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한국경제, 변화와 갈등의 실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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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작성일
2000-12-1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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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변화와 갈등의 실체는 무엇인가?

백 용 호(경제학 박사, 삼성경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새 천년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화두(話頭)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할 '거대한 흐름'(mega-trends)에 대해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분권화의 시대', '문화의 시대' 그리고 '개인의 기회(opportunity for individuals)의 승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새 천년,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두 개의 힘이 다른 조류를 압도하면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바로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이다.

세계화는 비단 경제적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방위적 개방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국경이 무너지면서 경쟁은 심화되고 여러 나라들이 개혁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위한 산고를 치르고 있다. 그 목표는 물론 종국적으로 자유시장경제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정보화의 물결은 더욱 세차다. 정보화는 인간의 사회 경제적 교접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전통적 매스미디어의 역할을 급속하게 축소시키는 한편,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교환을 가능케 함으로써 개인의 창의성이 중시되는 시기를 앞당겼다. 정보화의 물결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수반하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금 이 순간에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듯 두 가지의 메가트랜드가 초래할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세계화와 정보화, 이 두 개의 흐름은 상호 보완하고 교호(交互)하면서 그 영향력을 증폭시켜 갈 것이다. 최초의 글로벌 거래라고 할 수 있는 금융거래 역시 거대 규모의 컴퓨터 네트워크에 의해서 가능해 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극적 변화가 우리의 '사회적 존재양식'에 대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기회가 넘치고 무한한 발전이 가능한 미래, 21세기 황금시대의 '가나안 땅'이 정말 도래하고 있는가? 아니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회색의 시기'로 진입하는 것인가? 물론 그 대답은 변화가 몰고 올 다양한 도전(challenge)들을 수용할 응전(response)의 전략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가에 달렸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나이스빗(J. Naisbitt)은 '비전과 낙관주의를 지녀라'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인류와 그 문화의 진화사에서 가장 근사하면서도 흥분되는 시대로 빠져들고 있는지 모른다. 존재양식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해에 필요한 나침반을 이미 준비했을 수도 있다.

국내에서의 논의 역시 대체로 낙관적이다. '지구촌경제' 시대에 기업은 자본, 노동, 기술 및 경영여건을 최적 결합하여 생산과 시장을 확대해 나가면서 경제성장을 자극한다. 정보화로 인해 소비자는 관련정보를 손쉽게 획득하여 제품선택의 폭을 전세계를 상대로 넓히는 동시에 고품질의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들의 삶의 질은 한 단계 높아진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어쩌면 세계화, 정보화라는 도전 그 자체를 과소평가 하거나, 아니면 국내의 제도적인 여건을 도외시한 결과일 수 있다. 더욱이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고뇌의 여과과정이 충분치 않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이다. 사실 국내의 지식인들이나 매스미디어가 이들 부작용에 대한 수많은 선진국학자들의 경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컨대 금융자본의 자유이동에 따른 위험을 대비할 제도적 장치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주변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정보화에 있어서도 'big brother is waching you'가 아닌 'many small brothers are waching you'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한다.


Proposition 1) 우리 사회에 자유시장경제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가?


80년대에 들어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그랬듯이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개혁이 지향하는 경제체제는 분명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경제체제이다. 즉 시장경제의 보편성을 수용함으로써 개방체제의 도전에 대한 대응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IMF를 통한 자금지원과 함께 우리정부는 정책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패키지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이러한 체제선택의 배경이 되고 있다. 금융개혁을 통한 은행의 책임경영과 자본시장개방을 전제로 한 제반규제의 철폐, 공기업의 민영화, 정리해고도입을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성의 확보 및 긴축금융 재정을 통한 정부의 경기조절기능에 대한 제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제고하는데 있어 경험적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 뉴질랜드와 같은 앵글로-섹슨 계통의 국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시장경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개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는 일단 회의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자유시장경제 이념이 개인주의, 합리주의 등과 같은 문화규범이 존재할 때 비로소 작동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보편성'(universalism)은 실제로는 서방세계에 고유한 '문화적 특수성'(particularism)속에서 서식해온 것이다.. 일부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경제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게다.

아담 스미스(A. Smith)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은 '법질서', '경제질서' 그리고 '윤리질서'가 시장경제 작동을 위한 제도적 문화적 조건임을 강조해 왔다. 시장의 경쟁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법체계'가 확립되어야 하는 동시에 경쟁을 수용할 수 있는 경제주체의 '윤리규범'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 개의 범주는 상호 유기적으로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 중 어느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단순히 경제의 하부구조를 고친다고 해서 시장구조의 원형이 제 모습을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금융제도와 같은 제도개혁은 시장경제의 작동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법질서와 윤리질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하면서 외형적 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경제질서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그만큼 시장경제의 착근을 어렵게 할 일련의 전근대적 요소가 도처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게임의 규칙'(rule of game)은 무시되기 일수이다. 시장경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게임의 규칙은 통상 법적 규범의 형태를 띤다. 법질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경쟁질서의 창출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이고, 따라서 법을 지키고 준수하는 법치(rule of law)의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경우에는 시장기능이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법치문화는 인치의 문화 속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경영에 있어 회사법, 기업법, 파산법 등과 같은 일련의 법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치의 성격이 강한 경영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주체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과 경제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면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외환위기의 책임이 재벌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에 있었다는 주장이 그 동안 설득력 있게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이다.

막스 웨버(Max Weber)가 말한 직업윤리도 우리에게는 희박하다. TV를 시청하면서도 최소한 호두를 깨는 수고정도는 해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부캐넌(J. Buchanan)식의 직업윤리의식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직장이건 이를 천직으로 받아들이는 소명의식이 결여될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반칙의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도 도처에 확산되어 있다. 장기간에 걸쳐 진화론적 발전을 해온 도덕률은 사익추구에 있어 일정한 도덕적 규범을 모두가 준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에 대한 사회구성원간에 묵시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행위가 사익추구에 역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같은 현실은 시장경제의 작동을 더욱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쿠야마(F. Fukuyama)는 한국사회를 '불신의 사회'(society of distrust)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를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중심의 사회임을 강조하면서 연에 의한 내부구성원들 간에는 신뢰가 유지되는 반면에 외부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보임으로써 사회전체의 신뢰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 같은 불신과 단절의 벽은 시장경제의 정착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 시장사회는 익명성의 사회이며 따라서 익명의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trust)라는 무형의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기업 정서도 시장경제의 정착에 걸림돌이다. 슘페터에 따르면 특히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비판적 사회의 정서는 관료주의와 함께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한,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확산돼 있는 반기업적 정서를 해소하고 기업친화적 문화를 확립하지 못한다면 발전의 동력을 회복할 수 없다. 자본주의 발전의 다이나미즘은 혁신이고, 혁신의 주체는 슘페터가 지적한대로 기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근의 경제위기는 지금까지 살펴 본 여러 가지 문제들이 누적된 결과일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은 분명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다시 도약하는데 있어 앞으로도 질곡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장잠재력을 배양하고 시장경제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금융개혁이나 재벌개혁과 같은 경제개혁만이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개혁을 통해 문화적 토양을 배양해야 한다. 만약 앞에서 지적한 일련의 문화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다면 새로운 경제질서의 태동을 위한 산고의 시간도 그만큼 길어질 것이고 세계화에 대한 저항도 그만큼 거세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경제학의 모델 중심적 분석방법에서는 문화규범을 포함한 일련의 제도적 요인들을 '여건'으로 처리하여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학이나 통계학과 같은 과학적 분석기법에만 너무 길들여 있어서일까? 아무튼 그 결과 경제이론의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학문적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본원적 문제해결이 쉽지 않고 세계화의 접목 역시 부단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 고민의 출발이다.


Proposition 2) 세계화에 따른 미증유의 경쟁에서 불가피하게 확산되는 '패자'의 문제는 하이예크(Fr. Hayek)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시장'의 책임이 아닌 당사자의 '운'(luck)으로만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 이때 심화되는 계층간의 갈등구조로 인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관리능력은 우리 사회에 충분히 배양돼 있는가?


경제주의에 입각한 재화 및 생산요소의 이동에 있어 국경이라는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 세계화라고 할 때 세계화는 지구촌차원의 경쟁을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제고되고 기술과 정보의 확산이 가속화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세계화는 재화의 이동과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체제이념의 지구적 확산을 동반하고 있다. 특히 금융산업과 정보산업을 앞세운 미국의 경제패권주의(Pax Americana)가 계속되는 한 미국식 시장주의의 확산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갈등이다.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유주의 경제논리가 확산되면서 중산층은 몰락하고 소수의 상위집단과 다수의 저변집단으로 사회는 양극화되고 있다. 인구의 20%만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향유하고 나머지 80%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20대80의 사회'의 도래는 사회의 갈등구조를 심화시켜 공동체 자체의 안정성이 위협받게 된다. 바로 마르틴(H. Martin) 등이 지적한 '세계화의 덫'이 여기에 있다.

이른바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 '터보 자본주의'(turbo capitalism) 등으로 비유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창의와 자유를 바탕으로 경제활력을 고취시키면서도 사회적 계층구조를 승자와 패자로 양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맨체스터(manchester)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시킬 개연성이 높다. 바로 '글로벌 패러독스'(global paradox)이다.

여러 국가에서 개혁의 핵심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에 있어서도 미국식의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는 자본의 지배논리를 더욱 강요하고 있다. CEO의 관심은 종업원의 복지가 아니라 생산성향상을 통한 주주이익의 극대화에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분배에 있어 노동자의 몫을 감소시킨다. 실제 국민소득가운데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노동절약적 기술진보가 지속되면서 R&D 비용, 마케팅비용, 브랜드 관리비용 및 회사 이미지제고비용 등이 상대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이다.

한편 경쟁의 압력 속에서 개별기업 뿐만 아니라 정부 역시 기존의 사회복지지출을 축소시키고 있는 점도 갈등구조를 증폭시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실제 선진국들의 경우 재정지출대비 사회복지비 지출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영국의 블레어 정부, 독일의 쉬뢰더 수상이 표방하는 '제3의 길'이나 '신중도' 노선 역시 작은 정부의 실현과 개체의 자율 및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서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산업입지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기업에 대한 각종 세 부담을 완화하고 가능한 한 정부개입을 줄여 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21세기에 예상되는 최대의 도전은 대량실업 및 고용의 불안정 문제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는 개체의 사회적 통합과 경제주체들의 자아실현의 수단임을 고려할 때 고용기회의 박탈은 당사자의 실존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된다. 그러나 문제해결이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경제성장에 대한 기술진보 및 생산성 상승의 기여도가 높을수록 성장에 따른 고용창출효과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장제일주의는 자칫 `일자리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을 초래하여 '노동의 종말'(the end of work)의 순간을 앞당길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세계화의 덫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국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성장률둔화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세계화라는 큰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한 re-structuring, down-sizing 그리고 out-sourcing과 같은 일련의 구조조정노력은 대량 실업사태와 함께 노동시장에 있어 미증유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전통적 의미의 정상적인 고용관행이 자영업이나 파트타임 노동과 같은 불안전고용으로 급속히 대체되면서 계층간의 갈등구조도 심화되고 있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 외환위기 그 자체가 실업을 크게 증가시켰고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IMF가 미국의 시장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 경제의 특수성을 무시한 상황에서 남미나 러시아에서 요구한 일련의 긴축정책을 무리하게 요구한 측면이 있는데, 이로 인해 실물경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실업이 크게 증가하였다. 비록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IMF도 그러한 실수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97년 12월 IMF와의 최초 협상에 따른 긴축과 고금리로 인해 성장기반이 급속히 무너지자 이듬해 7월까지 5차례에 걸친 수정합의를 통해 긴축기조를 완화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사회적 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관리능력은 배양되어 있는가? 대답은 분명 '아니오'이다.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에는 재정의 복지기능이 극히 취약한 실정이며 아직도 저개발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정부의 사회 정책적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것마저, 정부의 정책의지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누적되어 예산제약이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계화의 도전, 특히 사회적 갈등구조를 제어할 청사진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책의 개발보다는 세계화에 따른 긍정적 측면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경제위기의 극복이라는 단기성과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도 문제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국가와 시장,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post-IMF시대의 산업정책과 교육정책 그리고 혁신의 방향과 내용을 설정하는 작업이야말로 중차대한 시대적 요구임이 틀림없다.


Proposition 3) 지역이기주의라는 또 하나의 도전을 맞아 동(북)아에서 우리 나라의 좌표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겠는가?


세계화가 반드시 하나의 경제권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세계화에 따른 이른바 심층통합(in-depth-integration)의 과정에서 개별국가의 경제주권은 제약되고 문화적 다원주의가 위협을 받으면서 헌팅톤(S. Huntington)이 주장한대로 문명충돌현상과 함께, '지역적 이기주의'(regional egoism)의 출현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지역주의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리고 산업구조의 특성으로 인해 태동하였다. 드러커(P. Drucker)는 '고도기술산업은 충분한 경쟁과 강한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도기술산업은 독점적으로 되어 게을러지고 마침내 진부하게 된다.'면서 국가보다는 더 큰 경제단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분명히 유럽공동체는 '공동시장'으로 출발하였으며 순수한 경제적 조직이었다.

문제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의 과정에서 지역주의의 이기적 경향이 더욱 공고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은 종전의 12개 회원국을 15개 회원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단일 통화 유로의 출범에 이어 외교, 안보정책 및 법무, 내무협력까지도 추진해 통합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같은 통합은 유럽내부의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시장기능의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경제적 목적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전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여 유럽전체의 정책주권을 확보하고자 노력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세계화와 지역주의는 앞으로 국제경제관계를 조건지을 두 개의 핵심 축이 될 전망이다. 이 두 가지 조류는 상호보완적이면서 동시에 갈등적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통합체들이 역내 무역과 투자의 자율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완적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별 지역경제단위들은 역외국가들에 대하여 다양한 차별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차원적인 대응자세가 요구된다. 가령 WTO의 Millenium Round에서는 부정부패, 환경보호, 산업정책 등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보편적 기준(global standard)이 설정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기준만을 수용한다고 해서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닐 터이지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EU와 같은 경우에는 EU자신의 추가 기준을 설정하여 이를 통상 정책적 제재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지역이기주의를 대응하는 데 있어 APEC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회원국가들간에 발전격차, 산업구조의 이질성, 특히 유럽과는 대조적인 문화규범의 이질성에 기인하여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의사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북아 내지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sub-regionalism'에 보다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내 지역통합의 실현은 비단 역내분업을 극대화시키고, 효율적인 정책조정 -예컨대 Regional Surveillance System을 통한-에 의한 제2의 위기발생을 방지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중 장기적으로 확대 심화되고 있는 지역이기주의에 대한 동(북)아의 협상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역주의화에 대한 체계적 전략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상황변화에 대한 즉흥적 대응이 반복되고, APEC편향적 정책만을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일본과 중국간에 예상되는 지역패권구도의 갈등 속에서 우리 나라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의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APEC과 동(북)아에 대한 중층적 접근과 전략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양자간의 갈등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화와 지역주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두 개의 벡터로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벡터 방정식의 해답 역시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주의화에 대한 대응전략을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다.


Proposition 4) 정보화시대에 있어 사회적 계층구조의 실체는 어떤 것이며, 노동시장의 단절화 및 노사관계의 질적 변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화와 함께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또 하나의 흐름이 정보화이다. 정보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이에 따른 정보의 확산은 모든 분야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구(聖句)는 이제 '정보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현대적 의미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정보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경제면에서도 정보화는 소비자의 구매행위, 기업의 생산 및 판매 그리고 판매대금의 결제뿐만 아니라 성장패턴에까지 전방위적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근력 및 하드웨어 중심의 성장패턴에서 두뇌 및 소프트웨어 중심의 지식기반 유연체제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는 비단 국가 내에서만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간의 빈부격차도 심화시킬 수 있다. 두뇌중심의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선진국은 더 이상 후진국들의 인력과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킬 것이며 그에 따라 남북무역은 크게 퇴조하고 후진국들은 빠르게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세계무역의 대부분이 OECD 역내무역인 오늘날 선진국은 후진국들의 문제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어쩌면 정보화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앞으로도 선후진국간의 갈등과 소득격차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정보화는 기존의 경제이론에 대한 도전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정보를 일찍 이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최초의 이익'은 영구적일 될 가능성이 높으며 시장의 구조는 불완전경쟁의 지배를 받게될 것이다. 이른바 수확체감의 법칙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기업규모와 경영효율성간의 관계 역시 재조명되어야 할 상황이다.

기업규모의 비대화에 따른 경영비효율성(X-inefficience)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보산업, 자동차산업에서 금융, 인터넷부문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수 합병에 등에 의한 초대형 거대기업의 출현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국제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기업문화의 동질화와 정보화에 따른 거래비용의 감소가 그러한 초국적 거대기업의 출현을 촉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히, 전략산업부문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초대형기업들에 의한 세계시장의 분할에 대한 우리의 산업정책과 기업의 대응전략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정보화에 따라 예상되는 여러 가지 변화와 도전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관심을 보여야 할 사안은 사회경제적 계층구조의 변화이다. 산업혁명이후 제조업중심의 공업화 과정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 계층구조가 결정되었으며, 이른바 유한계급과 무한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의 극복이 어느 시대에 있어서건 중요한 정책과제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정보사회에 진입하면서 생산요소로서 물적 자본재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지식과 정보'라는 무형의 재화가 핵심요소로 등장함에 따라 사회적 계층구조는 소수의 지식소유 집단과 지식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으로 양분되어 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단층선의 변화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on-line과 off-line간의 갈등은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정보화사회에서 노동시장의 구조변화는 불가피하다. 노동력의 이동성(mobility)은 크게 제약된다. 과거 산업혁명이후의 공업화 과정에서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직종이 생성되어 직업선택의 범위가 넓었고, 기업 내에서도 노동자의 숙련도에 따라 횡적 종적 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정보지식사회에서는 소수의 programmer와 다수의 keypuncher로 고용구조가 단순화되면서 동시에 두 집단간의 경계선이 단절화될 전망이다. 또한 임시직과 일용직의 증가로 인해 고용의 불확실성이 크게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과거에 제조업 중심사회에서 지배적이던 안정적 정규노동관계는 급속하게 해체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보사회에서 예상되는 일련의 도전, 갈등, 불확실성에 대한 중장기 정책비전이 마련되어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가령 재정에 의한 과도기적 고용기회의 창출이나 저소득계층에 대한 지원과 같은 사후적 대증요법만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Proposition 5) 이상과 같은 역기능에 대한 해답이 유보된 상태에서, 과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가치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갈등구조를 완화시키지 못한다면 80년대 이후 문명권을 초월해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가치(basic value of market economy)가 붕괴하면서 다수의 한계집단사이에서 국가와 체제에 대한 회의가 확산될 개연성이 높다.

사실 시장의 윤리적 토대는 개체에 대한 자유의 보장이다. 사고와 행위의 자유는 시장경제체제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적 원천인 것이다. 시장이란 단순히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보장하고,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대로, 인간의 내재적 교환성향(propensity to exchange)에 기초한 수급의 기술적 조절기능만을 담당하지는 않는다. 시장경제의 형이상학적 기반은 자유의 실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체의 자유영역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야말로 시장경제와 유기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정보화에 따른 경쟁논리의 지배, 실업의 증가, 고용의 불안정 및 노동시장의 단절화 등이 동시적으로 작용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가치에 대한 회의, 비판 및 냉소주의는 확산될 위험이 매우 높다. 이 같은 우려가 '세계화란 미국 금융자본의 세계지배 전략'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념의 부활'까지를 예견하는 홉스봄(E. Hobsbawm)과 같은 진보적 진영에서만 제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다렌도르프(R. Dahrendorf)와 같은 자유주의자 역시 미래사회에 있어서 국가경쟁력 - 사회적 친화력 -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목표가 위협을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 실업의 증가는 시장경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가뜩이나 시장경제의 이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기반이 취약한 실정이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어쩌면 관주도 공업화의 '성과'가 정부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고 시장자체의 기제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을 수 있다. 물론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보면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주도의 자원배분,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원동원방식이 효과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장이 주로 요소투입에 의존하는 외연적 성장(extensive growth)의 단계에서 '계획"은 '시장'에 비하여 목적지향성이 강하고 자원동원에 유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혁신과 생산성 상승주도의 내연성장(intensive growth)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쟁기능의 활성화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혁신, 원가절감, 경영의 합리화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압력은 시장경쟁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라는 제도는 하이예크(Fr. Hayek)의 지적과 같이, 문명사적 발전과정에서 진화해온 최선의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체제유형인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시장경제의 원형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시장경제라는 기제가 가령 금융, 통화제도와 같은 공식적 제도(formal institution)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비공식적 제도(informal institution)의 형성과 같은 조건이 구비되어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경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문화, 윤리규범 속에서 그 자양분을 공급받는 기제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시장경제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일련의 개혁작업은 단순히 경제부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 영역에 걸쳐 보다 광범위하고 실효성 있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문제가 여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철학 내지는 가치규범과 사회구성원이 지향하는 가치관간에 동질성(identity)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대치상황과 지속적인 반공교육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확고히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Proposition 6) 오늘날 우리사회의 갈등이 단차원적인 금융개혁이나 벤쳐산업의 육성 등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문제들인가?


물론 문제 해결은 나라마다 상이하다. 사회구성원의 이질성이 높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의 경우에는 성장을 통한 신규고용창출 및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실업문제와 같은 사회적 갈등을 정면돌파하고 있다. 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사회보장을 목표로 하는 영국이나 불란서 그리고 독일에서는 전통적인 시장편향적인 정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재정의 고용창출기능에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두고 정부개입에 의한 '노동의 재분배'를 시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지금부터라도 현실과 특수성을 고려한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창조적 기술개발, 정보혁명의 선도 그리고 금융산업의 경쟁력 등은 분명 미국식 시장경제의 장점이다. 또한 부품산업을 중심으로 중소기업을 활성화하고 서비스산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등 고고용의 성장전략도 추구해야한다. 많은 선진국가들의 사례를 볼 때 노동집약적 중소기업의 혁신능력이 고용창출 및 고용의 안정성에 있어 중요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의 세제개혁도 필요하다. 그야말로 다차원적인 논의와 처방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같은 논의는 현명한 학자들의 몫으로 넘기면서 여기서는 몇 가지 흐름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갈등의 실체를 공유해야 한다. 도전에 대한 응전의 전략 마련은 문제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21세기 도전의 성격을 인식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 비판적 자기성찰 그리고 '시지프스'적 고뇌가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천착을 거부하는 정치적, 지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게 현실이다. 정책의 시계(視界)가 단기적이라는 데에도 그 원인의 일단이 있을 터이다.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국가발전의 장기적 측면은 항용 관심의 사각지대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자칫 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면서 한국 사회의 장래를 매우 어둡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이념과 정책을 내세우는 현정부의 정치적 기반마저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엄청난 불만과 저항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99년 말 미국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 각료회담, 올해 다보스 경제포럼, 태국 방콕에서 열린 UNCTAD 총회 그리고 최근 우리 나라에서 열린 ASEM 회의에서의 NGO들의 격렬한 시위가 어쩌면 그 같은 조짐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복지정책에 있어 '정부와 시장'과의 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사회복지기능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띤다. 기본적으로 개체의 경제적 문제를 당사자의 '책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기는 하나, 한편 불가피하게 계층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공동체의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시혜적 성격의 전통적인 사회안정망의 구축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안정망을 구축에 소요되는 재원마련이 항상 논란이 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구조조정을 위한 재정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데다 중 장기적으로도 감속성장에 따른 조세수입의 증가 역시 제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소득에 대한 세원포착을 강화하고 최대의 낙후 부문으로 전락해 있는 공공부문의 효율성 제고를 통한 재정절약 등으로 재원을 조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지정책에 있어 정부의 개입은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지원 부차성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개체의 문제는 그 일차적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으며 정부지원은 보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 주도의 개발전략이 '성공과 실패'라는 야누스적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에만 집착, 복지문제 역시 정부가 나설 때 전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자신감을 갖는다면 큰 오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일을 해야만 복지혜택이 주어지거나, 일을 할 수 있도록 복지제도를 운용하는 이른바 '생산적 복지'의 개념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개입이 신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자칫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외환위기 역시 사회에 만연된 도덕적 해이가 중요한 원인일 수 있는데, 그 일차적인 책임은 지난 40년간 '관주도' 경제에 안주해 온 정부에게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가령 농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입된 막대한 자금 중 일부가 불법전용되거나 부실투자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다시 농촌복지차원에서 일률적인 부채탕감이나 이자경감 요구를 들어준다면 경제주체들의 고질적인 병리구조는 해소될 수 없다. 부실관리 내지는 부실운용의 책임을 사회로 전가시키는 꼴이다. 실업문제 역시 기본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나 고용창출로 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지원 등을 통해 실업자의 생활을 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상을 줄 경우 이것 역시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당사자들의 근로동기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복지정책에 있어 정부의 개입은 원칙과 범위가 분명해야 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문제해결을 위한 또 하나의 과제는 대의정치의 기반을 확립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저성장과 대량실업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계집단의 갈등을 해소하고 체제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 같은 신뢰형성은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사민당이나 사회주의 정당과 같은 진보적인 정당이 존재하여 주변계급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작동하고 있으며 대의정치의 기반이 확립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회적 갈등을 흡수할 수 있는 정치조직은 고사하고 정치권이 갈등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에는 갈등을 힘으로 다스렸다.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정치권의 갈등의 관리능력은 거의 제로이다. 성장일변도의 정책으로 인해 재정의 복지기능이 아직까지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흡수를 위한 민주주의적 대의정치마저 제자리를 잡지 못한 현실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결정과정에서 이익집단의 참여의 폭을 확대하는 등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구성원과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가 서로 조화를 이룸으로써 체제의 접착력이 강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인 '나눔의 문화'를 정착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구조적 갈등은 정부만이 해결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제주체, 특히 기업들로부터 일방적인 박애주의나 사익추구가 아닌 공익추구만을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기업으로부터 맹목적 박애주의가 강하게 요구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면 이것은 아마도 이기주의나 사익의 추구 등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일 것이며 이는 자칫 기업의 영리추구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문제는 나눔이라는 것이 갈등해소의 차원을 넘어 '사회 자체를 키우는 재투자'라는 점을 능동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 나라의 경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발과정에서 형성된 부정적 기업관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구태여 슘페터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업친화적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곳에 혁신적 기업의 출현은 어렵다. 따라서 기업 스스로가 기부 등을 통해 나눔의 문화를 확산하는 것은 이른바 '창조적 자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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