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변혁을 위한 영성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0-0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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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위한 영성

정현경(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오늘 왜 여기에 함께 모였나?

우리는 생명을 택하기 위하여, 치유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썩어 가고 죽어 가는 기독교회에 대해 개혁가들이 몇 백 년전 변혁의 깃발을 들었던 것처럼,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들도 생명과 해방의 깃발을 함께 찾고 만들어 변혁을 위해 들어야겠다는 바램으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의 핵심을 "변혁을 위한 영성"으로 이름지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변혁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영성은 무엇인가? 이것을 위해 우선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치유해야 할 현 상황의 병들을 진단한 후 과거에 대한 진지한 평가와 비판적 계승 없이 발견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시대 한국여성을 위한 변혁적 영성을 찾기 위해 과거에 우리에게 가르쳐졌고 우리가 따랐던 영성에 대한 개괄적인 평가를 마친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은 과연 무엇인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우리의 상황

(1) 세계상황

지금 세계는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이후 냉전(cold war)이념이 종식되고 차가운 평화(cold peace)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된 조국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전세계적으로 볼 때 이데올로기 분쟁보다는 경제 전쟁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사실인 것같다. 예전에 큰 국가들에 의해 눌려 살아왔던 작은 민족국가들이 독립을 했거나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대한 획일적 사고나 담론보다는 다원주의적 사고나 담론이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 지금은 소위 지구화(Golbalization), 세계화, 다원화 시대라고 한다. 과학기술,통신 정보망의 발전은 세계를 하나의 조그만 마을(Golbal village-지구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 여러나라가(특히 제3세계)문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문화의 전 세계적 확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전 세계의 'CNN 화', 혹은'M. TV화'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지구화 속에서 이제 세계는 거대한 "단일시장"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NAFTA, GATT, WTO 등을 보라) 이 단일 시장의 대두에 의해 북쪽에 있는 부자 나라와 남쪽에 있는 가난한 나라 (남북문제) 사이의 갈등과 균열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를 거대시장화하는 현상, 곧 자본주의의 확대, 소비 생산의 극대화, 극도경쟁, 소외된 노동과 사람, 돈이 하나님이 되는 과정이다. 이 속에서도 사람들의 삶의 질이 좁아지기보다는 폭력의 습관이 확대 전개 될 것이 예상된다. 혹자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확대가 민족국가, 시민사회의 대두를 부추기며 '신자유주의' 정치형태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장담하는데 과연 그렇게 될 지는 의문이다.

과다생산-- 과다소비에 의해 나타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전 지구적 --그러나 점점 가난한 나라들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생태학적 위기이다. 이러한 속도로 나가다가는 50년 안에 지구의 회복이 불가능한 파괴 상태에 빠질 것이라 한다. 이러한 극히 위험한 상태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부장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도 놀랄 것이 못된다. 항상 자연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공부를 통해 알고 있다. 과학, 정보 통신 문화는 '근육문화'에서 창조력의 문화로 인류를 이끌어 갈 것이 예언되었었고 그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높이 올라갈 것이라고 문화학자, 미래학자들이 장담했었으나 우리가 정보, 통신, 과학 세계에서 지금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은 많은 경우 그 세계의 일개미처럼 낮은 위치에서 대부분 일하고 있고 정책결정, 이윤획득은 거의 남성들의 손에 의해 (다른 산업과 비교할 때) 좌지우지되고 있다한다. 그러므로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확대될수록 여성은 주변부로 밀려 나간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전세계적 대중운동(people's movement)상태는 어떠한가? 동구권의 몰락은 세계의 많은 진보운동의 이념적 혼돈을 낳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운동의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일상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비자운동, 생태학적 운동들은 그런대로 활발한 편이나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등은 많이 힘이 빠져 있는 상태이다.

(2) 한국상황

이 지구적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도 예외없이 큰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난 30년간의 한국의 급속도 경제 성장(누구는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데)은 다른 서구나라의 300년의 변화 속도와 버금간다고 한다. 너무 빠른 성장, 변화는 그것에 대한 숨은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난 30년의 병패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화되어 '지존파' 현상을 일으켰고 앞으로도 또 일어날 것이며, 성수대교는 붕괴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호랑이'(Asian Tiger) 혹은 '아시아의 용'(Asian Dragons)의 하나에 속하는 "NICE"(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 in Asia)가 되어 있다. 소위 말해서 아시아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는 돈맛을 본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돈맛은 우리를 더 근사한 인간들로 만들어 냈으며 더욱 깊고 풍요한 인간적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우리에게 제공했는가? 우리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돈독이 오른 욕심쟁이 나라고, 사람으로 변절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에서 온 외국 노동자들의 실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으로 세계적인 흠모를 받아오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도 더 지독하게 외국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안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 기업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일본, 미국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악명 높은 착취기업으로 대두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한국 자본주의 확대 과정에서 봉건, 군사, 폭력 문화가 암암리에 더 판을 치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성폭력, 여성, 아동 학대의 예들은 가부장제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전국토의 사창가화'를 보아도 우리의 삶이, 우리의 노동과 사랑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발 맞추어 우리 삶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소비 문화이다. X세대, 신세대,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나타족이니 하는 모든 말들이 이 현상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의 문화의 리듬보다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의 리듬과 맥도날드, 코카콜라,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맛에 더욱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을 학교에서 가르치면 6.25 이야기나, 삼국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우리는 신세대다. 내 멋대로 한다."는 당돌한 책을 두려움 없이 펴낸다. 그들의 정직성과 개성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가 뒤따른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몇십 년만에 처음 가져보는 문민정부의 대두는 우리의 희망을 부수면서 많은 문제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문민정부의 대두와 동구권의 몰락은 우리의 운동권에도 많은 방황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우리의 적은 누구이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변혁하고 무엇을 어떻게 세워 나가야 할 지 과거처럼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도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운동권이 힘을 잃은 것이 분명히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자체정립, 방향 모색이 요구되고 있다. 민족의 열망인 통일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독일에서 일어난 흡수 통일과 그 폐해를 보며 우리는 과연 어떻게 다른 방법을 취해 갈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선다. 전세계가 거대 시장화되는 자본의 확대 과정에서 우리에게 흡수 통일 아닌 다른 방법이 과연 현실적으로, 힘의 논리로 볼 때 가능할 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3) 기독, 민중, 여성운동

이러한 와중 속에서 지난 20년간 기독, 민중, 여성운동도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소용돌이와 함께 갈등, 성장, 고민해 왔다. 민중 속의 민중인 민중 여성들과 함께 기독교의 복음적 삶을 나누려는 기독 민중 여성운동은 구석 구석 속에서 민중교회, 탁아방, 공부방 운동, 기타 지역운동 등으로 저변을 확대해 왔다. 남자들처럼 지위, 이념, 명성 등 어떤 면에서도 별로 빛도 못 보면서 섬김, 봉사, 헌신 그리고 변혁의 의지로 꿋꿋이 일해 온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 우리나라의 변화는 기독 민중 여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쳐 지금 잠정적인 휴지기에 들어 살고 있는 것 같다.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오는 구체적인 이념의 부재, 자본주의 소비문화 확대, 문민정부 이후 은폐된적, 민중교회의 침체와 고민, 전반적으로 근본주의-자본주의화 되어가는 한국교회, 그동안의 쉬지 않은 분투로 정력 쇠진 등등으로 많이 힘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기독 민중 여성 운동가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 지쳐 있고, 분명한 비젼이 안보여 모두 곧 '미칠년'(곧 미칠 것 같은 여자들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 되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창조력과 근본적인 개혁은 '광기'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루터와 칼빈이 그랬듯이- 전수 되어 왔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의 광기가 곧 창조와 개혁의 거름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체제, 어떤 이념이 들어서던 그것과 별 상관없이 남아 있는 여성문제는 다른 운동권이 침체됨과 상관없이 활발한 여성운동을 전개시키는 계기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년간 가장 활발히 진행된 운동이 여성운동이었고 그것과 더불어 시민운동, 환경운동도 활발히 진행되는 데에는 우리 사회 운동이 21세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방향을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기독여민회 및 한국 기독여성운동은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들의 운동의 방향을 방법, 영성의 내용, 우리가 바라는 변혁의 내용, 방법에 대한 심각한 평가와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계승 발전시키며 무엇을 새로 배워 체화해야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 오늘은 특히 "변혁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까지 가져왔던 전통적인 영성의 실과 허를 보고 새로운 변혁의 영성의 내용과 양육법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전통적 영성


1) 서구 전통 가부장적 기독교 영성

서구, 전통 기독교, 가부장적 영성의 특징을 기독 민중 여성운동에 연대하는 신학자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보자면 그것이 한편으로는 기독 민중 여성을 생존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죽이는 억압의 기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서구 전통 가부장제 기독교의 영성의 좋은 점에 대해서는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커서는 신학교에서, 한국의 남성 목사, 신학자들에 의해 교회에서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것이 여성에게 어떻게 피해를 주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시켜 나가고자 한다. 이 영성의 여성 억압적 특징은 첫째 이원론적이고, 둘째 권위 계급엘리뜨적이며, 셋째 몸/ 여성/ 자연 비하적이라는 것이다. 다음에서 이들의 내용을 하나 하나 자세히 살펴보자.

(1)이원론적 영성

기독교가 그리스-헬라 문화권으로 넘어간 후 나타난 가장 치명적인 현상은 기독교가 그리스-헬라 문화권의 이원론적 세계관, 존재론, 철학에 의해서 기독교의 신학을 형상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철학에 의하며 영혼-물질, 이성-감정, 저 세상-이 세상, 하늘-땅, 남성-여성, 교회-국가 등은 양극적으로 분리, 대치되어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짝짓기에서 앞에 나온 짝이 항상 뒤에 나온 짝보다 우월하고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나온 영성의 특징을 보면 몸을 부정하는 도케티즘적, 금욕적인 특징, 감정과 혼돈을 밟고 이성과 직선적인 논리로 세상을 질서 지우려는 경향, 이 세상을 귀히 여기기보다는 이 세상은 지나갈 것이며 저 세상의 보화를 기다리는 'pie in the sky'적 특징, 또는 땅에 발 붙이고 살고 땅을 사랑하기보다는 이 세상이 모두 파괴되는 종말을 기다리며 땅에서 날아 휴거되려는 욕심, 남성은 존재론적으로 여성의 머리라는 새빨간 거짓말, 교회와 국가는 관련이 없을수록 좋다는 것을 강조하여 기독교를 비역사적으로 들려는 시도(마틴 루터가 토마스 뮌쪄의 농민반란을 극구 반대했던 것 같은 예) 등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적 영성은 서구 교회사에서 또 한국 교회사 속에서도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2) 권위, 계급, 엘리뜨적 영성

서구, 전통 기독교, 가부장적 영성의 또 하나의 부정적 특징은 그것이 또한 권위, 계급, 엘리뜨적이라는 데에 있다. 기독교의 영성, 특히 억눌린자, 병든자, 가난한 자와 함께 했던 예수의 영성과는 거리가 있는데 그것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기독교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권력, 돈, 명성 등과 결탁하는 기독교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존재의 사다리의 일부분에 속해 있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도표에 의하면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존재론적으로 계급 지워져 있다. 이것은 우주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유인에 의한 노예지배,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 부모에 의한 아동지배,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우주 질서로 여겨진다. 이러한 존재 원리가 권력, 명성, 부, 지향적인 제국의 국교인 기독교의 권위 체제와 만날 때 거기서 나오는 영성은 자연히 권위적, 계급적 엘리뜨적이 아닐 수 없다. 세속과 단절된 조용한 중세의 수도원에서 후드를 쓴 수도사가 침묵과 명상 속에서 고상하게 공부를 하는 반면에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브를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 거듭 강조되었고, 여성은 악마가 들어오는 문이라고 주지시켰으며(터틀리안), 여성에게도 영혼이 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대신학 토론을 벌렸으며(어거스틴, 아퀴나스), 성행위를 통해 원죄가 전염된다고 가르쳤다(어거스틴).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적 창조신학이 가르치는 자연에 대한 지배론은 서구문화 속에서 발달된 과학 지상주의, 무한개발, 자연착취의 근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제 3세계 남성 해방신학의 영성

그렇다면 이러한 제 1세계의 관념론적 영성에 반대하여, 부서진 인간들의 '인간화'를 부르짖고 나온 제 3세계 남성들의 해방신학이 전개하는 영성은 어떤 것이었나? 이 영성은 '해방의 영성' 혹은 '정의의 영성'이라고 불리운다. 이 영성은 기독교의 정치성, 역사성, 물질성 등을 강조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던 기독교를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눈을 돌리도록 도전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God's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강조하였고 가난한 자의 해석학적 특권(Hermenutical previlege of the poor) 혹은 가난한 자의 인신론적 특권(Epistemological previlege of the poor)에 대해 주지시켰다. 그들의 신학적 관심은 도대체 인간을 파괴시키는 이 가난과, 많은 종류의 억압(그들을 경제, 정치억압에 집중하였다) 이 도대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영성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민중들이나 그들과 연대하는 기독교인들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들이 가지는 수많은 장점(예를 들면, 역사성, 정치성, 물질성, 변혁성, 정의중심, 민중성)들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 민중,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단점들이 발견된다.

(1) 너무나 강조, 혹은 강요된 십자가적 영성

십자가의 영성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영성이다. 진리를 끝까지 살아 내기 위해선 예수가 보여준 대로 십자가의 길이 당연한 역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보여준 대로 십자가의 길이 당연한 역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희생과 헌신이라는 의미보다는 기쁨과 자기 비젼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보람이 더욱 핵심에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이라는 우주적인 대 잔치에 의해서 보상되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혹은 기독교운동 단체 속에서 배우고 들어온 십자가적 영성은 자기사랑, 자기기쁨, 자기진리에 대한 비젼을 채 배우기도 전에 이웃사랑,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크리스챤', 기쁨과 부활에 의해 재충전되지 않는 역사적 상황이 이러한 극단성을 장려했겠으나 이것에 의해 죄책과 부담감에 짓눌려 제대로 기쁨을 경험 못하고 살게됐던 경우도 허다했던 것 같다.

(2) 순교자의 영성

이러한 십자가의 영성은 곧 순교자적 영성으로 연결된다. "진짜 크리스챤은 죽어야 된다"는 어떻게 보면 죽음 사랑적인 영성이 초대교회의 순교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것 같다. 이 세상의 악과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어 간 본회퍼, 전태일, 오스카 로메로의 죽음은 가히 칭송할 만한 순교자적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르고 체화 시켜야할 것은 그들의 신앙, 정의에 대한 꺾을 수 없는 신념, 이웃사랑이지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이러한 순교가, 죽음이 미화되는 현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분신'을 통해 자신의 정의를 향한 목숨건 투쟁을 표현했는데 과연 이것이 바람직하고 장려되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 한 여성신학자로서 나는 깊은 회의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3) 영웅적 영성

또한 그들의 영성에서 다분히 '영웅적'인 요소들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귀가 닳도록 '소시민적 삶'을 청산하기를 권유, 질책 당해 왔고 내마음에 맞는 직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아닐지라도, 셋방 전셋집이라도 얻어 포근한 보금자리를 꾸미고 싶은 마음은 쁘띠 부르죠아적인 근성으로 규정 당했다. 물론 열악한 우리의 상황이 그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망을 '사치'로 몰아 세울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몰아간 것도 사실이다. 밥먹고, 화장실 가고, 일하고, 사랑하고, 아이 낳는데 집중하는 삶은 혁명전사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히 우리는 우리의 일상성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4) 이상주의적 영성

영웅적 영성은 이상주의자적 영성과 즉각 연결된다. 영웅은 시시한, 조그만,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승리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 거기에는 이념적 순수성 운동적 치열성, 방법적 완전성 등이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념, 이상의 키가, 순수성, 치열성 완벽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 갈수록 우리의 죄책감, 자기비하, 냉소주의(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의 키도 높아 질 수밖에 없다.

(5) 몸, 여성, 감성, 자연에 대한 감수성 부족

위에서 기술한 것 같은 남성적 해방의 영성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성, 몸의 현실, 그것과 밀착되어 있는 여성들의 삶, 우리의 감성의 세계, 역사성이란 이름 속에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는 자연에 대한 관심 등이 중요치 않게 여겨지곤 했다. 별로 티도 안나고, 구질구질하고, 반복되고, 지지고 볶는 생존을 위한 여성들의 삶의 영성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투사의 아내나 어머니에 대한 찬양이 항상 뒤따랐으나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내조를 해서 투사를 만들어 냈나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 그녀들 자신, 그녀들의 삶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어떤 민중신학자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왜 민중신학 책에 여성저자가 한 명도 끼지 않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중에 우리처럼 감옥에 갔다 온 사람 있으면 우리 책에 넣어 주겠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야, 니가 감옥 갔을 때 니 애, 니 어머니, 니 집 다 책임지고 니 옥바라지하면서 똥 닦고 살던 사람이 누구냐? 그건 다 니 아내였다." 누가 빛나는 투사가 되기 위해서 소위 '뒤에서 수고하신 분'들의 삶과 그들의 영성에 대한 깊은 감사가 없을 때 진정한 해방의 영성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3) 아시아, 한국, 기독여성의 영성

이러한 남미식의 해방적 영성에 깊은 문제를 제기하고 아시아적 해방의 영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제3세계 신학자협의(EATWOT)에 속한 아시아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제3차 아시아 신학협의회(ACT Щ)에서 아시아적 해방의 영성에 대해 주제 강연을 한 사무엘 라얀(Samuel Rayan)의 입장이 주시할 만하다. 그는 역사적 정치적 또 정의 중심적인 남미식의 해방신학적 영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두가지의 차원을 더욱 부가시켰다. 그것은 반응성 혹은 책임성(Response-ability)과 개방성(Openess) 이다. 라얀에 의하면 영성이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현실(Reality:정치, 경제, 문화, 자연, 신비, 하나님 다 포함)에 반응 대답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개방성과 함께 우리를 명상과 행동이라는 계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를 참으로 인간답고, 역사에 책임지는 인간으로 성장시켜 간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자연과 전 우주를 끌어 앉는 아시아의 '우주적 영성'을 우리가 다시 체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개괄해 본 것 같은 전통신학, 제3세계신학, 아시아 신학에서 보는 영성의 전이해를 가지고 한국기독여성운동의 영성을 보면 제3세계 남성들의 신학적 특징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되어 강조되는 영성의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지난 몇해동안 일어나고 있는 생명 문화 운동, '살림'운동의 영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유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 십자가와 순교, 헌신, 희생, 봉사, 섬김의영성, 또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자동억압적(auto-opperrisson)으로 나오는 "그건 모두 내 탓이요"하는 여성 특유의 자책과 모든 것은 잘못된 구조 탓으로 돌리는 "그건 너"라는 피상적인 적에 대한 분석 사이의 교묘한 갈등, '남을 위한 인간'이 얼마나 가부장적 문화가 주는 이상적인 여성상과 꼭 들어맞는지 그걸 해 보려다 자기 사랑법은 전혀 배우지 못해 몸과 마음이 지쳐 버리고 상하는 현상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성이기에 역사적인 조건들에 의해 개발시킨 감수성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생명'에 가깝게, 모든 '살림'운동에 가깝게 다가가게 했다. 몇 해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생명 문화 운동, '살림'운동이야 말로 기독민중여성의 시각에서 더욱 그 내용과 방법을 풍부하게 발전시켜야 하는 영성이 형태로 보여진다.


3. 새로운 영성, 변혁의 영성


위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영성이 가지고 있는, 특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한 생명의 리듬들을 깨뜨리고, 개인, 사회, 우주간의 조화와 균형을 파괴하는 데 기여한 사실들을 반성해 보았다. 그렇다면 가장 여성해방적, 생명 중심적, 자연해방적이면서 변혁적인 영성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으리라. 나는 여기서 아시아 여성들이 규정한 영성의 모델과 생태학적 여성주의(Eco-Feminism)영성의 모델을 살펴보면서 한국·여성·해방·영성에 대한 한 제안을 해 보려 한다.


1) 아시아 여성의 영성

아시아의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1987년 싱가포르에 모여서 특별히 여성적이면서도 아시아적인 영성을 탄생시키기 위해 같이 씨름한 결과 다음과 같이 영성을 규정했다.

"영성이란 매일 매일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구체화하는 한 인간의 통전적인 전체이다. 아시아 여성들의 영성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즉 가난과 억압, 고난의 현실에로 그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새로운 사랑의 삶을 향한 도전에 영혼이 응답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Women's spirituality workshop report, Singapore, 1987)

그들은 자신들에게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영성이 개인주의적이고 이 세상과 동떨어진 금욕적 영성이었다고 규정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영성은 통전적이며 활달하고 공동체 지향적이며 적극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러한 영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영성의 특징을 조목별로 길게 나열하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체적이며 전체적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삶의 가장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중요시하고 그 안에서의 관계들을 소중히 하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인간 내면의 변혁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함께 끌어안으려고 하는 노력하는 이원론을 극복한 총체적 영성이다.

(2) 창조적이며 유연하다

이것은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길을 뚫고 나가는 억압된 자들의 생존 능력이다. 창조성과 유연성 없이 중층적인 억압의 현실을 뚫고 갈 수 없다.

(3) 예언자적이며 역사적이다.

여성들은 진리와 정의를 말하며 이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변혁을 일으키는데 가담하는 영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보여진다.

(4) 공동체 지향적이다.

아시아 여성에게서 구원은 공동적인 것이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이 꿈꾸는 공동체에는 여성, 남성, 어린이, 자연 모두가 포함된다.

(5) 생명 지향적이다.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의 순수성보다 생명의 보존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떤 이념의 이름으로도 죽고 죽이는 폭력적 군사적 해결 방법을 여성들의 영성은 반대한다.

(6) 포괄적이며 초교파적이다.

여성들은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계급, 인종, 성 등에 의해 차별 받지 않고 모두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단지 기독교라는 좁은 울타리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영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7) 우주적이며 창조 중심적이다.

이러한 영성은 우주적인 차원을 포함한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겸손함, 그리고 이것은 이 창조세계, 피조세계의 좋음을 축하하는 영성이다.


2) 생태학적 여성주의(Eco-Feminism)의 영성

생태학적 여성주의는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을 동일 선상에서 보는 운동 이념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영성은 우리들이 자연과 함께 나누는 원초적인 통전성-야성(野性)의 회복과 이것에 근거해서 조화, 균형, 다원성을 지향하는 인간관계, 사회관계, 대자연관계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면 '신토불이', '풍수지리설', '지역중심의 풀뿌리 민주주의', '소공동체 경제구조'를 존중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생명의 그물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가능한 한 그 생명의 그물망을 다치지 않는 관계, 제도를 구축하려 노력한다.


3) 한국 기독·민중·여성·해방·영성에 대한 제안

그렇다면 한국 기독·민중·여성·해방· 영성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첫째, 모든 이원론과 위계질서적 분열을 극복하는 통전적인 영성이고 둘째, 우리 내면과 사회적인 구조를 같이 변화시키는 변혁적인 영성이며 셋째는 자연과의 원초적인 리듬과 조화를 다시 회복하는 Eco적, 생태학적 영성이다.

이 영성 속에서는 개인/사회, 영성/변혁, 정신/육체, 인간/생태계, 동양/서양, 이생/저생, 과학/신비, 다양성/일치, 남/여 등이 이분법적으로 위치할 자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총체적으로 다뤄져야 참 삶이 있다는 깊은 깨달음이 요구된다. 그래서 항상 우리 밖의 제도나 억압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그건 너"의 영성이 내 자신 안에 있는 길들여진 식민지성, 노예근성을 바라보는 통찰에 의해서 수정되며 "모든 것이 내 탓이요"라는 여성 특유의 자책주의가 분명한 사회분석, 심리분석에 의해 극복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다 부서지도록 희생하고 죽어가는 십자가와 순교의 영성이, 삶의 온전상을 축하하고 부활을 기뻐하는 영성에 의해 균형 잡힌다. 이 균형 잡히는 과정 속에서 크리스챤의 '이웃사랑'과 '남을 위한 인간' 상이 자기 사랑과 내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것을 즐겨하는 '놀이적 인간상에 의해 보완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영성은 투사적, 영웅적 영성보다는 매일매일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의 내면의 또 우리의 공동체의 온전한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변혁을 모색하고 실천해 나가는 영성일 것이다.

이 실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 깊은 잠, 무기력감 혹은 자기 증오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고, 우리 몸이 다시 살아남을 경험할 것이고, 정의로운 구조, 관계를 위해 노동하는 기쁨을 회복할 것이고, 마침내는 자연과 우주의 원초적인 야성(Wildness)과 연결됨을 체험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영성을 가지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구체적인 변혁의 내용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토론의 장을 위해 이것은 여러분 모두에게 대한 나의 질문으로 남기려 한다.


4. 변혁의 영성 양육법


이러한 Eco적, 통전적, 변혁적 영성을 체화시키려면 그것을 가꾸고 기르는 노력이 요구된다. 나는 그 양육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보려한다.

① 숨쉬고 침묵하고 쉬고 관찰하기
② 우리가 개인적, 사회적, 우주적으로 겪고 있는 병의 이름 알아내기, 혹은 이름짓기
③ 균형, 조화회복, 치유하기
④구체적 '살림'공동체 세우기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우리의 토론을 위한 양식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열어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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