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최후의 심판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1
조회
1114
(11월 6일-창조절 열째 주일)

설교제목- 최후의 심판
성경본문-마태목음 25장 31절-46절
찬송-373, 379
교독-교독문 42(마태복음 5장)

<본문 주해>본문의 최후심판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생생하고 간명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준엄한 비유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리라.....“
세상의 끝날 심판관으로 오실 영광의 왕은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

팔레스타인의 “양”은 보통 희고 “염소”는 검었다. “목자”는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오른 편은 영광의 자리고 왼편은 형벌의 자리이다.
심판은 사람이 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다.

무엇이 심판의 기준인가?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 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심판의 기준은 우리의 모은 재산이나 얻은 지식이나 쌓은 명성이 아니다. 또한 얼마나 신앙에 교회에 충실했느냐, 기도를 잘하느냐, 도 중요하지 않다. 신조나 사회적 지위, 교회 내에서의 직분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이웃 사랑이 척도이다.
“믿고 천당 가자”는 것이 한국교회의 전도 문구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으란 말이냐?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이웃 사랑의 실천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몸소 행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최후 심판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의인은 자기 행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아니 자기가 한 일이 상급을 받고 칭찬을 받을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친절과 봉사와 희생을 한다. 어느 사람은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사업을 위해, 상급을 위해, 칭찬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의인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다.(마태복음 6장 3절)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우러나는 몸에 베인 사랑을 실천 하는 자들이다.

반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될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1절-43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였더니까’ ”(44절)
“주여 억울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르치신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성수주일 열심히 했습니다. 헌금 열심히 냈습니다. 새벽 기도도 가능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열심히 했습니다. 권사로서 전도사님 따라 심방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영영한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이런 항변이 있음직하다.
주님의 심판은 준엄하다. 가혹하기까지 하다.
이제까지 신실한 신자로서 하느라고 한 열심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말에 따라 열심히 했는데 도대체 더 이상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절)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예화 1>인류 절반은 하루 평균 2달라 미만으로 연명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빈부 격차가 점점 늘어 가고 있다. 기초생활보호대상 가구가 1996년 49만 가구에서 2004년 75만 가국로 늘어났다.(기독 신문 2005년 10월 26일 자 사설 ‘심각한 빈부 양극화, 교회관심 필요’)


<예화 2>현재 차상위계층(최저 생계비 4인 가족 월 105만원의 120%이하 수입계층)포함한 빈곤층 인구는 502만명으로 전체인구 4천 829만 명을 기준으로 인구 9,62명당 1명 꼴.
이들 가운데 빈곤 아동 122만명 중 40만 6천 명, 빈곤 장애인 가운데, 68만 9천 명, 저소득 노인 18만 2천 명, 노숙자 및 쪽방 거주자 1만 5천 명 중 5,000명이 정부 복지 정책을 받지 못하고 있다.(내일 신문 2005년 6월 23일 자)

<예화 3>대부분 사람들은 노숙자들의 구걸, 음주,등 노숙의 고정된 행태만 보고 그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동네에서 흔히 만나는 우리 이웃들 중 한 사람이다. 임금이 체불되어 노숙인이 된 이씨 아저씨,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정이 해체되어 떠도는 지석군, 슈퍼마켓을 하다가 진 빚 때문에 노숙자가 된 광직이 아저씨......노숙자 실태조사서를 보면 85.3%가 구직활동을 하고 있으며, 95%이상이 구직을 원하고 있다. (경향신문 2005년 7월 9일 르포작가 김순천씨 글 ‘ 때로는 우리는 잔인하다.’ 중)


<예화 4>부는 축복일 수 도 있지만 저주일 수도 있다.....부를 행복의 원천으로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나눔의 실천이다. .....우리 사회에서 평균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 부채를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성공과 부의 축적이 사회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일수록 그 부채의 크기가 커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빚 갚는 일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가난한 소시민들의 기부문화가 싹트고 있다.
정신대 김군자 할머니는 일생을 어렵게 모은 전재산 5천 만원을 고아들을 위해 써달라고 쾌척했다.
성수동 구두닦이 김창수 씨는 월수 100만원 중 매달 1만원씩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아름다운 재단에 기탁했다. (경향 2005년 7월 15일)

<예화 4>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집이 없습니다.
벽돌로 지은 집도 없으려니와
이해하고
감싸주고 사랑해 주는 마음의 집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헐벗었습니다.
의복도 없으려니와
인간의 존엄도 잃어버리고
헐벗은 죄인이 받아야 할 연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병들었습니다.
치료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과 따뜻한 미소를 찾고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전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