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경제위기와 시민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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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작성일
2000-10-02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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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시민사회의 대응

강 수 돌 (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교수)

1. 경제 위기

97년 말에 한국 사회가 'IMF 관리 체제'로 접어든 이후로 '경제 위기'가 과연 어떻게 왔으며, 어떻게 극복해야 좋을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하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논하기 전에 경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현재의 경제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 위기를 외환 위기나 무역 적자 등과 같이 '수익성 위기'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경제'란 결국 '먹고 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위기의 뿌리를 제대로 다스려, 다시금 경제 위기를 극복한다는 이름 아래 오히려 삶의 위기를 심화, 확대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서 도대체 무엇이 현재의 경제 위기, 삶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내적, 외적 요인을 포괄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해보자.



2. 한국 경제와 'IMF 시대'

경제 위기의 내부 요인

지금까지의 한국 경제 발전 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첫째는 봉건 사회 말기에 태동되던 초기 자본주의적 싹들이 제국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싹으로 '접붙이기'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봉건 사회 말기에 동학 농민 전쟁에서와 같이 '아래로부터' 터져 나온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요구가 지배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압살되고, 대신에 반외세를 지향하는 민족주의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 전평과 같은 민중 세력이 비자본주의적 독자 발전의 길을 모색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등 지배자 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억압되었다는 사실이다.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빨치산 전쟁과 백만 이상의 희생자를 낸 한국 전쟁은 그러한 일상적 억압 과정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표현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국 전쟁 이후에 대한민국에는 드디어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축적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 조건이 구축되었다. 즉 지배자들이 원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 세력이 거의 척결된 상태에서 매우 자유로이 '위로부터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세계의 자본들은 원조와 차관, 직접투자와 기술 합작 등의 형태로 들어와 축적 운동을 하게 된다.
셋째,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 반공이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체계가 수립되고 이것은 세계시장 지향적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왕성한 노동의욕과 적절한 노동능력)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값싸게 생산하는 '사회적 공장'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끊임없이 아래로부터 새롭게 솟구치는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저항운동을 강압적으로 배제시켜나가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
넷째, 이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막강한 관료 엘리트, 군경, 중앙집권적 개발계획 등)는 인적 자원에 대한 교육과 훈련뿐만 아니라 금융 기관을 장악하고 해외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경공업으로부터 중화학공업, 첨단공업에 이르기까지 경제개발계획을 '신축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국의 지배체제는 '신축성을 통한 안정성'을 확보하여 최근까지의 괄목할만한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다섯째, 그러나 최근 들어 국가의 강력함은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따라서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축적 위기 국면을 신속, 유연하게 무마할 수 있는 역량(예컨대 긴급 자금융자 및 관치금융을 통한 대형 연쇄 부도 방지, 공권력 투입을 통한 노동운동의 사전 봉쇄 등)이 거의 무력화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투자한 세계 자본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높은 이윤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감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고, 마침내 1997년 말, '외환 위기'가 터지고 'IMF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세계 자본과의 연관성

'국가 부도'니, '제2의 국치'니 하는 말들로 우리를 괴롭혔던, 그러나 이제는 정리 해고나 대량 실업, 가정 파탄과 인간성 파괴라는 극한 상황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IMF 시대'는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나? 우리가 보건대, 'IMF 시대'란 축적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와 세계 자본의 내적 필요가 '외환 위기'를 매개로 하여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런 종합적 맥락에서 보아야지만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 합리화 등을 주요 기둥으로 하는 IMF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자본의 내적 필요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앞서 살폈듯이 한국 자본은 상대적으로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국가를 등에 업고 매우 효율적으로 몸을 불려왔다("재벌-국가 복합체"). 그것이 관치금융이고 정경유착이며, 문어발 경영이나 공룡 재벌 시대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국가의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강해지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녔다. 따라서 자본 입장에서 보면 '위기'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축적의 조건들을 과감하게 정비해나가는 '기회'가 필요했다. 흔히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와 함께, 고비용-저효율의 구조를 과감히 뜯어고치자라는 둥, 아니면 비효율적인 기업의 인수 및 합병(M&A)이나 과잉 노동력에 대한 군살빼기식 정리 해고가 별다른 규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한국 자본의 필요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 자본의 필요라는 측면을 보자.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과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이 현재 세계 자본의 움직임 뒤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한편으로 생산적 자본의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결과 다른 편으로 실물자본과 화폐자본의 분리를 가속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란 한편으로 생산적 실물자본의 탈국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요, 다른 편으로는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분리된 금융자본이 천문학적 차익을 노리면서 투기자본화, 카지노자본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과 한국의 경제 위기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와 관련,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세계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여왔다.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과 같은 나라가 더 이상 보호주의적 장벽의 공고화나 국가 및 노조의 자본 운동에 대한 '불필요한' 개입 같은 것을 하지 않기를 바래왔다. 게다가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깨뜨린다는 명분 아래 공기업 등의 민영화 및 이를 통한 자유로운 투자 유치를 하기를 바랬다. 또 재벌 기업들도 정경유착이나 내부거래 등으로 밀실 경영을 하기보다는, 그리하여 세계 자본에게는 언제나 '블랙박스'로 남아있기 보다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기를 바래왔다. 그래야만 세계자본이 자유롭게 더 많은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 자본의 개방화 압력과 탈규제화 압력 등이, 역설적이게도 그간 세계 자본과 권위적 국가의 힘으로 급성장한 한국 자본에게는 치명타로 작용, 마침내 경제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둘째, 대개 초국적 기업이나 세계금융자본으로 표현되는 세계 자본은 지구 전체를 무대로 운동하면서 자기 몸을 불려나가는데, 만일 한국에서 1997년 말 '지불불능'(모라토리엄) 상태가 실제 현실이 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멸망'한다면 세계 자본으로서는 더 이상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국이야말로 세계적 모델'이라면서 다른 후진국들에게 열심히 모방(벤치마킹)하라고 선전할 대의명분을 잃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 이상 한국에서 단물을 빨아먹을 수 없게 되므로 실리적으로도 엄청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한국 사태의 불똥이 일본이나 미국에까지 튈 우려도 매우 컸다. 미국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도 98년 5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수출이 이미 둔화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 고백한 바 있다. 또 당시 미국의 자본가 세계에서는 국내 금리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금리인상이 이뤄질 경우, 아시아로부터 자본이 대거 이탈, 미국으로 쏠려 결국 아시아 위기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고, 그러면 미국(자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자본)에도 매우 해롭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을 하기에 이들은 보기 드문 규모로 축적 위기의 한국에게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바로 그 조건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을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은 현재 한국의 경제 위기('IMF 사태')가 한국 자본의 축적 위기일 뿐만 아니라 '축적 위기를 관리할 능력의 위기'이기도 함을 동시에 일러준다.


3.'탈 IMF 시대'의 한국경제

1997년 말부터 우리 사회는 온통 'IMF 신드롬'에 휩싸였다. 한편에서는 장롱 속의 달러 모으기, 금 모으기, 외화 벌기 캠페인이 줄을 이었고, 다른 편에서는 대량의 실업자 행렬과 고용 불안이 온 사회를 어둡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유대나 결속이 갈수록 깨어지고 그 결과 사회적 분열이 계속되면 결론은 뻔하다. 사회 범죄의 증가와 이기주의, 배척주의(이른바 "왕따" 현상도 이러한 배척주의의 일종이다)의 확산이다.
많은 정치가들도 이러한 문제를 미리 내다보고 우리 사회를 올바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하고자 하나,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문제의 뿌리를 잘못 짚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지배적인 견해는 이렇다. 현재의 구제금융 사태, 즉 'IMF 위기'는 한국 경제의 국제경쟁력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지 못했기에 초래된 것이므로 재벌이나 대기업의 합리적 재편(소유와 경영의 분리, 문어발 확장의 억제, 부실 기업 정리, 상호지급보증 중지, 회장 비서실 폐지 등)과 더불어 금융 개혁이나 노동시장 유연화 등, 경제는 물론 정치 전반에 걸쳐 '합리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면 위기는 어렵지 않게 극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견해는 많이 다르다.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그런 식으로 당장에 급한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을지언정 그 불을 끄는 도중에 '허리를 다칠' 소산이 크다. 여기서 경제의 '허리'란 수많은 노동 대중(생산직, 사무직, 영업직, 기술직, 관리직 등 모두 포함)이다. 노동강도 강화, 산재 증대, 고용불안과 실업자 증대 등을 통해 이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고달파진다면 경제의 '허리에 디스크'가 걸리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발등의 불'만 꺼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둘째, 그런 식의 해결 방식은 지금까지의 한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의 발전 과정 뒤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원리'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은 채, 단지 기존의 원리에 새로운 '적응' 과정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경제 발전(성장) 방식은 한편으로 경쟁과 분열, 다른 편으로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에서는 한번이나 몇번 승리하고 번창하더라도 다음에 언젠가는 실패와 좌절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또 우리편이 승리하면 다른 편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가슴 아픈 과정인 것이다. 나아가 이 피비린내 나는 경쟁(경제 전쟁) 과정에서는 우리 모두의 건강과 인격, 공동체와 생태계가 갈수록 심하게 파괴된다. 따라서 '근본 원리'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단기적으로 밝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욱 암울해진다.
요컨대 IMF '극복' 뒤의(이미 '극복'이 된 것이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긴 하나, 몇몇 수치나 지표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극복된다고 '가정'하면) 한국은 두 가지 중 하나의 모습을 가질 것이다. 첫째의 모습은 한국 경제가 지배적인 이해방식대로 '합리적으로' 재편되어 국제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실질 임금은 경향적으로 떨어지고 노동시장은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20%의 안정된 사람들과 80%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로 분열되는 '20:80의 사회' 경향성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20%의 안정된 사람들조차 성과주의나 능력주의라는 새로운 '합리적' 인사원칙(예컨대, 연봉제) 아래 종속될 것이므로 조금만 긴장을 늦추어도 80%의 불우한 층에 편입될 것이다. 예컨대 인구 1억 명의 멕시코는 1994년 북미자유협정의 출범과 더불어 OECD에도 가입하였는데, 그 결과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별다른 장애물 없이 개방된 멕시코 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입상품의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체들이 나날이 파산해갔다.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그해 12월에는 경기가 급강하하여 페소화를 7년만에 15%나 평가절하하였다. 이에 미국 재무장관과 IMF의 캉드쉬 총재는 멕시코에 대해 500억불이 넘는 역사상 최대의 특별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그러나 멕시코는 국제 신용 회복을 위해 20%의 고금리 정책과 긴축재정 정책을 실시했기에 경기가 더욱 후퇴했다. 수개월 사이에 1만 5천 개의 기업들이 파산 선고를 하였고 3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임금 동결과 세금 인상의 결과 국민들의 구매력은 최소한 1/3 이상 줄어들었다. 현재 멕시코는 사실상 50%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둘째의 모습은, 더 이상 한국이 세계시장이라는 거대한 돈 기계에 머물지 않고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회를 '아래로부터' 건설해나가는 것이다. 이 사회는 더 이상 경쟁과 분열, 오만과 남용의 원리에 서지 않고 연대와 협동, 겸손과 외경의 원리 위에서 이웃 사회와 더불어 상부상조하는 진정한 자율공동체를 만드느라 땀흘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에 오전만 일하고 오후에는 좋은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좋은 토론회에 참여하여 감성과 지성을 연마하고,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들놀이나 낚시를 가거나 수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일터에서 하는 일의 내용조차 진정한 구조 조정이 이뤄져, 아무 일이나 '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공동체의 '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만들어내는 그런 보람찬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습 중에 과연 우리 사회가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문제의 뿌리와 줄기를 얼마나 제대로 가려내고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얼마나 올바른 실천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 뚜렷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실천은 당연히도 수많은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해 지긋지긋한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제이션과도 싸워야 하고 동시에, 수십년, 수백년 동안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을 닮아버린' 우리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바로 그러한 싸움의 과정은 자연스럽게도 대안적인 삶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6-70년대에 익히 듣던 바, '싸우면서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야만이냐, 해방이냐'를 지혜롭게 선택해야만 하는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4. 대안 사회의 밑그림

생각건대,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한 대안의 모색은 개인 수준과 지역 수준, 사회 수준에서 함께 일어나야 한다. 개인적 삶의 결심도 변해야 하고, 집단적 삶의 문화도 변해야 하며, 사회적 삶의 구조도 변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맞물려 있어 상호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를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우선은 자신의 삶의 논리부터 하나씩 대안적으로 바꾸어내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집단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일부터 찾아보자. 그리고 겉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지방자치제가 이미 출발한 것에 착안하여 지역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착수하자. 이것만해도 벅찬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반적인 사회구조가 대안적 원리 위에 재구축 되어야 함을 항상 잊지 말자. 조건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위의 역량이 닿는 대로 주어진 조건 속에서나마 조금씩 진척시키되, 새로운 조건을 열어나가도록 하나씩, 그러나 굽히지 말고 계속 나아가자. 대안적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의 재생산에 성공해야 한다. 하나는 경제적 재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이념적 재생산이다. 삶의 물질적 조건을 재생산할 수 있어야 운동의 지속성이 보장되며, 그렇다고 자본가적 이윤 논리에 빠지다보면 이념적 재생산에 실패하여 운동의 대안성을 잃게 된다.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나 대안적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두 측면이다.
여기서 기본 방향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정치가나 기업가들이 이야기하는 경쟁력 중심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적 구조조정의 출발점은 지역공동체를 자율자치의 공동체로 혁신하는 것이다. 몇 가지 핵심 지점들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과정에서 다른 운동체들이 기본적 입장(착취와 지배의 철폐, 풀뿌리 민주주의와 삶의 질 향상, 공동체와 생태계의 건강한 발전)을 같이 한다면 비록 미세한 차이가 있더라도 굳게 연대하자. 특히 주의할 것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즉 무슨 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도록 하자. 대안적인 삶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느냐가 문제이지, 무슨 주의가 표방하는 형식 논리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실천을 하다가는 또다시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율자치 공동체의 밑그림은 과연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아래서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나름대로 요약해본다.

(1)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높이는 지역 공동체: 우선 지적할 것은, 이미 많은 자율공동체들이 이 세상에 다채롭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인 미국이나 영국에도 애미쉬 공동체나 주거공동체들이 있고, 유럽 대륙에도 곳곳에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이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는 야마기시 실현지가 있고, 인도의 티벳 고원에는 라다크 공동체가 있으며, 한국엔 한살림 공동체나 풀무학교, 실험학교 공동체 운동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이 하고 있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절박성이다. 이 모든 공동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배우면서 동시에,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내부로부터 혁신하여 진정한 주민 자치를 이루어야 한다.

(2)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자율 공동체: 그래서 다음으로 확인할 것은, 이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이 삶의 자율성(life autonomy)을 지니는 한, '삶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서건 아니면 내부의 선택에 의해서건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한 삶의 자율성이 깨지는 순간 이 모든 운동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공동체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공동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겸손하게 연대하는 자세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내부로 와서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현재의 지방자치제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근본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말이 지방분권화이지, 지역 주민에 의한 자치가 아니라 중앙정치권의 하부 단위화, 또는 기껏해야 중앙정치계의 축소판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몇 거물급 인물 중심주의, 금권정치(돈 많은 이가 권력까지 쥐는 정치), 정경유착, 관료주의, 위로부터의 정치 등이 그 특징들이다. 중앙 정치권력을 지역 수준에서도 철저히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방자치제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이 지방자치제가 한국에서 자본주의 원리를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확대,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두 가지 과정은 사실상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율성을 하나씩 앗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방자치제를 내부로부터 혁신하여 진정한 주민 자치, 아래로부터의 정치, 자율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라도 바람직하지 못하게 팽창하고 있는 대도시와 공업 단지를 해체하거나 분산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도 '삶의 질' 중심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3) 실업의 공포와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 노동 생산성과 필요 물자 등을 잘 계산하여 모든 사회(공동체) 구성원들이 골고루 '일을 나누어' 가지며, 갈수록 조금씩이라도 여가가 많아지도록, 그리하여 창조적인 여가 생활과 수준 높은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개별 생산 조직들은 관료주의(bureaucracy), 부정부패(corruption), 낭비(waste) 등의 요소를 철저히 척결함으로써 경영 과정을 '삶의 질'(quality of life) 차원에서 쇄신해야 한다. 그리고 토지·주거·육아·교육·의료 등에 대한 '공개념'을 도입하여, 먹고사는 데 닥치는 많은 삶의 문제들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그 재원은 예컨대,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군축과 방위비의 대폭 절약, 모든 부정부패 고리의 척결(예컨대 뇌물, 비자금의 철저한 추적과 압수), 소득세 누진제의 철저한 실시, 탈세와 누세의 포착(예컨대, 모든 영수증에 대한 일정액 보상제 실시), 잘못된 정부지출(예컨대 과잉·중복 투자)의 지혜로운 활용 등이 될 수 있다. 결국에 가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화폐(또는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의 내용도 또한 돈벌이를 위한 소외된 일,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남녀노소 불문)의 다양한 욕구 충족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보람있는 일, 가치로운 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깝지만 뜯어내어 없앨 생산조직(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 것)과 새로 만들 생산조직(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것)을 분별력 있게 찾아내야 한다. 특히 먹거리 생산과 관련된 1차 산업이 중심이 되고 고급스런 문화생활과 참교육, 폭넓은 사회활동 등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범위에서 2, 3차 산업이 보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을 가능한 한 자립자족 하도록 하고 공동체끼리 협동해서 풀어야 할 것은 상부상조하면서 함께 푼다. 나아가 모든 사회적 노동은 종속 노동이 아니라 자율 노동이, 궁극적으로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자유) 활동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일하는 과정과 방식도 위에서부터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소망에 맞추어 나가도록 한다. 나아가 원료나 물품을 만들더라도 생태계를 해치거나 자연의 순환고리로부터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환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순리에 맞게 만들고 써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생산 방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 방식의 문제이다.

(4) 자율성과 책임성을 드높이는 자치 공동체: 이러한 내용과 방향성을 가지는 자율공동체들이, 자본이 그어놓은 온갖 종류의 분할의 경계선들을 과감히 넘나들며 범지구적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건설된다면 모두가 '자본의 지배'와 '실업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진정으로 시간주권과 삶의 기쁨을 되찾고 더불어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되도록 지금부터 하나씩 '준비하는 일'이 더욱 신바람 나지 않을까? 자율적인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창조된다면 이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장 경쟁력이나 생존 경쟁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왜곡된 삶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율적이고 책임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노동운동을 비롯한 모든 시민·사회운동은, 이러한 삶의 자율성 회복을 위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보다 겸허하게, 보다 근본적으로, 보다 유연하게, 보다 다양하게, 보다 생기 있게, 보다 연대해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지역의 참된 일꾼들이 서로 편견 없이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 사업을 하면서 지역공동체를 참된 자율공동체로 재편하는 일이 매우 절박한 과제로 다가온다. 그러한 노력이 착실히 쌓이고 연대의 전선이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자율공동체끼리도 네트워크(network)를 맺어 더욱 큰 연대와 협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후손들의 미래와 관련, '야만이냐, 해방이냐'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 자신의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역량일 것이다.

- 이 글은 1999년 10월 22일 명동 전진상 교육관에서 천주교 대안 경제연대의 정기워크숍에서 발표되었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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