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살아있는 믿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2
조회
997
설교제목: 살아있는 믿음
성경본문:야고보서 2장 14절-26절
찬송:265, 523
교독문:48 (고린도 전서 13장)

<본문 주해>본문의 말씀은 “신앙과 행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야고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실행이
없는 신앙고백, 언행일치 안 되는 신자의 생활이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들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15절-17절)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양자택일을 강하게 부정하며,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경우를 예를 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23절-26절)


<예화1> 우리는 진정 가난한가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힌두교도에게 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

이 질문을 한국의 불교도에게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혹여나 이런 대답이 나올까 두렵다.
“그리스도인은 본인과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근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 결과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손길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 주위에도 어려운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일까?
아프리카나 이라크의 민중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어렵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적 빈곤감을 넘어서서 진정 풍부한 마음이 넘치게 될 수는 없을까?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쌀 한 줌을 받으면 기뻐하고 만족스럽게 여긴다.
반면에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때문에 절망한다.
‘마더 테레사 말씀’이란 책(호세 루이스 저, 황애경 옮김, 마더 테레사 말씀, 디자인하우스, 1997년)
에 있는 다음의 구절은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보여준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 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나누는 것이란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바로 한벗 장터는 그런 역할을 해왔다.
그 때마다 나왔던 물건들은 대부분 주인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이것이 진정 나누는 것일까?
누구나 쓰고 남은 것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버리기에 아까워서 주는 것보다는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과 인정이다.
남은 것을 주었을 때에는 감동이 없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어야 한다.
이런 나눔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서울 외국인 노동자 센타 간 주간지<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2003년 10월 21일)

<예화 2>한국갤럽 조사는 한국인들이 개신교에 건의하는 것으로 ‘사회 봉사와 이웃 사랑’,
‘타종교에 대한 비방 자제’ 등, 6가지를 들었다.(타임 매거진 제383호)

<예화3>세계인구 가운데 상위 20%가 1998년 현재 전세계 소득총액의 80%를 움켜쥐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80%인구는 전세계 소득총액의 14%를 나누어 먹기 위해 아귀다툼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과연 누구의 편인가? 가진 자들은 세계곡량의 47%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여 고단백질 육류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반면에, 다섯 살 미만의 굶주리는 어린이만 해도 2억 명이나 되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현실에서“자비와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글, <21세기 기독교 총서를 발간하면서>에서)


<결론> 세상 사람들은 심지어 타종교인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사람들, 베푸는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본인만 알고 자기 교회만 아는 이기적인 교인들이라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믿고 천당 가라!”는 목소리 큰 외침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예수
제자 되게 하기보다는 예수를 욕되게 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며, 그들의 목에 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지는 꼴이 된다.
그런 외침보다는 먼저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되며, 그들을 감동시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예수의 제자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오직 전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거기에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독교인들마저도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필리핀과 같은 기독교 나라에 전도를 하겠다고 하여 필리핀 기독교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러시아 정교는 기독교가 아니니 (한국의)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하여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추방당하는 수모도 받았다.

외국인노동자들이나 가난한 아시아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며 나누는 나눔은
겉으로는 감사하다고 입에 바른 소리를 할지 몰라도 그들은 이런 것을 불쾌한 미끼로 여긴다.

모두(冒頭)의 시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아픔을 같이 하고 있는 형제들이 봉사하며, 행하며 체득한 고백이다.
1) 우리 나라에서의 가난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가난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
2) 불교도와 이스람교도인 이주노동자들을 단지 전도의 대상으로만 보고 믿고 천당가자, 회개하라는 외침은 기독교에 대한 불쾌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없는 실천을 통한 기독교인의 사랑만이 그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방식대로 아시아의 나라 백성들에게 그들의 개종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인권과 고난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몸소 행하고 “그 땅에 먼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이국에 교회 하나 세우는 것보다 더 주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