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새로운 국제주의를 향하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0-02 23:21
조회
983
먼슬리리뷰 2000년 7-8월호 편집인의 글
52권 3호 (Volume 52, Number 3)

새로운 국제주의를 향하여
(Toward a New Internationalism)

편집인 일동 (폴 스위지, 해리 매그도프)

역사는 마치 만족하려는 그 어떤 경향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경고하려는 듯 역설들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몇 달 전, 20세기의 마감은 금융세력의 관점이 지배하는 가운데 "종말론(endism)"과 함께 다가왔다 - 계급투쟁의 종말, 혁명의 종말, 제국주의의 종말, 불화의 종말, 심지어는 역사의 종말.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은 우리가 이 모든 것과 작별했다는 것, 그리고 더 부드럽고 친절하고 가상적인 자본주의로 인도할 정보화 시대의 신 경제에 기반한 무한한 진보의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주된 걱정은 Y2K로 알려진 기술적인 고장이었다. 2000년 1월 1일에 컴퓨터들이 세계적인 기능 이상에 맞닥뜨릴 것인가?
따라서 1999년 11월 말 수백 개의 조직들과 4000명 이상의 사람들 - 노동자들, 환경주의자들, 학생들, 종교집단들 등 - 을 포함한 대규모 항의시위가 단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세계무역기구(WTO) 시애틀 회의를 갑작스레 멈추게 만들었을 때 권력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랐다. 전에도 세계무역기구와 그 자매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에 대항한, 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항한 큰 전투적인 항의시위들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놀라왔던 것은 그런 대규모의 전투적인 항의시위가 지구적 자본주의의 본거지인 미국에서 발발했다는 점이었다. 시애틀 항의시위는 - 그리고 더욱이 "요새 미국(fortress America)"이라는 이미지를 전파했던 억압의 힘들의 폭발은 -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마 오래 잊혀졌던 어떤 것, 즉 미국에도 저항과 국제적 연대의 힘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 항의시위들은, 미국은 사회적인 모순 없는 헤게모니 권력이라는 조심스럽게 배양되고 널리 투영된 이미지가 거짓말임을 폭로했다. 갑자기 새 천년과 함께 대안적인 미래를 위한 투쟁 곧 새로운 국제주의에 대한 희망이 밝아왔다. 갑자기 고작 일년 전에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책 "누구의 천년인가 - 그들의 것인가, 우리의 것인가?"에 의해 영웅적으로 제기된 질문이 그의 책으로부터 역사 그 자체의 페이지들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였다.
시애틀 그 자체는 이제 지나간 뉴스이다. 그러나 이어진 몇 달 동안 그것 덕분에 현실화한 희망의 빛들은 죽지 않았다. 그 빛들은 재빨리 성장하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과 나란히 하면서 증폭되기만 했다. 2000년의 처음 몇 달 동안 학생들은 나이키, 리복, 갭, 디즈니와 같은 제3세계의 노동착취공장에 의존하는 기업들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는 대학에 항의하는 등 대학 및 단과대학의 인상적인 시위가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4월의 워싱턴 대중시위는 이러한 자본의 지구적 기관들을 계속 작동하기 위한 특별 조처가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 늘어나는 반역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발전의 하나는 마침내 새로운 경로를 그리려는 시도의 기미를 보이는 노동 운동의 부분적인 부활이다.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 (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가 시애틀의 반-세계무역기구 항의시위에서 중심을 이뤘다는 사실은 이것의 구체적인 징후였다. 새 목소리(New Voices) 지도부가 제기한 조직화에 대한 강조는, 조직 노동운동이 마침내 불새처럼 자신의 잿더미에서 날아오르는 희망과 장기간에 걸친 회원 감소가 반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새롭게 했다. 또한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는 반-북미자유무역협정 투쟁의 결과로 처음 나타난 변화, 곧 좀더 광범한 노동 국제주의의 길을 열면서 냉전시대 노동 협력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에서 발을 뺐다. 1930년대 이래 볼 수 없었던 종류와 규모의 노동-대중 운동 동맹의 출현이 지금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새로운 저항의 시대를 뚜렷이 구별되게 만드는 것은, 그 저항이 (60년대처럼) 국가가 아니라 지구적인 기업들과 국제적인 경제 기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이 계급 권력 및 제 3세계 노동자들과의 국제적인 연대에 관한 근본적인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구화 경제의 위협에 대처함에 있어 노동운동, 환경주의자들 및 다른 좌파 세력들이 협조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투쟁에 참여한 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지구화에 대한 그들의 비판(criticisms)을 지구적 자본주의 비판론(critique) 일반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에 대한 도전이 성공하는 데까지는 걸림돌이 상당하다. 아마도 가장 큰 걸림돌은, 이런 대중 봉기들을 권력의 기본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특정한 제도 개혁을 위한 거의 무의미한 노력으로 만들려는 자본주의 질서가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항의 이런 새로운 물결이 어떤 뚜렷한 형태를 취하는 한, 그 물결의 상당 부분이 - 미국에서는 대부분이 - 지구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업의 지구화에 맞춰지는 현실에 곧바로 부닥치게 된다. "지구화"라는 개념을 둘러싼 혼란 상당 부분은 - 특히 그것을 현재의 경향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으로 고려할 때 - 지구화가 종종 자본주의, 민족-국가, 제국주의, 계급투쟁을 대체한 현실처럼 보여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구화는 커다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문화적으로 정의된 이상형이 된다. '뉴욕타임스' 해외 정세 칼럼니스트면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의 저자인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프리드먼의 사실 왜곡에 대한 비판 글 번역문 참고) 과 같은 제도권 전문가들에게 지구화는 과거의 모든 것을 휩쓸어 내는, 마이크로 칩에 기반하고 금융투자자 및 다국적 기업의 "한 무더기의 전자적인 집단"이 지배하는 새로운 기술-경제 체계이다.
자연스럽게, 지구화의 비판가들은 모든 저항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이러한 협소하고 기술 결정적 관점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지구화라는 실체가 어느 정도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는 밑바탕에 깔린 힘이라는 통념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심지어 좌파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어떤 특정한 가정들을 내재적으로 담고 있다. 1) 현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대한 어떤 대안도 없다. - 혹은 다시 말해서 (지구화와는 구별되는) 자본주의 그 자체는 더 이상 의문시 해야할 것이 못되며 사회주의는 더 이상 하나의 가능성이 못된다. 2) 지구적 경제의 전망은, 다국적 기업, 국제 금융, 그리고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소수의 국제 경제 기구들에 의해 주로 형성된 형태를 띄고 있다. 3) 유일한 실재적인 반대 세력은 "지구적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비정부 조직들의 집합이다. 4) 목표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뒤집고, 기업들과 주요 국제 경제 기구들을 더욱 민주화하며 인권에 더욱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가끔 토마스 프리드먼의 주장의 급진적인 반대의 모습에서, 마이크로 칩의 등장과 그에 이은 지구화와 함께 나타난 변화란 자본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조라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민족-국가만 경제적으로 대체된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민족적인 투쟁도 대부분 효과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작동에 관한 혼동은 오늘날 국제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걸림돌이다. 수십년의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개편 시기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악화시켰고 국제주의의 갱신을 위한 객관적인 기초를 다져 왔다. 노동자들은 2차 대전 이후 그 어떤 때보다도 더 큰 국제적 연대를 건설할 필연성과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화에 관한 생각은, 변한 것이란 미국 공장들이 제 3세계로 이전함에 따라, 제 3세계 경제와 사람들이 미국 및 다른 부유국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고 암시하는 방식으로 흔히 번져갔다. 이는 진정한 국제연대를 촉진하기보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는 형태를 유발하는 경우가 잦았다. 최근 일련의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듯이 현재 미국민 절반 정도가 (반 지구화 정치가 상당한 유권자를 끌어들일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지구화와 세계무역기구에 비판적이라면, 이것의 의미에 유의할 이유가 여러가지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들 상당수는 강한 민족주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그런 태도를 취해온 것인데, 이런 관점은 제국주의 현실을 모호하게 한다. 사실 이런 모호화 현상이 더 심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지구화가 주 관심 영역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워싱턴에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4월 16일, 17일 시위 바로 며칠 전에 중국의 최혜국 대우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워싱턴에서 열기로 한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의 결정은, 많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민족주의, 역-제국주의의 공포, 심지어 외국인 공포증을 악용하는 경향을 상징했다. 확실히 이러한 태도는 (비록 중국 노동자들과의 강한 연대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리와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서 취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데도 강력하게 한 몫 했는데, 왜냐하면 노동운동은 반-국제통화기금과 반-세계은행 시위의 뒤에 강하게 자리잡는 대신에 중국에 최혜국 및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지위를 주기를 거부하는 공화당 우익과 손을 잡고 반-중국 로비에 무게 중심을 두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의 고어에 대한 초기의 지지가 보여주듯이, 미국의 조직 노동은 민주당 곧 산업계의 정당의 한쪽 날개로 여전히 결합해 있다. 총연맹의 전체 구조와 강조점은 여전히 사무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의 하나다. 총연맹은 아직 자신을 정치, 사회 운동으로 전환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객관적인 힘들은 노동운동을 새로운 급진주의를 향해 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확실히 급진적인 현장 노동운동가들은 이런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때보다 진정한 국제주의가 빠르게 노동운동층에서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미국 노동운동의 미래 곧 국내의 계급투쟁과 지구적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더 광범한 국제적 투쟁의 효율성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부의 투쟁 곧 사무적 조합주의와 민주적 조합주의간 및 경제적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간 투쟁이다.

지구화와 위기(Globalization and Crisis)

급진적 투쟁의 재등장 전망은 궁극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더 광범한 변화에 좌우된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작동 법칙을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방식은 전체 체계 차원의 변화와 그 체계의 작동방식의 변화가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을 제거했다고 보는 지배적인 관점에 굴복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우리 행동을 옥죄는 새로운 제약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이어서도 안된다.
자본주의는 과거에도 언제나 지구화하는 체계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지구 구석구석에 침투하는 경향을 띈다. 20세기초 몇십년동안 세계 무역과 자본 흐름이 각각 세계 생산과 저축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규모면에서 오늘날과 비교될 수준이었다. 이런 국제 경제적 연결고리를 깨고 들어온 것은, 제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위기의 시대였다. 국제 무역과 자본 흐름이 각각 세계 생산과 저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규모로 늘어난 것은 최근 몇십년 사이의 일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은, 경제 활동의 지구화와 위기의 지구화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국적 경제 활동의 증가는 이 체계의 운동법칙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지도,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을 극복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이는 이 체계가 지구화하면 할수록 위기의 지구적 파장의 위험이 더 커진다는 것을 밝혀준다.
가장 가까운 시기로는 1997년 7월 이 점이 상당히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 때, 미국의 영향력 있는 두개의 정기 간행물이 경기순환의 종말과, 정보기술 혁명에 뿌리를 둔 거의 무한한 경제 확장 과정의 등장 문제를 제기했다. 두 간행물 가운데 하나는 미국 외교정책을 이끄는 잡지인 '포린 어페어스 (Foreign Affairs, 외교문제)'인데, '경기순환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제시하는 답은 의문부호를 떼어버려야 한다는 것 곧 "생산과 소비의 지구화가 선진 산업국 경제활동의 변덕을 줄였다"는 것이었다. 다른 잡지는 정보혁명과 이른바 "신 경제"의 의기양양한 낙관론의 상징이 되어버린 '와이어드 (Wired)'다. 이 잡지의 광고문구 같은 기사에서 독자들은, 세계경제 성장률의 지속적인 증가를 가져올만한 "네트워크 경제와 지구촌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랑거리가 된 "장기 호황: 미래의 역사"에 대한 광란적인 논의를 접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역사의 수많은 역설의 하나가 개입했다. 1997년 7월2일, 경기순환이 끝났다고 선언한 두 기사가 발행된 바로 그 달의 두번째날 타이가 바트화를 평가절하했다. 이는 꼬리를 물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져 전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뒤흔든 아시아 경제위기의 이른바 "최절정 국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지구화는 새로운 안정적 세계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공황 이후 보지못했던 전세계 규모의 자본주의 위기의 지구화를 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지구화를 세계 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으로 보는 주요 가설 각각에 대해 즉각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마치 갑자기 자본주의의 장막이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나라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이며 제국주의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은, 핵심국가의 자본들이 동남아시아의 "잔류품 대처분"을 이용해 자산 사냥에 나선 속도와 똑같은 속도로 거부됐다. 지구화하는 세계경제에 개별 국가들이 개입할 능력이 없다는 점은, 말레이시아가 자본을 통제하기로 결정하고도 이 조처로 예상되는 재앙을 겪지 않음으로써 의문시됐다. 지구화 압력에 직면한 계급 투쟁의 종말과 노동계의 약화는, 한국 노동자들이 국제통화기금에 맞서 대규모 투쟁을 벌임으로써 부인됐다. 지구 환경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순조로운 지구화 과정이라는 이미지는, 인도네시아의 밀림이 인도네시아 경제 위기의 속도처럼 빠르게 불에 휩싸임으로써 상징적으로 약화됐다. 지구화가 한줌의 기업, 국제 기구, 프리드먼이 말하는 "한 무더기의 전자적 집단"이 통제하는 과정이라는 환상은, 경제적 참상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러시아, 브라질 등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드러난 축적 위기의 체계적 성향과 광범한 금융투기에 의해 격퇴됐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시장의 자율규제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는, 공통의 목표를 위한 도구적 합리성의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이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아시아에 집중됐던 세계 경제 위기는, 경제잡지 '포춘'이 (2000년 5월15일치) 지적했듯이 "최근 빈곤에서 벗어난 이들이 대부분인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기 전이 아니라 몰아넣은 뒤에야" 완화됐다. 2년전 아시아 위기 때문에 명백하게 흔들렸던 세계 권력구조는 이제 어디로 보나 대부분 잊혀졌다. 하지만, 주류 평론가 폴 크루그먼 조차 자신의 "불황 경제학의 복귀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에서 불안정을 유발하는 근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단지 3막짜리 연극의 제 3막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기시킨다. 제 1막은 1995년 멕시코 위기이고 2막은 1997년과 1998년의 아시아 위기이며 3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 3막은 이미 시작된 것 같다. 왜냐하면 진짜 3막은 (분명히 다시 도래할)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반란의 부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위기의 폭발에 따른 지구화의 손상된 이미지와 이 이미지가 전세계 사람들 곧 한국 노동자에 이어 멕시코 학생들, 다시 미국의 반-세계무역기구 시위대에게 촉발시킨 전투적인 대응은,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전능하지도 그렇다고 사회관계가 완전히 정지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줬다. 이는 뉴 레프트 리뷰 2000년 1-2월호에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앤더슨의 글에 대한 카칼리츠키의 비판 "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번역문과 그의 비판에 대한 타리크 알리의 반박 번역문 참고) 이 피력한 견해와는 대조적일 수 있다. 그는 "현재 그것의 [자본의] 형평상태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세력은 과학적 진보 자체 곧 생산력뿐인 것 같다. 이는 (생산력을 뜻함 : 신기섭) 사회운동이 아직 살아있던 때에 생산관계가 가장 우선한다고 확신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인기가 없던 것이다."고 말한다. 앤더슨에게는, 더 이상 혁명적 사회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생산력이 최고의 자리에서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패배주의적인 태도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해 증가하고 있는 투쟁의 국제주의적 양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나타나고 있으며 점점 더 체제 자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세계 수백만명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사화 관계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렸거나, 절망에 빠져 (일국적 투쟁은 불가능하고) 오직 지구적 투쟁만 가능하다고 생각을 바꿨거나, "지구적 시민 사회 (global civil society)" 처럼 세계주의적 용어로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좌파들은, 지구화가 모든 변화 가능성을 없앴다고 설교하는 이들의 변증법적 쌍둥이일 뿐이다. 진정 사라진 것은, 냉전시대에 칭송되던 중간층 중심의 혼합 경제 부류다. 계급타협의 결과로 보통 인식되는 사민주의적, 케인즈적 전략은 오늘날의 지구적 신자유주의 아래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반대로 이 모든 것은, 운동을 향해 갈 유일한 길인 각국의 현실과 투쟁에 뿌리를 둔 훨씬 더 급진적이고 보편적이며 국제주의적인 전략의 필요성만을 제기한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조직적, 전략적 쟁점들은 우리가 이번 특집호에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주제들과 직접 관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특집호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피터 마커스 (Peter Marcuse)는 용어의 가장 흔히 통용되는 개념과 연관된 이념적 묶음을 지적하면서 "지구화"라는 용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빌 탭 (Bill Tabb)은 "지구화에 반대하는 요즘 운동의 본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마틴 하트랜스버그 (Martin Hart-Landsberg)와 패트릭 본드 (Patrick Bond)는 이 운동이 채택할 새로운 전략이 무엇일지 모색한다. 데이비드 베이컨 (David Bacon)과 칼릴 하산 (Khalil Hassan), 마이클 예이츠 (Michael Yates)는 "노동운동이 과거 냉전시대의 침체를 깨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합한 더욱 급진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투쟁 양상을 만들어낼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엘리자베스 마르티네스 (Elizabeth Martinez)와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는 인종 분리와 제국주의가 만들어놓은 분열을 넘을 방법을 논하고, 존 포스터 (John Foster)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국제주의의 역사적 유산은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큰 위험은 이런 조직적, 전략적 쟁점을 잡아낼 수 없다고,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또는 대안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일어나라는 역사의 역설적인 외침을 듣고 있다. 반-세계무역기구 항의시위 이후, 또 4월의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대한 항의 시위 이후 주류언론은 늘어나고 있는 풀뿌리 운동 노력을 조롱하느라 애쓰고 있다. 이 운동이 버릇없는 젊은이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희화하면서 말이다. 이런 태도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뉴스위크', '타임'과 다양한 공중파 방송에서 볼 수 있다. 지구화반대 운동은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사태의 향후 추이와도 무관한 기껏해야 단지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길가의 걸림돌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훨씬 더 빈틈없는 '포춘'은 (2000년 5월15일치에서) 이런 항의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폭넓어서, 체제의 일부 구성원들조차 이 행진을 앞질러 가거나 행진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이들의 의견 일부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잡지는 "이 운동은 다리가 있는 것 같다. 세계의 금융 및 업계 엘리트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한다. '포춘'에겐, 자본주의 지구화 자체가 아니라면 지구화의 방향이라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잡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새 기술은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되든지 상관없이 앞으로도 세계를 더 좁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경제 통합은 여전히 상당 부분 이와 무관한 정치적 결정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규칙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 (Dani Rodrik)은 말한다. 그는 또 '지구화는 다른 별에서 갑자기 우리 무릎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포춘'이 이 강력해지는 운동에 맞닥뜨린 자본의 두려움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면, 우리의 임무는 더 많은 사람들 곧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미래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희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희망 이상의 것이 요구되고 있다. 좌파에게는, 많은 것이 분석과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번 먼슬리리뷰 특집호를 다름 아닌 이 목표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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