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세계화와 영성-ASEM 민간포럼 종교분과 선언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2-20 23:25
조회
1455
ASEM (Asia-Europe Meeting) 2000 People's Forum
People's Action and Solidarity Challenging Globalisation

Workshop on Globalisation and Spirituality
Seoul / October 16 to 19, 2000

세계화와 정신적 대안
통합적이고 실천적인 정신적 대안을 지향하며

들어가며

1. 아시아와 유럽 10여 개국에서 온 우리 100여명은 2000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세계화와 영성, 그 대안적 가치"라는 주제를 숙고하기 위해, 'ASEM 2000 민간 포럼 종교분과'가 주최한 '서울워크숍'(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 참가하였다.

2. 이 워크숍은 다양한 종교와 정신적 전통(불교, 원불교, 기독교, 이슬람, 다양한 토착 신앙 및 개인적 신념)을 가진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세계화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인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로에 대한 인격적인 만남과 나눔은 물론, 워크숍 내용과 한국 문화 체험이 서로 다른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을 더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3. 이 워크숍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문제들에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 먼저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가 우리의 종교적, 정신적 전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각기 다른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을 가진 공동체들인 우리가 어떻게 세계화의 영향에 대처할 수 있는가?
; 세계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의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 새롭고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우리는 어떤 대안적 가치와 전망들을 개발할 수 있겠는가?
; 세계화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더 잘 협력할 수 있는가?


종교적, 영성적 전통들에 대한 세계화의 도전

4. 특히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관점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세계화의 특징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배제한 자유 무역과 투자,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자본, 무한 경쟁, 그리고 다국적·초국적 기업에 유리한 탈규제와 민영화를 위한 구조조정 등이다.

5.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세계화는 종교적·정신적 전통에게 영향을 주는 중대한 문제들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특히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획일화된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의 강요는 민중들의 종교적·정신적 실천은 물론 종교 전통들의 가치와 상징 체계에 부정적 효과를 낳고있다.

6. 우리는 세계화가 우리의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의 토대를 흔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세계화는 우리가 옹호하고자 하는 근본 원리와 가치의 토대를 약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이 자비, 검소한 생활, 협력, 정의를 근본으로 하는데 반해 세계화는 안팎으로 소비주의, 물질주의, 무한 경쟁, 그리고 적자생존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계화가 종교적 정신적 전통들의 공통 관심인 정의, 평화, 공동선, 인권, 생태적 지속가능성 등을 증진시키는 것과 양립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7. 특히 우리는 세계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항하는 대안적인 힘이 되기보다, 오히려 일부 종교들이 세계화에 편승하여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우리는 의미와 삶을 추구하는 종교들조차 생필품으로써 시장에서 상품으로 포장되어 제공되고 있는 경우를 본다. 따라서 세계화는 인간을 인적 자본(human capital) 또는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비인간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8. 우리는 또한 우리 대부분이 속해있는 현존 제도적 종교들이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때로는 예언자적이고 용기있는 목소리로 비판하지 못하였으며, 세계화의 부정적 요소들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지원 또는 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9. 그러나 한편, 세계화가 우리에게 다른 문화들, 종교들, 문명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평적 대화들에 풍부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것은 주로 통신과 운송 기술의 발달에 기인한다. 이번 종교간의 대화 워크숍은 ASEM의 주요 초석 가운데 하나인 '민중 대 민중' 대화의 구체적 사례이다. 우리는 이것이 지구화의 긍정적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다.

종교간 대화를 통한 평화의 문화

10.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이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음에도,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공동체간의 우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호이해의 경험은 우리 각자로 하여금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해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가 바로 하나인 지구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한편으로 자신의 영적, 정신적 전통들을 해체(de-construct)하고 재구성(re-construct)하는 과정에서 혼돈과 곤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호적이고 진지한 대화와 나눔을 통해 냉철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11. 우리 역시 기존의 다양한 종교간 대화모임이나 운동에서 이미 확인한 기본 원칙, 이른바 자비-연민(compassion), 사랑, 정의, 그리고 연대를 발전시키고 평화적 대화, 이해와 존중의 문화를 키워 가는 열린 자세와 상호 존중의 중요성 등을 수용하게 되었다.

12. 종교간의 대화와 동시에,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시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절실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공동체 내부의 대화는 종교적·정신적 전통들을 더 포괄적이고 해방적인 전망으로 진전시키려 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대화는 각 종교적·정신적 공동체들의 창시자들이 지녔던 본래의 정신과 전망으로 고무되고 이끌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3.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는 온갖 갈등과 분쟁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종교간에 평화 없이 세상의 평화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절감하였다. 우리는 종교가 평화의 문화를 형성하고 증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우리는 종교가 더 이상 갈등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데 나서서는 안되고, 이미 종교가 명분을 제공하여 일어난 '전쟁과 폭력들'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14. 일반적으로 다양한 종교적·정신적 공동체들이 인류 문화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들이 특정 문화, 전통과 문명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종교는 '진리'를 전파한다는 명분으로 토착 문화와 문명을 짓밟거나, 심한 경우 초토화하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이것이 식민주의를 매개로 일어났다면, 오늘날에는 세계화로 말미암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워크숍은 진실, 정의, 화해를 향해 나가는 자리가 되었다.

여성의 자각과 힘을 돋우기 위한 정신적 가치

15.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종교·정신적 공동체 안에서도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세계화가 진행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여성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이 가부장적 논리가 세계화 과정 속에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국적 기업과 대기업을 위해 강제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일차적인 희생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가난의 여성화'(Feminisation of Poverty)가 더 악화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가부장적 문화와 결합된 현재의 자본주의는 여성들의 지위를 더욱 악화시켰고 심지어 더 큰 착취 구조 속으로 내몰고 있다.

16. 한국 기독교의 경우, 일부 교회는 여성들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양적 성장을 중심으로 규모를 늘려왔다는 점에서 대기업 모델과 닮아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많은 여성들이 세계화 과정 속에서 주변화 돼왔으며, 이와 같은 여성의 주변화가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남성 중심의 해석으로 인해 정당화됨으로써 더 악화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17. 남녀 참가자 모두가 여성들이 고통받는 실제 경험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총체적인 해방과 자각의 과정이 되었다. 동시에 이것은 치유와 힘을 돋우는 순간이 되었다. 많은 여성 참가자들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가부장적 구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현존하는 종교적·영성적 공동체들이 어떻게 그러한 행위들을 정당화 해왔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18. 다른 종교적·정신적 공동체들 사이의 연대는 지속적인 해방과 일깨움을 위한 강력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들의 향후 행동과 실천과제를 고민할 때 종교적·정신적 공동체들의 경전과 가르침을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성 스스로가 힘을 얻고,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통합적이고 실천 지향적인 정신적 가치

19. 세계화에 도전하는 종교와 정신적 가치의 역할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지금 시기의 문제들에 더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신앙과 내적 태도를 새로이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해방과 깨달음을 위해 우리 자신의 종교적·정신적 공동체들의 창시자들이 품었던 본래의 전망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 새로운 정신적 가치들을 창조하기를 바란다.
1)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이원론과 이원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통합적이고 생명 중심적이어야 한다.
2)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민중들이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네트워크에 기초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공동체 중심이어야 한다.
3)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평화, 조화, 존중, 동반자 관계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
4)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망을 갈구하며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영감을 주는 샘물이어야 한다.
5)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억압에 대한 투쟁과 생존을 위한 저항의 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민중들의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6)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지구적이 되어야 한다.
7) 정의, 평화, 그리고 인권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태적 감수성,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정신적 대안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자비, 연민, 사랑 그리고 연대에 기초한 공동의 비전을 위해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8) 대안적 생활방식인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세계화가 부추기고 있는 소비주의, 물질주의 문화에 대항하는 실천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9) 결국,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대안은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중의 투쟁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이끌면서 동시에 구체적이고 대안적인 실천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마치면서 : 공통의 전망
종교적/대안적 관점

20. 우리의 전망은 우리 아시아와 유럽의 종교·문화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신적 가치에 투신할 때 얻어지는 '생명'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의 원천에서 인간(남성이나 여성)과 자연,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와 다양성 속의 일치를 키워갈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상호성, 자비, 공동선에 바탕을 둔 세계화를 구상하고, 만들어 나가도록 격려하고, 힘을 준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거역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 저항하고, 정의, 평화, 연대를 공유가치로 삼는 대안적이고 포용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데 힘을 줌으로써 무력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21) 우리 참가자 모두는 이러한 종교적/대안적 가치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희생당하는 모든 이들과 연대하며, 우리가 지난 시간동안 고민해온 새로운 정신적 대안이 우리가 속한 종교/정신적 전통 안에서 내적 쇄신과 해방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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