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대안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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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작성일
2000-10-13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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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대안행동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1.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
1999년 11월 WTO각료회의가 열리던 시애틀에서는 반세계화 시위로 인하여 개막식이 취소되었다. 2000년 1월 세계경제포험(WEF)가 열린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시위대들의 회의장 진입시도로 경찰과 충돌하였다. 2000년 4월 IMF·세계은행의 춘계 연례회의에서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집결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뤘고, 시위대 600여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며칠전 9월 26일 IMF와 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열리는 체코 프라하에서는 전세계에서 집결한 1만여명의 시위대로 인하여 하루 앞당겨 총회가 폐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에서의 한결같은 구호는 무분별한 세계화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그를 주도하는 IMF나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개혁요구 등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새로운 세기 지구촌 민중들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neo-liberal globalization)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하는 과제 앞에 서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문민정부에서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부상하기 시작한 '세계화'(globalization)는 현 시기 세계체제의 변화를 파악한 개념어이다. 세계화(혹은 범지구화)라는 것은 개별국가 및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활동들 간의 초국가적 통합이 증대됨으로써, 국가와 국가 간의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의 정도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그 결과 개별국가 혹은 개별국가 내의 개인의 삶이 초국가적 차원의 질서에 의해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상황, 그런 기초 위에서 초국가적인 지구촌 질서가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하여 가는 과정이다. 기든스의 표현대로 개별 국가 및 개별사회의 삶이 국제사회의 점증하는 상호의존성에 의해 더욱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는 전세계적 질서의 새로운 변화는 지구촌 사회의 상호의존이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지구화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의 경제활동이 일국적 범위를 넘어서서 세계적·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현 시기 범지구적 자본운동에서 주도적인 것은 과거처럼 상품자본이나 대부자본과 달리 초국적 금융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에 비해 금융자본의 초국적 운동은 더욱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WTO체제의 성립 이후 금융자본의 범지구적 운동에 대한 장애는 낮아지고 있으며,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하여 범지구적 자본운동의 기술적 장애 역시 낮아지고 있다. 정보통신혁명, 인터넷혁명 등으로 인한 '시공간적 압축현상'(time-space compression)은 '지리적 거리가 곧 사회적 거리일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공간조정기술(space-adjusting technology)에 의한 범지구적 네트워크화는 자본, 기술, 인종, 이데올로기, 문화 등 다양한 차원의 지도를 바꾸어놓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가 초기부터 세계자본주의였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16세기 이후 근대자본주의의 세계성(globality)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연장에 있는 것이기는 하나, 분명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 "지구화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존재하지마는, 이러한 변화는 이전보다 통합성이 훨씬 증대된 '지구촌사회'의 초보적 형성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EU, NAFTA 등 지역주의적 블럭의 불완전성에서도 보듯이 많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개별사회의 민족적·문화적 경계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개별국가, 개별국가 내의 기업들의 활동, 개별사회 내의 대중들의 삶이 이제 개별영토를 넘는(cross-border) 요인들에 의해 보다 폭넓게 규정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현실로서 인정케하고 있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를 보자.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19세기 서구 근대사회의 정치경제적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총괄이었던 자유주의가 범지구화되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근대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적 자유주의 등을 포함하여 복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현시기 신자유주의는 시장자유주의, 시장자율주의, 시장에 대한 '경제외적' 개입들의 극복이라는 경제적 차원을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18-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주의국가에 대항해서 법의 지배를 통한 인권 및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시장경제의 확립을 주창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자들은 현대의 비대한 관료국가와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있는 국경에서의 보호조치들을 비판하고, 국가개입의 축소와 대외개방을 통하여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시장을 복원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알파와 오메가는 시장이다. 봉건적 경제질서에 맞서 근대 자유주의는 시장자율적인 질서가 '공공선'이 달성되는 기제로 보았다. 시장에 대해서 부과되었던 각종 정치적·경제외적 요소들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시장이 만병통치약이 되고 자유시장논리에 의해 공공선이 달성된다고 믿었던 구자유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논리로 회생하고 있다.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자유주의는 시장자율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세계를 재(再)지배하려 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경제질서가 '국지적 시장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근대자본주의질서가 '국민경제'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바로 세계적으로 통합된 초국가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촌 사회운동에게 있어 쟁점은 바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일체화된 형태로, 즉 세계화가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상호일체화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고, 여기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이 바로 현시기 시민행동 및 민중행동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문제는 세계화가 아래로터의 진보적 세계화가 아니라, 위로부터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로서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배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울한' 현상의 가장 주된 요인은 현재의 세계화가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를 배경으로 하여, 그것을 주된 추동력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범지구화는 국제적인 자본축적체제의 구축, 시장의 범지구적 통합, 정보소통 기술의 발전에 기초하는 범지구적 소통의 발전 등이 상호결합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제 범지구적 운동을 하는 자본은 개별국민경제를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통합하고자 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합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정치적·제도적 장벽들을 철폐하려 하고 있다. 그 결과 이데올로기로서 '시장만능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국가실패'(state failure)에 대한 만병통치약(the market as a panacea)으로서 시장이 다시 부각되며, 탈규제화(deregulation), 민영화(privatization), 작은 정부(downsizing of the government), 개인책임에 대한 국가책임, '복지로부터 노동으로'(off welfare to work), 노동시장 및 기업구조, 생산의 유연화(flexibilization) 등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부각된다.
2. 자본운동의 '탈영토화'와 전후 '계급타협질서'의 해체
사회운동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자본지배의 존재형태가 일국적 차원을 넘는 방향으로 재조직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저항이 재조직화되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자본간의 국제적 경쟁의 격화는 과거의 복지국가와는 다른, 친(親)시장적·친성장적 국가를 요구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창출을 도왔고 그로 인해 국민국가는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국가적 형태의 정치권력은 일정 측면에서 자본운동에 제약이 되었고, 국민국가와 결합된 이데올로기는 자본운동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자본운동의 탈국민국가화 혹은 탈영토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친자본적 재편이 진행된다. 자본 간 경쟁의 격화에 따라, 초국가적 경쟁에 노출된 자본을 보강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그 결과 '국가실패'가 부각되면서, 서구의 국가는 과거의 복지국가로부터 최소주의적인(minimalist) 신자유주의적 국가로의 이행을 요구받게 된다. 국가의 역할은 이제 재분배적 기능 보다는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신성장노선'으로 경도되게 된다. 이제 국내시장에 대한 통제가 국민주권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신념은 깨진다. 과거에는 국가가 기업과 국민 요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였으나, 이제는 기업의 이해가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와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재구조화의 총괄적인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바로 글로벌 신자유주의(global neo-liberalism)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운동의 범지구화 및 자본 간의 국제적 경쟁의 격화를 배경으로 하는 국가의 변화는, 일국적 틀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였던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계급타협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과 파시즘 하에서의 사회적·계급적 투쟁을 통해 '획득'된 전후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가,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인 시장질서의 가혹성에 대항하여 전개되었던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결과로 자유주의적 시장질서에 대한 공적·사회적 규제장치가 제도화된 일종의 '계급타협'질서였다. 그런데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로 인해 일국적인 계급적 타협의 틀이 무력화되면서 시장에 대한 공적 규제들은 도전을 받고 시장 중심적인 체제로의 이행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응체제가 구축되지 않은 데에 있다. 즉 '규제되지 않은 세계화'의 결과로 '제어되지 않은' 초국적인 '자본지배'가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배의 재조직화에 대응하는 저항의 재조직화의 중요한 내용 중에는 바로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공적인 국제적 규제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핵심을 이루게 된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의 핵심적인 현상은 바로 이처럼 초국적 금융 자본의 광폭적 흐름이다.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전지구를 상대로 운동하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규제 장치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국제적 차원에서 더욱 심대한 문제로 표출되게 만든다. 특별히 선진국의 과잉자본은 과거처럼 생산 영역에 투자되기보다는 적나라한 돈벌이 자본주의로 전세계를 운동하게 되며,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이' '광폭하게'(violently) 운동하게 된다. 이러한 광폭성은 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투기성을 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발현시키게 한다. '카지노 자본주의' 혹은 '람보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바로 그러한 파괴적 측면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과거 일국적 체제를 전제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달러라는 기축 통화를 통해서 세계 금융 질서를 규율하였다면, 지금은 국민 국가적 경계를 허물면서도 아직 단일한 전지구적 규율기제가 형성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세계경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조지 소로스 조차도 투기적 금융자본의 규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잉자본의 세계적 운동에 아무런 규제 장치도 없는 상태에서, 헤지 펀드와 같은 국제적인 투기성 단기 자본이 파생 금융이라는 일종의 자양분과 시장 개방이라는 일종의 영토 확장을 통해서 전세계를 금융 태풍권으로 몰아넣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민국가적 경계 내에서 사회적·계급적 투쟁을 통해서 확립된 사회적 규제메카니즘을 붕괴키면서, 과거 '분절화된' 영역들을 단일한 범지구적 자유시장으로 통합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제3세계의 약소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폭한 흐름에 의해 방어막 없이 노출되게 된다. 세계경제체제의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는 나라들에서 이러한 자본운동의 광폭성은 내적인 문제들과 결합될 때,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의 외환위기의 근저에도 바로 이러한 규제되지 않은 세계화, 규제되지 않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운동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제 금융 자본의 흐름에 대한 어떤 규제 장치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지배의 재조직화'에 대하여 어떻게 저항의 재조직화를 달성할 것인가하는 과제이다.
3.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유경쟁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그에 대한 공적 규제의 역사였다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적 시장질서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자유경쟁적 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로 이해한다. 그러나 민중적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시장의 가혹성과 자본의 비인간적인 무차별적인 수탈에 대한 공적 규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자본 측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였겠지만, 노동 측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무한 이윤추구를 유일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공적으로 규제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세기 자본주의에서는 무한착취의 경향을 갖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통제장치가 없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및 세계대공황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규제장치 혹은 새로운 재생산양식을 갖는 '수정자본주의'로 변화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규제장치를 갖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양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은 노동, 민중, 시민사회의 힘이 강화된 조건 속에서 나타난, 그리하여 적나라한 자본운동에 일정한 공익적 규제장치가 제도화된 계급타협적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후 '사회적' 국가는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된 역량 발전을 배경으로 한, 일국 내의 계급역관계의 '균형' 속에서 성립한 체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포디즘(Fordism)적 체제로 나타났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노자 간의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계급타협체제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붕괴라는 새로운 조건 도래 및 범지구적 자본운동을 제약하였던 체제적 장벽의 붕괴,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해 범지구적 자본운동을 가능케하는 기술적 조건의 도래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일국적 경계를 넘는 범지구적 자본운동이 가능한 기술적·체제적 조건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자본주의가 실제 역량이나 작동방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포부의 면에서는 줄곧 전지구적이었다"이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운동은 영토적 한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제3세계가 '자본의 바깥'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자본운동의 공간적 영역은 제약되고 있었다. 여기서 자본운동의 탈국민국가화가 진전되는 것이다. 바로 이로 인해 이전의 사회적 자유주의 혹은 '연계적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는 도전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실물자본-노동의 동맹이 실물자본과 이로부터 분리된 국제금융자본의 반노동동맹으로 이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구(舊)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한 저항이 강화되면서 여러 규제장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또한 이러한 규제장치들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진영간 대립, 자본운동의 일국적인 한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자본은 바로 그러한 규제장치를 실효성있게 하는 조건들 자체를 뛰어넘어 범지구적으로 자유로운 자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결 속에서 자본운동에 대한 범지구적 규제장치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 지구촌 사회운동의 '현안'이 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자본운동에 대해 공익적 '족쇄'를 채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자본운동의 병폐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운동을 통해 투쟁을 통해 달성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현 시기 시민사회운동의 최소공약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이다.
4.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는 범지구적 민주주의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것을 자유시장의 역사가 아니라, 그에 대한 공적 규제를 위한 싸움의 역사로 규정할 때,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두가지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다. 첫째는 범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공적 규제를 강화할 것인가하는 점이며, 둘째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전개되는 국민국가--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화를 통제하면서 민중적·시민적 복지를 방어·강화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그럼 먼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여 범지구적 수준에서 어떻게 시민적 행동이 조직화되어야 하는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1)범지구적인 민주적 규제의 문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배는 광폭한 초국적 금융자본과 공익적 규제장치 없는 국제경제질서로 현상화하고 있다. 이것은 규제되지 않는 초국적 자본운동에 대한 '정치'적 규제의 문제이고 그런 점에서 글로벌한 민주적 규칙, 더욱 포괄적으로 '범지구적 민주주의'(global democracy)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20세기 자본운동에 대한 노동자와 민중의 조직화된 투쟁은 비록 제한된 것이지만 '사회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차원에까지 도달하였음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을 무화(無化)시키면서 진행되고 있는 자본운동의 세계화에 대응하여, 세계화된 민주적 통제는 부재한 상태로 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규칙(rule) 없는 세계화'에서 어떻게 민주적 규제규칙이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 with democratic regulatory rule)로 갈 것인가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저항은 바로 세계화된 민주적 규칙을 만드는 과정이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하는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는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영토적 기반을 침식하고 주권적 자율성을 제약하게 된다. 새로운 범지구적 민주주의의 룰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적 지형에서 확보된 민주주의의 '사회적' 성격은 껍데기로 되어가게 된다. 즉 국내적 계급투쟁과정에서 획득된 일국적인 사회보장기능과 경제관리 기능은 파괴되며 점차 빈껍데기로 되어가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민주주의의 적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과거 권위주의 하에서는 반독재와 반(反)시장주의투쟁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정권 시대로의 이행에 따라 오히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게 되며, 새로운 민간정부(civilian government)들은 정치적 부담없이 '자유롭게' 신성장주의적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민주정부' 하에서 점점더 정치와 시장은 분리되고, 국가의 장래가 유권자들의 손을 떠나 세계시장의 동요에 맡겨지게 된다. 민선민간정부가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의 더욱 좋은 정치적 외피(political shell)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지구적인 민주주의의 룰은 특별히 두가지 방향에서 작용하여야 한다. 먼저 현단계 세계경제질서의 '투기성'(speculativeness) 자체에 대한 국제적 규제이다. 현 국제경제의 패권국가인 미국의 자본주의는 이전 보다 더욱 비생산적인 자본주의로 전화되어간다. 미국의 과잉자본은 대거 금융부문으로 진출하고 여기서 금융 자산, 국채, 채권, 주식 등이 중요한 자본운동의 매개영역이 되게 된다. 일종의 자산 운용 형태의 자본주의로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자본주의가 과잉자본에 기반한 투기적인 자본주의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rrighi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미국중심의 현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순환사이클에서 산업적 팽창 보다는 금융적 팽창으로 특징지워지는 성격을 띄고 있다. 생산적 활동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주의의 최소한의 장점 마저도 현 범지구적 자본주의에서는 주변화되고 있다. 정상적인 무역거래 규모 보다는 금융적 거래의 규모가 17배 내지 25배에 이른다는 통계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투기적 국제경제질서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민주주의적 교정과 규제가 요구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로서 존재하는, 과잉생산 혹은 과잉축적과 과소소비 간의 모순은 새롭게 범지구적 금융질서에 편입되는 후진국들에서 더욱 극명하게 표출된다. 과거 유럽에서는 이 문제를 식민지 창출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후 케인즈 주의적 정책에 따라 국내 대량소비 체제를 만들음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일정하게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범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현대자본주의를 혁신하는 작업의 일부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작업은 범지구적 자본주의에 '사회성'을 각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적 측면, 즉 범지구화로 인한 국제적 양극화에 대해 민주주의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규제가 없는 세계경제의 결과는 세계적·일국적 빈부격차의 증대, 빈곤의 세계적 확산, 금융산업을 통한 불로소득의 증대, 선진국 초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 지배의 확대, 고용의 불완전·불안전성의 증대, 그로 인한 '노동유목민'화 등 국내적·국제적 양극화의 증대이다. 국내적·국제적으로 이른바 '20:80의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증대되고, 국제적으로 '빈곤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poverty)'가 증대된다.
IMF와 기타 국제금융기구들은 개별 국민국가 내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package)를 채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발전도상국의 외채는 이러한 정책요구(policy condionality)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동체가 되고 있는 IMF와 세계은행이 강제하는 정책은 크게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macro-economic stabilization) and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 프로그램으로 대별될 수 있다. 안정화프로그램의 기조는 '긴축정책이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칙은 '자유화'인데, 긴축은 재정지출에서의 사회보장적 및 사회정책적 지출을 축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구조조정은 금융시장, 자본시장 개방을 통하여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수탈'을 결과하여 결국 국내적·국제적으로 양극화를 촉진시키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양극화의 경향으로 결과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문제가 이제 시급하게 지구촌 시민사회에서 쟁점화되어야 한다.
2)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시민행동의 가능성--범지구화 속에서의 저항
국내적 차원에서도 소수의 정치경제적 강자(强者)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하듯이, 범지구적 수준에서도 이러한 규제가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민적·민중적 행동을 통해 이를 쟁취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범지구적 민주주의를 구성하기 위한 시민행동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가를 예시하여 보자.
(1)'자본운동의 범지구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의 활성화를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신시장주의는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이자 경제'개혁'의 이데올로기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를 근거로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고 있다. 과거 산업화가 근대화의 논리로 포장되었다면, 신자유주의나 정보화는 새로운 자본운동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된다. 자본운동에 대한 공적 규제장치는 '비효율'로 낙인화되며, '국가실패'라는 화두 속에서 '시장실패'와 시장의 가혹성은 가리워진다. 그런 점에서 시민행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우리가 범지구화의 과정이 '불가피한' 구조적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위로부터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세계화가 되도록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요구되게 된다.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성장만이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 생태적 지속가능성 등이 지구촌 시민사회의 새로운 목표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시민들이 성장과 시장가치를 뛰어넘어 대안적 가치들에 대해 더큰 애착과 감수성(sensitivity)를 갖도록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사회운동에서의 국제주의의 부활: 그동안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내부에서 국제주의적 담론은 주변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는 국가적으로 '분절화'된 투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점으로 사회운동을 위치시켜가고 있다. "자본은 지구적이고 노동은 지방적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주의의 부활과 국제주의적 연대의 강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범지구화는 한편으로는 그것이 초국적 자본의 지배를 확장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인권, 환경, 평화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범지구적으로 확산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연대의 기초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들은 범지구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문화적·의식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 주도의 현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로부터의 세계화로 규정하고, 인권.환경.평화.지속가능한 발전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활용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구상에 일국내의 사회운동의 의의를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는 시민행동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적극적 측면들을 지구촌 사회의 새로운 공론을 만들기 위한 계기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제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있는 시민사회운동의 공론공간을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국제주의의 부활과 국제주의에 기초한 국제적 연대의 조직화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어가고 있다. 시민사회의 범지구적 연계가 증진되고 있고, 이미 1992년 리우환경회의, 1993년 비엔나 인권회의, 1995년 코펜하겐 사회개발 정상회담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범지구적 NGO연대의 폭을 확장시키고 있다. 99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행동도 포럼 개최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에서부터 가두투쟁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12월 WTO 2차 각료회담을 무산시킨 워싱턴 투쟁이나 IMF 연차총회에서의 전세계 비정부기구(NGO)의 공동투쟁은 지구촌적인 공론과 공동투쟁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행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신국제주의'적 연대가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국제주의적 연대에는 환경단체, 여성단체, 무정부주의자들, 노동단체, 시민단체, 사회주의자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는 집단과 개인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연대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일국적 경계를 넘는(cross-border) 연대성이 형성되어 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 '자본의 도구'로만 활용되는 인터넷이 저항적 공론공간의 기술적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 및 민중조직 간의 국제적 연대의 실질화를 통해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이러한 방향에서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초국적인 자본운동에 대한 초국적인 공적 규제체계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노동자와 제3세계 민중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틀 내에서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구촌 사회운동의 '국제주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으로 요구받고 있다.
(3)범지구적 규제를 위한 국민국가 압박전략: 필자의 관점에서는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규제는 한편에서는 국민국가 혹은 그 연합에 의해 시행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탈영토화된(de-territorialized)' 자본운동에 대한 범지구적 규제를 국민국가에게 강제하고 그를 통해 국제적인 공적 규제가 제도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범지구적 민주적 장치를 위한 지구촌적 행동의 중요성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장치를 만드는 매개통로는 역시 국민국가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일 수밖에 없다. "세계화는 그것이 국가전략일 뿐만 아니라 시장의 전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U. Beck 같은 경우, 이른바 '세계시민정당'의 출현에 기대어 이러한 범지구적 민주주의 규칙의 실현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다. 세계화된 자본운동에 대응하는 이러한 초국가적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별도로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적인 방법으로 국가의 규제가 해체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국민국가에 대한 압박전략을 통해 국내외 시장을 초국가적으로 규제하는 강력한 틀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국가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전지구적 정치로 전환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된다.
(4)범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규제에 대한 논의의 국내화: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범지구적 규제에 대한 국내적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월가, 재무부,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는 국제금융기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패키지'를 외채국가에 강제함으로써, 지구의 자유시장화를 촉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항하여, 민중적 컨센서스를 만들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논의지형의 특수성 때문에, IMF사태에 대한 책임은 주로 내부적 요인, 특별히 재벌 책임론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실자본주의적 구조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제점이 파국적 상황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외적 구조, 즉 국제경제구조적 구조에 대한 논의가 주변화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광폭적인 초국적 금융자본이 사회적 관점에서 통제되지 않는 한, 세계경제의 약한 고리에서 언제든지 IMF사태가 터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적 기득권세력과 싸우는 투쟁과 함께, 세계적 관점에서 '국지적' 행동전략을 구사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국제적인 차원의 이슈들을 어떻게 국내화할 것인가, 또한 '먼' 이슈들을 어떻게 '가까운' 이슈들로 만들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적 규제에 대한 방안은 다양할 수 있다. Jubilee2000에 의해 캠페인이 전개되어 1999년 G8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본 극빈국 외채탕감운동, ATTAC과 같은 기구들이 부각시켜 온 바와 같이 국제적 금융거래에서의 토빈세의 도입이나 중앙은행 예탁금제 도입 같은 방식, IMF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거나 IMF를 국제적인 법정으로 끌고 가 개혁을 강제하는 운동, 'Reinventing Bretton Wood'이나 '50Years is Enough'같은 운동에 의해 부각된 전후의 기본질서의 근본적인 개혁운동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내적 문제가 곧 국제적 문제라는 인식의 확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 문제가 곧 국내문제라는 인식이 상호강화될 필요가 있다.
(5)반지구화적인 토착적·지방적 대안의 실험: 신자유주의는 시장주의의 범지구적 확산을 촉진하고 있고, 국내적·국제적으로 인간의 삶이 더욱더 시장질서 속에 편입되도록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민국가적 삶의 더욱많은 부분은 범지구적 자본운동에 포섭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민중적 저항은 비록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범지구적인 신자유주의에 반대되는, 혹은 그것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다양한 토착적·지방적 실험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역설은 그것이 범지구적 수준에서 시장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동시에 '재상품화'의 형태로 대중의 삶을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가혹한 시장으로 더욱 깊숙이 편입시켜감으로써, 그에 저항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촉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는 범지구화되어 가는 시장질서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실험, 지역경제공동체적 실험, 탈시장적인 소규모 생활공동체, 소비협동조합, 직거래네트워크, 녹색화폐, 복지네트워크, 지역화폐, 생활공동체, 생태공동체 등과 같은 탈(脫)시장적·비(非)시장적 소규모 대안생활체계 같은 형태들을 들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적 흐름의 지배화 속에서, 이러한 '비(非)시장적' 모델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이것이 체제적 수준에서의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더라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저항적 실천의 일부로 위치지워질 필요가 있다. 신종 발전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즉자적 거부로서의 토착주의조차도 그것의 존재의의가 적극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5. 반(反)신자유주의적 개입의 중요성
이상에서의 서술은 주로, 범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체에 대한 공적 규제를 강화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이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남한이라는 구체적 공간 속에서 신자유주의화를 통제하면서 민중적·시민적 복지를 방어·강화할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실천적 과제로 된다.
앞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서술하였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전개되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전개되는 개혁 및 정책선택은 기계적으로 그러한 세계적인 경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국가적 정치공간, 구체적으로 중앙정치공간 및 지역정치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시민적·민중적 대응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체제적 수준에서의 신자유주의의 국내적 결과는 국내적 요인의 매개에 의해 상이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비판적 정치분석에서 쉽게 이러한 측면이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사회변동의 과정이란 다양한 정치사회세력들의 투쟁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이고, 계급적·사회적 투쟁에 의한 개입에 의해 그 질적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이다. 한국사회는 구 권위주의체제의 민주적 개혁이 시대적 과제가 되는 민주주의 이행의 과정에 있다. 이러한 개혁의 진행과정에서 개입되는 복합적인 투쟁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을 때, 정치경제적 변동과정은 종착점이 정해진 '결정론'적 과정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역설적으로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의 통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지위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하는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Poulantzas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계급투쟁은 국가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자율적인 정치적·사회적 공간의 확장에 따라, 이러한 투쟁의 공간, 특별히 특정한 정책적 사안을 둘러싸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확장되게 된다. 비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한 시장주의적 압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일반민주주의의 정치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이라고 규정되는 이러한 공간은 확장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항하는 범지구적·국민국가적·지역적 투쟁이 이전과 달리 폭넓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범지구적 흐름은 개별 국민국가 내에서는 다양한 맥락 속에 존재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50년 동안의 '개발독재' 체제로 유지되어왔고 그것이 97년 야당정권으로 교체되어 '민주적 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하는 맥락 속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전제 위에서 볼 때,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개혁에는 '이중적 전선'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첫째의 전선은 구 개발독재 하에서 고착되어 온 구(舊) 질서의 개혁을 둘러싼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선은 이러한 구체제가 어떤 성격의 질서로 전환될 것인가를 둘러싼 것이다. 전자는 구 질서의 민주적 개혁의 범위와 성격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신질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먼저 구 질서의 개혁을 둘러싼 전선에서, 과거 개발독재 하에서 고착되어 온 '왜곡된 구 시장'질서 및 '왜곡된 국가' 질서의 개혁은 계급적·사회적 투쟁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가질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발독재 하에서 구조화된 대자본과 국가의 유착관계는 재벌로 대표되는 일부 독점대자본의 패권적 지배로 왜곡된 시장구조를 낳았다.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독점주의'적 사회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일부 독점적 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이다. 많은 신문언론이나 많은 사학재단들이 '전근대적' 맨테리티를 가지고 '가족주의'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독점적 세력에 소유되고 있다. 냉전적 대결 속에서 확장되어온 극우반공통제체제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국민정부가 50년 만에 야당정권으로서의 개혁의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그것은 시장질서의 극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개발독재 하에서 왜곡된 시장질서 및 국가질서, 사회질서의 과감한 민주적 개혁을 수행하여야 한다. 문제는 시민적·민중적 투쟁 여하에 따라, 바로 이러한 민주적 개혁의 과제를 둘러싸고 편차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서구에서처럼 2차대전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진보에 대항하는 '신'자유주의화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과거의 절대주의적·중상주의적 체제--우리의 경우 개발독재체제이다--에 대항하면서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자유주의'화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유주의'화의 압력은 50여년 동안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세기에 존재하였던 구자유주의는 이전의 중상주의적인 전근대적인 경제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김대중정부의 개혁과제는 일종의 '신중상주의적인 개발독재' 하에서 왜곡된 질서에 대한 민주적 개혁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구 체제에 대한 철저한 민주적 개혁의 지향성이 취약하고, 또한 관료화로 인한 개혁주체들의 보수화가 구질서의 철저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후퇴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질서의 성격을 둘러싼 대치선이다. 이것은 핵심적으로는 개혁의 경제적 성격을 둘러싼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부가 한편으로는 세계체제적인 수준에서의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으며(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시장주의'적 개혁을 강제하려는 대자본 등의 압력), 다른 한편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압력(反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경제정책 기조 상에 있어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그에 반대하여 민중적 복지를 관철하려는 흐름 간의 대립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민영화와 외국자본 '초대'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그 이면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통과되는 현상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양면적 성격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시적 규정성이 국내적인--중앙정부 수준 및 지역 수준에서--계급적·사회적 투쟁에 의하여 일정한 편차를 가지면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김대중 정부의 출현맥락과 서구 신자유주의정부의 출현맥락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즉 탈(脫)복지국가화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와, 반(反)개발독재와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계급본질론적·거시체제론적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정권이 된다. 특별히 재벌-초국적 자본과 김대중정부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분명 김대중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와 민중의 관계 속에서 보면, 국민정부는 과거의 반독재투쟁의 성과 위에 있고, '슈퍼(super)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민중적 투쟁으로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요구받고 있고, 자신이 그러한 '슈퍼(super)'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투쟁의 성과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김대중정부가 민중정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동시에 국민정부가 재벌-초국적 자본과 '체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정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르다. 그러나 그것은 김대중정부 하에서 계급적·사회적 투쟁을 통해 쟁취하여야 할 '편차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될 때 그것은 일면적일 수 있다. 예컨대 이회창 정부가 성립하였을 때와 김대중 정부가 성립하였을 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시적 압력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주체적 투쟁의 개입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공간이 일정하게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거시적 규정성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관철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민중적·시민적 개입, 나아가 계급적·사회적 투쟁이라는 매개변수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목하면서, 이를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반(反)신자유주의적인 투쟁의 긴장 속에서 결정되는 김대중 정부 경제정책 기조의 편차영역은 먼저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마하티르적인 노선'에서부터 탈(脫)민족주의적인 순응노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IMF 및 미국의 정책적 가이드라인, 즉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압박에 대하여, 이른바 '마하티르적 길'에서부터 대단히 탈(脫)민족주의적인 순응의 길 간에 다양한 편차가 존재할 수 있다. IMF처방을 '잘못된 투약'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평이 없는 상태에서, 물론 김대중정부의 정책노선은 탈민족주의적인 순응노선에 경도되어왔다. 신자유주의적 압력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원화의 '공간'이 존재하고, 아래로부터의 반(反)신자유주의적 동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다 진보적 정책수행의 동력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세계체제적 수준에서 가해지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은 김대중 정부로 하여금 구 개발독재체제(단순화하여 관치주의라고 해보자)를 시장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혁해가도록 강제하고 있고, 민중적 입장에서 보면, 구 관치주의를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개혁해가도록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김대중 정부가 신질서의 성격이라는 점에서는 이른바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경도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적 공간에서의 주체적 대응에 따라 그 질적 성격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역류하기 위하여 시민적·민중적 행동을 조직화하는 것은 현시기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라고 하겠다.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1.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
1999년 11월 WTO각료회의가 열리던 시애틀에서는 반세계화 시위로 인하여 개막식이 취소되었다. 2000년 1월 세계경제포험(WEF)가 열린 스위스 다보스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시위대들의 회의장 진입시도로 경찰과 충돌하였다. 2000년 4월 IMF·세계은행의 춘계 연례회의에서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집결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뤘고, 시위대 600여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며칠전 9월 26일 IMF와 세계은행 연차총회가 열리는 체코 프라하에서는 전세계에서 집결한 1만여명의 시위대로 인하여 하루 앞당겨 총회가 폐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에서의 한결같은 구호는 무분별한 세계화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그를 주도하는 IMF나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개혁요구 등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새로운 세기 지구촌 민중들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neo-liberal globalization)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하는 과제 앞에 서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문민정부에서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부상하기 시작한 '세계화'(globalization)는 현 시기 세계체제의 변화를 파악한 개념어이다. 세계화(혹은 범지구화)라는 것은 개별국가 및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활동들 간의 초국가적 통합이 증대됨으로써, 국가와 국가 간의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의 정도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그 결과 개별국가 혹은 개별국가 내의 개인의 삶이 초국가적 차원의 질서에 의해 더욱 크게 영향을 받는 상황, 그런 기초 위에서 초국가적인 지구촌 질서가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하여 가는 과정이다. 기든스의 표현대로 개별 국가 및 개별사회의 삶이 국제사회의 점증하는 상호의존성에 의해 더욱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는 전세계적 질서의 새로운 변화는 지구촌 사회의 상호의존이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지구화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의 경제활동이 일국적 범위를 넘어서서 세계적·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현 시기 범지구적 자본운동에서 주도적인 것은 과거처럼 상품자본이나 대부자본과 달리 초국적 금융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에 비해 금융자본의 초국적 운동은 더욱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WTO체제의 성립 이후 금융자본의 범지구적 운동에 대한 장애는 낮아지고 있으며,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하여 범지구적 자본운동의 기술적 장애 역시 낮아지고 있다. 정보통신혁명, 인터넷혁명 등으로 인한 '시공간적 압축현상'(time-space compression)은 '지리적 거리가 곧 사회적 거리일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공간조정기술(space-adjusting technology)에 의한 범지구적 네트워크화는 자본, 기술, 인종, 이데올로기, 문화 등 다양한 차원의 지도를 바꾸어놓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가 초기부터 세계자본주의였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16세기 이후 근대자본주의의 세계성(globality)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연장에 있는 것이기는 하나, 분명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 "지구화라는 개념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존재하지마는, 이러한 변화는 이전보다 통합성이 훨씬 증대된 '지구촌사회'의 초보적 형성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EU, NAFTA 등 지역주의적 블럭의 불완전성에서도 보듯이 많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개별사회의 민족적·문화적 경계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개별국가, 개별국가 내의 기업들의 활동, 개별사회 내의 대중들의 삶이 이제 개별영토를 넘는(cross-border) 요인들에 의해 보다 폭넓게 규정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현실로서 인정케하고 있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를 보자.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19세기 서구 근대사회의 정치경제적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총괄이었던 자유주의가 범지구화되는 조건 속에서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근대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적 자유주의 등을 포함하여 복합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현시기 신자유주의는 시장자유주의, 시장자율주의, 시장에 대한 '경제외적' 개입들의 극복이라는 경제적 차원을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18-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절대주의국가에 대항해서 법의 지배를 통한 인권 및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시장경제의 확립을 주창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자들은 현대의 비대한 관료국가와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있는 국경에서의 보호조치들을 비판하고, 국가개입의 축소와 대외개방을 통하여 국내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시장을 복원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알파와 오메가는 시장이다. 봉건적 경제질서에 맞서 근대 자유주의는 시장자율적인 질서가 '공공선'이 달성되는 기제로 보았다. 시장에 대해서 부과되었던 각종 정치적·경제외적 요소들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 시장이 만병통치약이 되고 자유시장논리에 의해 공공선이 달성된다고 믿었던 구자유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논리로 회생하고 있다.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자유주의는 시장자율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세계를 재(再)지배하려 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경제질서가 '국지적 시장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근대자본주의질서가 '국민경제'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바로 세계적으로 통합된 초국가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촌 사회운동에게 있어 쟁점은 바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일체화된 형태로, 즉 세계화가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상호일체화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고, 여기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이 바로 현시기 시민행동 및 민중행동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문제는 세계화가 아래로터의 진보적 세계화가 아니라, 위로부터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화로서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배적인 것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울한' 현상의 가장 주된 요인은 현재의 세계화가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를 배경으로 하여, 그것을 주된 추동력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범지구화는 국제적인 자본축적체제의 구축, 시장의 범지구적 통합, 정보소통 기술의 발전에 기초하는 범지구적 소통의 발전 등이 상호결합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제 범지구적 운동을 하는 자본은 개별국민경제를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통합하고자 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합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정치적·제도적 장벽들을 철폐하려 하고 있다. 그 결과 이데올로기로서 '시장만능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국가실패'(state failure)에 대한 만병통치약(the market as a panacea)으로서 시장이 다시 부각되며, 탈규제화(deregulation), 민영화(privatization), 작은 정부(downsizing of the government), 개인책임에 대한 국가책임, '복지로부터 노동으로'(off welfare to work), 노동시장 및 기업구조, 생산의 유연화(flexibilization) 등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부각된다.
2. 자본운동의 '탈영토화'와 전후 '계급타협질서'의 해체
사회운동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자본지배의 존재형태가 일국적 차원을 넘는 방향으로 재조직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저항이 재조직화되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자본간의 국제적 경쟁의 격화는 과거의 복지국가와는 다른, 친(親)시장적·친성장적 국가를 요구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창출을 도왔고 그로 인해 국민국가는 엄청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국가적 형태의 정치권력은 일정 측면에서 자본운동에 제약이 되었고, 국민국가와 결합된 이데올로기는 자본운동을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자본운동의 탈국민국가화 혹은 탈영토화가 진행됨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친자본적 재편이 진행된다. 자본 간 경쟁의 격화에 따라, 초국가적 경쟁에 노출된 자본을 보강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그 결과 '국가실패'가 부각되면서, 서구의 국가는 과거의 복지국가로부터 최소주의적인(minimalist) 신자유주의적 국가로의 이행을 요구받게 된다. 국가의 역할은 이제 재분배적 기능 보다는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신성장노선'으로 경도되게 된다. 이제 국내시장에 대한 통제가 국민주권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신념은 깨진다. 과거에는 국가가 기업과 국민 요구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였으나, 이제는 기업의 이해가 지배적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와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재구조화의 총괄적인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바로 글로벌 신자유주의(global neo-liberalism)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운동의 범지구화 및 자본 간의 국제적 경쟁의 격화를 배경으로 하는 국가의 변화는, 일국적 틀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였던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계급타협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과 파시즘 하에서의 사회적·계급적 투쟁을 통해 '획득'된 전후의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가,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적인 시장질서의 가혹성에 대항하여 전개되었던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결과로 자유주의적 시장질서에 대한 공적·사회적 규제장치가 제도화된 일종의 '계급타협'질서였다. 그런데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로 인해 일국적인 계급적 타협의 틀이 무력화되면서 시장에 대한 공적 규제들은 도전을 받고 시장 중심적인 체제로의 이행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응체제가 구축되지 않은 데에 있다. 즉 '규제되지 않은 세계화'의 결과로 '제어되지 않은' 초국적인 '자본지배'가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배의 재조직화에 대응하는 저항의 재조직화의 중요한 내용 중에는 바로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공적인 국제적 규제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핵심을 이루게 된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의 핵심적인 현상은 바로 이처럼 초국적 금융 자본의 광폭적 흐름이다. 국민국가적 경계를 넘어서 전지구를 상대로 운동하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규제 장치가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국제적 차원에서 더욱 심대한 문제로 표출되게 만든다. 특별히 선진국의 과잉자본은 과거처럼 생산 영역에 투자되기보다는 적나라한 돈벌이 자본주의로 전세계를 운동하게 되며,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이' '광폭하게'(violently) 운동하게 된다. 이러한 광폭성은 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투기성을 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발현시키게 한다. '카지노 자본주의' 혹은 '람보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바로 그러한 파괴적 측면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과거 일국적 체제를 전제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달러라는 기축 통화를 통해서 세계 금융 질서를 규율하였다면, 지금은 국민 국가적 경계를 허물면서도 아직 단일한 전지구적 규율기제가 형성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세계경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조지 소로스 조차도 투기적 금융자본의 규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잉자본의 세계적 운동에 아무런 규제 장치도 없는 상태에서, 헤지 펀드와 같은 국제적인 투기성 단기 자본이 파생 금융이라는 일종의 자양분과 시장 개방이라는 일종의 영토 확장을 통해서 전세계를 금융 태풍권으로 몰아넣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민국가적 경계 내에서 사회적·계급적 투쟁을 통해서 확립된 사회적 규제메카니즘을 붕괴키면서, 과거 '분절화된' 영역들을 단일한 범지구적 자유시장으로 통합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제3세계의 약소국가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폭한 흐름에 의해 방어막 없이 노출되게 된다. 세계경제체제의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는 나라들에서 이러한 자본운동의 광폭성은 내적인 문제들과 결합될 때,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의 외환위기의 근저에도 바로 이러한 규제되지 않은 세계화, 규제되지 않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운동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제 금융 자본의 흐름에 대한 어떤 규제 장치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지배의 재조직화'에 대하여 어떻게 저항의 재조직화를 달성할 것인가하는 과제이다.
3.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유경쟁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가 아니라, 그에 대한 공적 규제의 역사였다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적 시장질서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자유경쟁적 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로 이해한다. 그러나 민중적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시장의 가혹성과 자본의 비인간적인 무차별적인 수탈에 대한 공적 규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자본 측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을 만들기 위한 역사였겠지만, 노동 측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무한 이윤추구를 유일목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공적으로 규제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세기 자본주의에서는 무한착취의 경향을 갖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통제장치가 없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및 세계대공황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규제장치 혹은 새로운 재생산양식을 갖는 '수정자본주의'로 변화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규제장치를 갖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양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은 노동, 민중, 시민사회의 힘이 강화된 조건 속에서 나타난, 그리하여 적나라한 자본운동에 일정한 공익적 규제장치가 제도화된 계급타협적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후 '사회적' 국가는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된 역량 발전을 배경으로 한, 일국 내의 계급역관계의 '균형' 속에서 성립한 체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포디즘(Fordism)적 체제로 나타났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노자 간의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계급타협체제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붕괴라는 새로운 조건 도래 및 범지구적 자본운동을 제약하였던 체제적 장벽의 붕괴,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해 범지구적 자본운동을 가능케하는 기술적 조건의 도래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일국적 경계를 넘는 범지구적 자본운동이 가능한 기술적·체제적 조건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자본주의가 실제 역량이나 작동방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포부의 면에서는 줄곧 전지구적이었다"이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운동은 영토적 한계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제3세계가 '자본의 바깥'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자본운동의 공간적 영역은 제약되고 있었다. 여기서 자본운동의 탈국민국가화가 진전되는 것이다. 바로 이로 인해 이전의 사회적 자유주의 혹은 '연계적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는 도전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실물자본-노동의 동맹이 실물자본과 이로부터 분리된 국제금융자본의 반노동동맹으로 이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구(舊)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한 저항이 강화되면서 여러 규제장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또한 이러한 규제장치들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진영간 대립, 자본운동의 일국적인 한계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자본은 바로 그러한 규제장치를 실효성있게 하는 조건들 자체를 뛰어넘어 범지구적으로 자유로운 자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결 속에서 자본운동에 대한 범지구적 규제장치를 확보하여야 하는 것이 지구촌 사회운동의 '현안'이 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자본운동에 대해 공익적 '족쇄'를 채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자본운동의 병폐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운동을 통해 투쟁을 통해 달성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현 시기 시민사회운동의 최소공약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응이다.
4.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는 범지구적 민주주의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것을 자유시장의 역사가 아니라, 그에 대한 공적 규제를 위한 싸움의 역사로 규정할 때,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두가지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다. 첫째는 범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공적 규제를 강화할 것인가하는 점이며, 둘째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전개되는 국민국가--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의 신자유주의화를 통제하면서 민중적·시민적 복지를 방어·강화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그럼 먼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여 범지구적 수준에서 어떻게 시민적 행동이 조직화되어야 하는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1)범지구적인 민주적 규제의 문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배는 광폭한 초국적 금융자본과 공익적 규제장치 없는 국제경제질서로 현상화하고 있다. 이것은 규제되지 않는 초국적 자본운동에 대한 '정치'적 규제의 문제이고 그런 점에서 글로벌한 민주적 규칙, 더욱 포괄적으로 '범지구적 민주주의'(global democracy)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20세기 자본운동에 대한 노동자와 민중의 조직화된 투쟁은 비록 제한된 것이지만 '사회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차원에까지 도달하였음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을 무화(無化)시키면서 진행되고 있는 자본운동의 세계화에 대응하여, 세계화된 민주적 통제는 부재한 상태로 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규칙(rule) 없는 세계화'에서 어떻게 민주적 규제규칙이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 with democratic regulatory rule)로 갈 것인가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저항은 바로 세계화된 민주적 규칙을 만드는 과정이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하는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는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영토적 기반을 침식하고 주권적 자율성을 제약하게 된다. 새로운 범지구적 민주주의의 룰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적 지형에서 확보된 민주주의의 '사회적' 성격은 껍데기로 되어가게 된다. 즉 국내적 계급투쟁과정에서 획득된 일국적인 사회보장기능과 경제관리 기능은 파괴되며 점차 빈껍데기로 되어가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민주주의의 적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과거 권위주의 하에서는 반독재와 반(反)시장주의투쟁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정권 시대로의 이행에 따라 오히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게 되며, 새로운 민간정부(civilian government)들은 정치적 부담없이 '자유롭게' 신성장주의적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 '민주정부' 하에서 점점더 정치와 시장은 분리되고, 국가의 장래가 유권자들의 손을 떠나 세계시장의 동요에 맡겨지게 된다. 민선민간정부가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의 더욱 좋은 정치적 외피(political shell)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지구적인 민주주의의 룰은 특별히 두가지 방향에서 작용하여야 한다. 먼저 현단계 세계경제질서의 '투기성'(speculativeness) 자체에 대한 국제적 규제이다. 현 국제경제의 패권국가인 미국의 자본주의는 이전 보다 더욱 비생산적인 자본주의로 전화되어간다. 미국의 과잉자본은 대거 금융부문으로 진출하고 여기서 금융 자산, 국채, 채권, 주식 등이 중요한 자본운동의 매개영역이 되게 된다. 일종의 자산 운용 형태의 자본주의로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세계자본주의가 과잉자본에 기반한 투기적인 자본주의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Arrighi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미국중심의 현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순환사이클에서 산업적 팽창 보다는 금융적 팽창으로 특징지워지는 성격을 띄고 있다. 생산적 활동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주의의 최소한의 장점 마저도 현 범지구적 자본주의에서는 주변화되고 있다. 정상적인 무역거래 규모 보다는 금융적 거래의 규모가 17배 내지 25배에 이른다는 통계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투기적 국제경제질서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민주주의적 교정과 규제가 요구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로서 존재하는, 과잉생산 혹은 과잉축적과 과소소비 간의 모순은 새롭게 범지구적 금융질서에 편입되는 후진국들에서 더욱 극명하게 표출된다. 과거 유럽에서는 이 문제를 식민지 창출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후 케인즈 주의적 정책에 따라 국내 대량소비 체제를 만들음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일정하게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범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현대자본주의를 혁신하는 작업의 일부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이러한 작업은 범지구적 자본주의에 '사회성'을 각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둘째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적 측면, 즉 범지구화로 인한 국제적 양극화에 대해 민주주의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규제가 없는 세계경제의 결과는 세계적·일국적 빈부격차의 증대, 빈곤의 세계적 확산, 금융산업을 통한 불로소득의 증대, 선진국 초국적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 지배의 확대, 고용의 불완전·불안전성의 증대, 그로 인한 '노동유목민'화 등 국내적·국제적 양극화의 증대이다. 국내적·국제적으로 이른바 '20:80의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증대되고, 국제적으로 '빈곤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poverty)'가 증대된다.
IMF와 기타 국제금융기구들은 개별 국민국가 내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package)를 채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발전도상국의 외채는 이러한 정책요구(policy condionality)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동체가 되고 있는 IMF와 세계은행이 강제하는 정책은 크게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macro-economic stabilization) and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 프로그램으로 대별될 수 있다. 안정화프로그램의 기조는 '긴축정책이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칙은 '자유화'인데, 긴축은 재정지출에서의 사회보장적 및 사회정책적 지출을 축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구조조정은 금융시장, 자본시장 개방을 통하여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수탈'을 결과하여 결국 국내적·국제적으로 양극화를 촉진시키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양극화의 경향으로 결과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문제가 이제 시급하게 지구촌 시민사회에서 쟁점화되어야 한다.
2)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시민행동의 가능성--범지구화 속에서의 저항
국내적 차원에서도 소수의 정치경제적 강자(强者)에 대한 민주주의적 규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하듯이, 범지구적 수준에서도 이러한 규제가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민적·민중적 행동을 통해 이를 쟁취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범지구적 민주주의를 구성하기 위한 시민행동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가를 예시하여 보자.
(1)'자본운동의 범지구화'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의 활성화를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신시장주의는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이자 경제'개혁'의 이데올로기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를 근거로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고 있다. 과거 산업화가 근대화의 논리로 포장되었다면, 신자유주의나 정보화는 새로운 자본운동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된다. 자본운동에 대한 공적 규제장치는 '비효율'로 낙인화되며, '국가실패'라는 화두 속에서 '시장실패'와 시장의 가혹성은 가리워진다. 그런 점에서 시민행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우리가 범지구화의 과정이 '불가피한' 구조적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위로부터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세계화가 되도록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요구되게 된다.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성장만이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 생태적 지속가능성 등이 지구촌 시민사회의 새로운 목표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시민들이 성장과 시장가치를 뛰어넘어 대안적 가치들에 대해 더큰 애착과 감수성(sensitivity)를 갖도록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사회운동에서의 국제주의의 부활: 그동안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내부에서 국제주의적 담론은 주변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자본운동의 범지구화는 국가적으로 '분절화'된 투쟁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점으로 사회운동을 위치시켜가고 있다. "자본은 지구적이고 노동은 지방적이다". 이런 점에서 국제주의의 부활과 국제주의적 연대의 강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범지구화는 한편으로는 그것이 초국적 자본의 지배를 확장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인권, 환경, 평화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범지구적으로 확산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연대의 기초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들은 범지구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문화적·의식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 주도의 현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로부터의 세계화로 규정하고, 인권.환경.평화.지속가능한 발전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활용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구상에 일국내의 사회운동의 의의를 연결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는 시민행동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적극적 측면들을 지구촌 사회의 새로운 공론을 만들기 위한 계기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제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있는 시민사회운동의 공론공간을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국제주의의 부활과 국제주의에 기초한 국제적 연대의 조직화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어가고 있다. 시민사회의 범지구적 연계가 증진되고 있고, 이미 1992년 리우환경회의, 1993년 비엔나 인권회의, 1995년 코펜하겐 사회개발 정상회담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범지구적 NGO연대의 폭을 확장시키고 있다. 99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행동도 포럼 개최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에서부터 가두투쟁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12월 WTO 2차 각료회담을 무산시킨 워싱턴 투쟁이나 IMF 연차총회에서의 전세계 비정부기구(NGO)의 공동투쟁은 지구촌적인 공론과 공동투쟁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행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신국제주의'적 연대가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국제주의적 연대에는 환경단체, 여성단체, 무정부주의자들, 노동단체, 시민단체, 사회주의자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는 집단과 개인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연대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일국적 경계를 넘는(cross-border) 연대성이 형성되어 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 '자본의 도구'로만 활용되는 인터넷이 저항적 공론공간의 기술적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 및 민중조직 간의 국제적 연대의 실질화를 통해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이러한 방향에서의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초국적인 자본운동에 대한 초국적인 공적 규제체계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노동자와 제3세계 민중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틀 내에서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구촌 사회운동의 '국제주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으로 요구받고 있다.
(3)범지구적 규제를 위한 국민국가 압박전략: 필자의 관점에서는 초국적화된 자본운동에 대한 규제는 한편에서는 국민국가 혹은 그 연합에 의해 시행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탈영토화된(de-territorialized)' 자본운동에 대한 범지구적 규제를 국민국가에게 강제하고 그를 통해 국제적인 공적 규제가 제도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범지구적 민주적 장치를 위한 지구촌적 행동의 중요성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장치를 만드는 매개통로는 역시 국민국가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일 수밖에 없다. "세계화는 그것이 국가전략일 뿐만 아니라 시장의 전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U. Beck 같은 경우, 이른바 '세계시민정당'의 출현에 기대어 이러한 범지구적 민주주의 규칙의 실현가능성을 사고하고 있다. 세계화된 자본운동에 대응하는 이러한 초국가적 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별도로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적인 방법으로 국가의 규제가 해체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국민국가에 대한 압박전략을 통해 국내외 시장을 초국가적으로 규제하는 강력한 틀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존재하는 국가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전지구적 정치로 전환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된다.
(4)범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규제에 대한 논의의 국내화: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범지구적 규제에 대한 국내적 논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월가, 재무부,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는 국제금융기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패키지'를 외채국가에 강제함으로써, 지구의 자유시장화를 촉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항하여, 민중적 컨센서스를 만들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논의지형의 특수성 때문에, IMF사태에 대한 책임은 주로 내부적 요인, 특별히 재벌 책임론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실자본주의적 구조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제점이 파국적 상황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외적 구조, 즉 국제경제구조적 구조에 대한 논의가 주변화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광폭적인 초국적 금융자본이 사회적 관점에서 통제되지 않는 한, 세계경제의 약한 고리에서 언제든지 IMF사태가 터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내적 기득권세력과 싸우는 투쟁과 함께, 세계적 관점에서 '국지적' 행동전략을 구사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국제적인 차원의 이슈들을 어떻게 국내화할 것인가, 또한 '먼' 이슈들을 어떻게 '가까운' 이슈들로 만들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적 규제에 대한 방안은 다양할 수 있다. Jubilee2000에 의해 캠페인이 전개되어 1999년 G8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본 극빈국 외채탕감운동, ATTAC과 같은 기구들이 부각시켜 온 바와 같이 국제적 금융거래에서의 토빈세의 도입이나 중앙은행 예탁금제 도입 같은 방식, IMF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거나 IMF를 국제적인 법정으로 끌고 가 개혁을 강제하는 운동, 'Reinventing Bretton Wood'이나 '50Years is Enough'같은 운동에 의해 부각된 전후의 기본질서의 근본적인 개혁운동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내적 문제가 곧 국제적 문제라는 인식의 확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 문제가 곧 국내문제라는 인식이 상호강화될 필요가 있다.
(5)반지구화적인 토착적·지방적 대안의 실험: 신자유주의는 시장주의의 범지구적 확산을 촉진하고 있고, 국내적·국제적으로 인간의 삶이 더욱더 시장질서 속에 편입되도록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국민국가적 삶의 더욱많은 부분은 범지구적 자본운동에 포섭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민중적 저항은 비록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범지구적인 신자유주의에 반대되는, 혹은 그것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다양한 토착적·지방적 실험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역설은 그것이 범지구적 수준에서 시장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만, 동시에 '재상품화'의 형태로 대중의 삶을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가혹한 시장으로 더욱 깊숙이 편입시켜감으로써, 그에 저항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촉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는 범지구화되어 가는 시장질서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공동체적 실험, 지역경제공동체적 실험, 탈시장적인 소규모 생활공동체, 소비협동조합, 직거래네트워크, 녹색화폐, 복지네트워크, 지역화폐, 생활공동체, 생태공동체 등과 같은 탈(脫)시장적·비(非)시장적 소규모 대안생활체계 같은 형태들을 들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적 흐름의 지배화 속에서, 이러한 '비(非)시장적' 모델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비록 이것이 체제적 수준에서의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더라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저항적 실천의 일부로 위치지워질 필요가 있다. 신종 발전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즉자적 거부로서의 토착주의조차도 그것의 존재의의가 적극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5. 반(反)신자유주의적 개입의 중요성
이상에서의 서술은 주로, 범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자체에 대한 공적 규제를 강화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이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남한이라는 구체적 공간 속에서 신자유주의화를 통제하면서 민중적·시민적 복지를 방어·강화할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실천적 과제로 된다.
앞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서술하였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전개되는 국민국가 수준에서 전개되는 개혁 및 정책선택은 기계적으로 그러한 세계적인 경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국가적 정치공간, 구체적으로 중앙정치공간 및 지역정치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시민적·민중적 대응에 따라 다양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체제적 수준에서의 신자유주의의 국내적 결과는 국내적 요인의 매개에 의해 상이하게 관철된다는 것이다.
비판적 정치분석에서 쉽게 이러한 측면이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사회변동의 과정이란 다양한 정치사회세력들의 투쟁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이고, 계급적·사회적 투쟁에 의한 개입에 의해 그 질적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이다. 한국사회는 구 권위주의체제의 민주적 개혁이 시대적 과제가 되는 민주주의 이행의 과정에 있다. 이러한 개혁의 진행과정에서 개입되는 복합적인 투쟁이 적절히 고려되지 않을 때, 정치경제적 변동과정은 종착점이 정해진 '결정론'적 과정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역설적으로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의 통치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급적·사회적 투쟁의 지위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하는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Poulantzas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계급투쟁은 국가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자율적인 정치적·사회적 공간의 확장에 따라, 이러한 투쟁의 공간, 특별히 특정한 정책적 사안을 둘러싸고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확장되게 된다. 비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한 시장주의적 압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일반민주주의의 정치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이라고 규정되는 이러한 공간은 확장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항하는 범지구적·국민국가적·지역적 투쟁이 이전과 달리 폭넓게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범지구적 흐름은 개별 국민국가 내에서는 다양한 맥락 속에 존재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50년 동안의 '개발독재' 체제로 유지되어왔고 그것이 97년 야당정권으로 교체되어 '민주적 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하는 맥락 속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전제 위에서 볼 때,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개혁에는 '이중적 전선'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첫째의 전선은 구 개발독재 하에서 고착되어 온 구(舊) 질서의 개혁을 둘러싼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선은 이러한 구체제가 어떤 성격의 질서로 전환될 것인가를 둘러싼 것이다. 전자는 구 질서의 민주적 개혁의 범위와 성격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신질서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먼저 구 질서의 개혁을 둘러싼 전선에서, 과거 개발독재 하에서 고착되어 온 '왜곡된 구 시장'질서 및 '왜곡된 국가' 질서의 개혁은 계급적·사회적 투쟁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가질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발독재 하에서 구조화된 대자본과 국가의 유착관계는 재벌로 대표되는 일부 독점대자본의 패권적 지배로 왜곡된 시장구조를 낳았다.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독점주의'적 사회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일부 독점적 세력들이 제도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이다. 많은 신문언론이나 많은 사학재단들이 '전근대적' 맨테리티를 가지고 '가족주의'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독점적 세력에 소유되고 있다. 냉전적 대결 속에서 확장되어온 극우반공통제체제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 국민정부가 50년 만에 야당정권으로서의 개혁의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그것은 시장질서의 극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개발독재 하에서 왜곡된 시장질서 및 국가질서, 사회질서의 과감한 민주적 개혁을 수행하여야 한다. 문제는 시민적·민중적 투쟁 여하에 따라, 바로 이러한 민주적 개혁의 과제를 둘러싸고 편차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서구에서처럼 2차대전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진보에 대항하는 '신'자유주의화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과거의 절대주의적·중상주의적 체제--우리의 경우 개발독재체제이다--에 대항하면서 그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자유주의'화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유주의'화의 압력은 50여년 동안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세기에 존재하였던 구자유주의는 이전의 중상주의적인 전근대적인 경제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김대중정부의 개혁과제는 일종의 '신중상주의적인 개발독재' 하에서 왜곡된 질서에 대한 민주적 개혁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구 체제에 대한 철저한 민주적 개혁의 지향성이 취약하고, 또한 관료화로 인한 개혁주체들의 보수화가 구질서의 철저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후퇴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질서의 성격을 둘러싼 대치선이다. 이것은 핵심적으로는 개혁의 경제적 성격을 둘러싼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부가 한편으로는 세계체제적인 수준에서의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으며(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시장주의'적 개혁을 강제하려는 대자본 등의 압력), 다른 한편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압력(反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경제정책 기조 상에 있어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그에 반대하여 민중적 복지를 관철하려는 흐름 간의 대립이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민영화와 외국자본 '초대'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그 이면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통과되는 현상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양면적 성격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시적 규정성이 국내적인--중앙정부 수준 및 지역 수준에서--계급적·사회적 투쟁에 의하여 일정한 편차를 가지면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김대중 정부의 출현맥락과 서구 신자유주의정부의 출현맥락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즉 탈(脫)복지국가화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와, 반(反)개발독재와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계급본질론적·거시체제론적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정권이 된다. 특별히 재벌-초국적 자본과 김대중정부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분명 김대중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와 민중의 관계 속에서 보면, 국민정부는 과거의 반독재투쟁의 성과 위에 있고, '슈퍼(super)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민중적 투쟁으로 반(反)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요구받고 있고, 자신이 그러한 '슈퍼(super)'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투쟁의 성과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김대중정부가 민중정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동시에 국민정부가 재벌-초국적 자본과 '체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정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르다. 그러나 그것은 김대중정부 하에서 계급적·사회적 투쟁을 통해 쟁취하여야 할 '편차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될 때 그것은 일면적일 수 있다. 예컨대 이회창 정부가 성립하였을 때와 김대중 정부가 성립하였을 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거시적 압력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주체적 투쟁의 개입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공간이 일정하게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거시적 규정성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관철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민중적·시민적 개입, 나아가 계급적·사회적 투쟁이라는 매개변수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목하면서, 이를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반(反)신자유주의적인 투쟁의 긴장 속에서 결정되는 김대중 정부 경제정책 기조의 편차영역은 먼저 대외적으로는 이른바 '마하티르적인 노선'에서부터 탈(脫)민족주의적인 순응노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다. 예컨대 IMF 및 미국의 정책적 가이드라인, 즉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압박에 대하여, 이른바 '마하티르적 길'에서부터 대단히 탈(脫)민족주의적인 순응의 길 간에 다양한 편차가 존재할 수 있다. IMF처방을 '잘못된 투약'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평이 없는 상태에서, 물론 김대중정부의 정책노선은 탈민족주의적인 순응노선에 경도되어왔다. 신자유주의적 압력에 대한 민족주의적 동원화의 '공간'이 존재하고, 아래로부터의 반(反)신자유주의적 동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다 진보적 정책수행의 동력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세계체제적 수준에서 가해지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은 김대중 정부로 하여금 구 개발독재체제(단순화하여 관치주의라고 해보자)를 시장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혁해가도록 강제하고 있고, 민중적 입장에서 보면, 구 관치주의를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개혁해가도록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김대중 정부가 신질서의 성격이라는 점에서는 이른바 '종속적 신자유주의'로 경도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국민국가적 공간에서의 주체적 대응에 따라 그 질적 성격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역류하기 위하여 시민적·민중적 행동을 조직화하는 것은 현시기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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