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생명은 소명이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2
조회
1091
(12월 4일 대강절 첫째 주일)

설교제목: 생명은 소명이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12장 44절-50절
찬송:94, 204
교독문: 45 (요한복음 3장)

<본문주해>: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르켜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지칭하신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분명히 자각하고 계셨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이 말은 너무 함축적이어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장 45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장 11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장 10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함이로라.”(요 12장 47절)

이 말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이다. 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인간세상의 빛이 되신 것이다. 그를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도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 당하셨지만 당신이 스스로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에 심지어는 당신이 하신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까지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신을 보내신 분이 마지막날 심판하신다. 요한은 심판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장 19절) 즉 자신의 악한 행위 때문에 밝은 세상을 싫어하고 어두운 세상을 더 좋아 하는 것이 심판받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타락이란 하나님을 등진 상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멀리한 상태, 이것이 심판받은 상태인 것이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롬 1장 29절)

해서는 안되는 일을 거리낌없이 하고 사는 삶 자체가 심판 받은 삶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이 대충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를 닦는 훈련이 필요하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해야한다.
<예화1> 쌀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분노의 함성이 뜨겁다.농촌사람들이 겪는 절망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버린 사람들이 있다. 29일간의 단식으로 쌀개방을 반대했던 민주노동당의 강기갑의원이 단식을 풀며 인터뷰를 했다 강 의원은 “농민 여러분 살아서 싸웁시다.”하고 말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황우석 박사의 윤리논쟁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국민적 영웅으로 받들어졌던 사람의 쓸쓸한 퇴장도 우리의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살다 보면 ‘존재의 터전’이 흔들릴 때가 있다. 여러 해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손을 쓸 수 없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라도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 용기이고 믿음인 것이다.

<예화2>정박미경이라는 자유기고가가 초등학교 4학년인 조카가 썼다는 맹랑한 소설을 소개했다. 열 살 남짓한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데 그 아이는 가난한데다가 공부도 못하고 또 너무 못 생겼다. 자신을 비관하고 한강에 가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물 속에 빠지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사는데 너더 살아1”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뒤돌아 보니 정인권이다. 끝”

이 글을 소개하면서 필자는 세 가지 점에서 자기가 충격을 받았다고 쓴다.
첫째는 열 살 남짓의 소녀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
둘째는 가난하고 못생기고 공부 못하는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자살이라는 이 세상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답습한 것.
그러나 세 번째의 충격은 너무나 유쾌했다. 그것은 “나도 사는데 너도 살아1”라는 말을 전인권이라는 가수가 했다는 발상이다. T.V.에서 본 전 인권은 사자갈기 같은 퍼머머리에, 잘 생기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하고, 목소리도 가수답지 않게 걸걸하다. 어린아이가 볼 때 가수 전인권이야 말로 살 의미가 없는 사람인데 꾸역 꾸역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의 전형으로 보였던 것 같다. 이 글을 쓴 분은 이 열 살 꼬마가 “ 다른 사람이 보아 별 볼 일 없고 근사하지도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도 누군가에게 내가 살아있음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 2005년 11월 23일자)

<예화3> 하이데커는 오늘의 사람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를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존재의 망각’이라고 한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이 없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만 몰두한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한다. 그러기에 생명을 가진 것은 다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다.그 “할 일‘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삶을 살아내면 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우어 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간 푸른 언덕, 2005년 11월 27일)

<결론>어느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은 뭐라고 기도 하십니까?”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기자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으실 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도 듣습니다.”

살다보면 마음이 산란하여 견디기 어려운 때가 있다. 그런 때면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고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어 보자. 끈질기게 앉아 있다보면 우리의 영혼의 빈터에 하늘의 고요가 깃들일 것이다. 그 교요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지쳤던 영혼에 새 힘이 생길 것이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기가 시작되었다. 이 기다림의 시간에 고요히 내리는 흰 눈처럼 주님의 마음이 지난 일년 동안 우리의 지친 가슴을 포근히 덮어주기를 소망한다.
빛으로 오실 주님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