서 상처를 입으며 살아왔던 그분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서로 의심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일단 봉사 일정이 잡히면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고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세상에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 그분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서 부족한 것 없이 다 갖추고 사는 데도 마음이 스산하고, 왠지 모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래서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쇼핑을 다니고, 운동을 해보지만 마음에 깃든 공허감을 주체할 수 없어 신경이 예민해진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에 덧씌워진 재를 털어주고, 기쁨의 화관을 씌워주십시오. 몸이 불편한 이들의 몸을 닦아주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십시오. 그들의 벗이 되어주기 위해 다가가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댈 때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우울증과 무기력과 공허감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게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연약한 자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 희생 없는 경배는 허구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후 삶이 새로워진 사람들, 그들을 가리켜 이사야는 ‘의의 나무’, ‘주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라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통해 일으켜 세워진 사람들은 황폐한 땅을 새롭게 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에 동참할 것입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자신들의 귀한 사역을 증언했던 사단법인 <개척자들>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대표인 송강호 전도사와 간사인 유복희 선생은 지금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버린 반디아체에서 마을 주민들의 공동주거시설인 ‘공생의 집’을 짓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곳이 그들의 ‘땅 끝’인 셈입니다. 누가 시킨다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천사라고 믿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아주 치명적인 사회적 불의를 일곱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모험을 꺼리는 부유함(Wealth without risk), 도덕이 결여된 교역(Commerce without morality), 양심에 구애받지 않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이 배제된 교육(Education without character), 인간이 사라진 과학( Science without humanity) 그리고 마지막이 뭐겠습니까? 희생 없는 경배(Worship without sacrifice)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이 예배도 정성껏 드려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 생명의 숲 그늘 아래 쉴 때까지
저는 최근에 어느 잡지에 실린 글을 보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중국의 모호소 사막에 가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 풀씨를 뿌려 풀을 키우고 나무를 심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은옥진입니다. 그분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당나귀에 태워진 채 인근 몇 십 리에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와서 낯선 남자와 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웠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어느 날 사막 언덕 저만큼 가물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은옥진 씨는 너무나 반가워 소리를 지르며 먼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봐요, 여보세요'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갔겠지요. 그러나 멀리서 가물거리던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오는 사람에게 그만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그리웠던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그 낯선 사람의 발자국뿐이었습니다. 망연자실 먼 모래언덕만 바라보던 그녀는 날 듯이 집으로 달려가 세숫대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모래바람에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도록 세숫대야를 그 위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말을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의 발자국을 이따금 들여다보며 울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발자국을 보며 결심했습니다. 그녀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의 발자국이 모랫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숲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녀는 그때부터 풀씨를 심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심어놓은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가 타죽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의 집 주변에는 백양나무와 사류나무 그리고 어린소나무와 중국단풍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고, 사막 곳곳에 자라고 있는 풀밭에는 300마리의 양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월간잡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5년 12월 호, 박남준의 <사막 위에 푸른 꽃비를 뿌리는 사람>)

희망은 이처럼 우직하게 자기 자리에서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을 통해 세상에 유입됩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고, 슬픔과 고독의 재를 뒤집어쓴 채 사는 이에게 기쁨의 화관을 씌워주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이기심과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면, 그 이웃들은 또한 떨쳐 일어나 황폐한 곳을 가꾸고 무너진 곳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으로 넘실대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방법입니다. 수고의 결실이 보이지 않아도, 끈질지게 사랑 심기를 계속하면 어느 날 우리는 생명의 숲 그늘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꿈 하나 붙잡고 살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행복을 맛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본원 기획위원 김기석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