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너도 그와 같이 하라(2005인권연합주일 설교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3
조회
1023
제목:너도 그와 같이 하라
성경본문:누가복음 10장:30절-37절
찬송:104,94
교독 :52 (요한1서 4장)

30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서,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갈빗대 하나를 뽑아 이브를 만드셨다. 그 이브를 보고 아담이 소리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는 말은 소유나 예속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남녀가 똑같은 존재라는 평등의 개념이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않아 그를 돕는 배필로써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공생의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돕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모습이다.
성서는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살피고, 약하고 힘없고 상처 받은 이웃들을 돌보라고 하신다. 추수할 때도 그들을 위해서 떨어진 이삭은 거두지 말고, 그들의 식량으로 남겨두라고 하신다. 우리 선조들도 과일을 추수할 때,‘까치 밥’이라 하여 짐승들의 몫은 남겨두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 짐승의 몫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의 몫도 상관하지 않는다. 남기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더 챙길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결과 세상은 양육강식의 씨름판이 되고 말았다.‘서로 도움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응한다’는 말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모든 인간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성서는 이런 깨어진 인간관계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을 위해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인권을 강조하면서,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물량주의에 빠진 세상의 흐름을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세월, 교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 일에 앞장을 서왔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앞으로 펼쳐나갈 인권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할지, 몇 가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교회가 펼쳐나가야 할 인권운동은 약자의 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질문을 했던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등장시켜 그의 이웃이 되라고 하신다. 그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라고 강조하신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강도 만난 사람,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속성 또한, 이 약자의 편이 되는‘긍휼’이시다. 약자의 편이 되어 그들의 기를 펴주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임을 선언하는‘긍휼’이시다. 출애굽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던 신이해는 강자를 위한 강자의 편이 되는 신이었다. 그런데 성서의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신이 되신 것이다. 그런 신을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했을 때, 파라오는 그런 신도 있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출5: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이런 약자들을 위해서 였다. 누가복음 4:18은, ‘포로 된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그들에게 해방과 은혜를 선포하게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기독교는 약자의 편에 서슴없이 서야 할 긍휼과 뜨거운 사랑의 심장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권운동은 ‘너’와 이웃이 되어 함께 사는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고, 언 몸을 녹여 주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우리는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로 나갔다. 중동에 기술자와 노동자로 나가 달러를 벌어오기도 하였다. 그때 그들은 우리를 학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베트남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소위 말하는 월남전쟁에 우리나라는 1965.9월부터 7년6개월 동안 약 27만 명의 젊은이들을 보내, 세계에 그 용맹을 유감없이 떨치고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그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물론 미국의 맹방임을 증명하였고, 우리의 경제 발전에 다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 전쟁을 명예로 생각하고, 미국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는 4,900여명의 전사자와 만 여명의 부상자를 냈고, 지금도 고엽제피해를 비롯하여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베트남은 그 전쟁에서 약 120만의 사망자와, 무려 3-400만에 이르는 부상자가 생겼다. 더더구나 귀신도 때려잡는다는 한국군 앞에서 베트남은 한 마을이 존재도 없이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한국에 대한 그들의 원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3-40년이 지난 오늘,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의 용병이 되어 대리전쟁에 참전한 한국군도 어쩌면 피해자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해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좋은 이웃이 되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감사해야 할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독재에 항거하면서 인권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을 펼쳐나갈 때, 세계교회는 아낌없이 격려해주었다. 우리 운동의 자생력도 대단했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싸움은 훨씬 더 길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우리와 함께 있었고, 우리와 함께 행동했던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인권운동은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을 위해 변호사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지난 날 세계교회가 우리와 함께 하였듯이, 우리가 고난 받는 이들의 편이 되고, 그들의 이웃으로 함께 사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 하는 정의를 사전적인 설명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이웃은, 내가 돕고 싶어서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이웃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구체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강도 만난 사람의 아픔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강도 만난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수난당하고 몸부림치면서, 골고다언덕을 함께 넘어왔다. 그러나 요즘 교회가 배 부르고 대형화 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도 만난 현장을 회피하는 것만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속히 진정한 이웃의 자리로 돌아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였으면 좋겠다.

셋째, 교회의 인권운동은 차별의식을 몰아내는 것이다.
근래 우리 사회는 인권문제의 많은 진보를 가져왔다. 국가차원에서 여러 인권기구가 세워지고, 하소연할 길 없던 사건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 땅에 머물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40만이 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편법적인 노동정책으로 불법체류자가 될 수 밖에 없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온갖 멸시와 차별을 받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이민자 2세들이 프랑스사회 곳곳에 잠복하고 있는 차별에 항거하여 소위, ‘뵈르들의 행진’으로 명명되는 시위를 거세게 벌렸다. 이것은,‘기회의 평등’과 ‘능력에 따른 출세’라는 슬로건을 내 걸어온 프랑스사회의 내면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필요할 때는 불러 다가 싼 값에 일을 시키고, 이제는 부담스럽다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 2세들을 외면하는 이 일이 결코 프랑스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지독한 이기주의와 잘못된 민족주의라는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웃과 손 대접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던 미덕이 우리의 자랑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런 자랑스러움이 어디론 지 사라져버리고, 돈에 환장하여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종차별보다 더한 차별의식이 우리 가운데 숨어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경제에만 치중하는 사회발전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황폐라는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권운동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결코 이웃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의 의식 속에는‘힘없는 나라, 가난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다. 지역간에, 남녀간에, 종교간에, 그리고 피부색과 국경간에, 심한 차별의식이 있다. 이런 차별의식을 회개하고, 제도적 개선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차별의 아픔을 수십 년간 일본 우토로에서 겪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인권과 거주권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몸부림쳤던 단체에게 제19회 KNCC인권상을 수상하는 뜻 깊은 순서를 가지려고 한다. 우토로국제대책회의의 노력으로 드디어 정부차원의 아름다운 결실을 가시거리까지 끌어당긴 일은 크게 치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위에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인권운동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허락하신 생명운동이라는 것이다.
저는 인권운동을 특별히 배필이 되는 운동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를 사랑의 띠로 엮는 생명운동이라는 말씀이다. 비록‘사형수’로 분리되는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 생명의 가치는 인간이 마음대로 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신권이며, 곧 생명권이다. 누구라도 생명이 위협당하는 현장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는 모두 한 생명공동체에 속해 있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생명권이 위협당하고 있다.
요즘 북한인권법을 앞세워 북한을 압박하고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미국과 친미우익단체 중심으로 거칠게 일어나고 있다. 이 일에 교회가 앞장을 서는 일도 안타깝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생존권이나 인권을 위해서도, 그리고 남북평화정착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확인하면서, KNCC인권위원회는 지난주간 미국의 북한인권법,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과 함께 대토론회를 열기도 하였다.
21세기 인류가 극복해야 될 과제는, 힘이 있다고 약자나 약소국을 억누르는 폭력성을 몰아내고,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는 우주적 가치관으로 재무장하는 일일 것이다. 거기에 참 평화가 있고, 인류와 지구의 참 소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한다. 인권운동은 결코 사회운동의 일환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바로 세우는 가장 중요한 신앙운동이요, 가장 복음적인 선교활동이라고 저는 믿고 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그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40만 외국인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예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우리나라에 500만원에서 2000만원 을 받고 팔려와, 저 농촌 곳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베트남 처녀들, 독거노인과 장애우와 농민들, 그리고 올 겨울을 또 어떻게 넘겨야 할지 시린 가슴을 조이고 있는 노숙자들, 그리고 분단의 사슬이 속히 철거되기를 소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과 평화와 풍성한 생명력으로 오시는 성탄의 축복이 넘치기를 기원한다.(2005,인권연합주일 설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