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신자유주의의 본질 - 실현 과정에 있는, 무한 착취의 유토피아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0-02 23:20
조회
1391
신자유주의의 본질 - 실현 과정에 있는, 무한 착취의 유토피아


피에르 부르디외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시장의 논리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집단적 구조물들을 파괴하는 프로그램이다

1.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는 순전한 허구, 현실에 대한 과도하고 그릇된 추상에 의거한 순전한 허구(신고전파 경제이론)를 이론적 기초로 하고 있다. 경제라는 세계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담론이 그러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순수하고(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도 완전무결한(완벽하게 잘 굴러가는) 질서인가? 그리고 이 질서는 [돌아가는 실상이 투명하게 외부에 알려지기만 하면] 그것의 귀결을 능히 예견할 수 있다는 논리(이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논리인데 : 역주)를 가차없이 펼쳐 보여주는가? 그리고 잘잘못에 대해 상벌을 가하는 방법에 의해서―시장기능의 자동적인 작동에 의해서든 또는, 그보다는 조금은 예외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자신의 무장한 팔뚝들과 그 무장한 팔뚝들이 강요하는 정책들, 예컨대 노동력 가격(임금)의 저하, 공공지출의 삭감, 및 노동의 유연화 등을 매개수단으로 해서든―제반 잘못들을 제때에 바로바로 처벌함으로써 교정하는가? 과연 경제라는 세계는 참으로 그처럼 이상적인 질서인가?

경제라는 세계는 [그처럼 이상적인 질서이기는커녕 오히려] 실제로는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유토피아, [우리들이 최근에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책 프로그램"(신자유주의 사상의 원조인 하이에크가 이야기하는 바와 같은 '자생적인 질서'라기보다는 지극히 '인위적인 전략'인 : 역주)으로 전환된 하나의 유토피아, 그것도 자신이 내세우는 경제 이론(신고전파 경제이론 : 역주)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자신을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묘사인 양 착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거짓 이데올로기화한 : 역주) 하나의 유토피아를 실행에 옮긴 것일 뿐이지는 않은가?

이 변호론(신고전파 경제이론)은 수학 공식의 형태를 띤 순전한 가공물이다. 그것은 애시당초부터 가공할 정도의 추상화(抽象化)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이다. 그것은 '개인주의적 합리성'과 동일시되는 부류의 합리성을 사유(思惟)의 엄밀하고도 엄격한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합리적인 지향들이 나오게 되는 경제적.사회적인 제조건들(처지로서의 조건들 : 역주)과 그러한 지향들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 제약조건이 되는 경제적.사회적인 구조들을 [모조리] 괄호 속에 넣어버리는, 가공할 만한 추상화에 기초하고 있다.

[이 변호론이 얼마나 현실에 대한 과도하고 그릇된 추상(抽象)인지는] 간단한 예로서 교육제도만을 생각해 보면 충분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산자를 생산함(노동자를 키워내는 데 : 역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함에 있어서도 체계적인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기, 바로 그런 시기에 행해지는 교육에 대해서 결코 "명실상부한 제도교육"으로 셈해 주지 않고 있다(교육과 노동을 절대적으로 분리시키는 추상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고생의 산업연수는 교육이기보다는 임금노동에 가깝다. 반면, 신제품 생산을 위한 신기술 습득 과정은 노동이기보다는 교육에 가깝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기술혁신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기에 있어서는 노동과 교육을 절대적으로 구분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 역주).

이러한 따위의 태생적인 결함, 즉 "순수이론"이라는 왈라스(주1)류(流)의 신화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결함으로부터 자연히 경제학의 제반 부족점(한계)과 잘못된 점(오류)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경제학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옹고집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처럼 고집스럽게 '경제 고유의 논리' 즉 경쟁에 기초하고 있고 효율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자칭하는 '경제 고유의 논리'와 형평(衡平)의 원칙에 복종하는 '사회적(사회복지적 또는 사회연대적) 논리' 사이에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대립관계를 상정하고서, 그 자의적으로 상정한 대립관계에 악착같이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와같은[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구별하고 대립시키는] 대립관계는, 오로지 경제학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의해 [마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상정(想定)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대립관계는 이처럼 허구적으로 고안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원천적으로 탈(脫)사회화되고 탈(脫)역사화된 이 "이론"은 오늘날,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스스로가 "참으로 되는" 즉 경험을 통한 검증으로 자신이 진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들을 지니고 있다. 과연 신자유주의 담론은 여타의 담론들과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에르벵 고프망에 따르면(주2), 이 이론은 피신처에서의 정신병적 담론이 그러한 것과 같은 식으로 하나의 "억센 담론"이다. 이 담론은 매우 강력하고 또 논파하기가 어렵다. 왠고 하니, 이 담론은 자신이 그것의 현상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힘-관계의 세계(이성적 관계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힘을 가진 자가 장땡인 세계 : 역주)의 모든 힘들―기득권적인 것들―을 자기 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담론은 특히 경제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경제적 선택에 일정한 방향(약육강식을 가차없이 추구하는 : 역주)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 힘-관계들에게 자기 자신의 고유한 힘 즉 고유하게 상징적인 힘(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 역주)을 첨가해 줌으로써, 그 힘-관계들의 세계가 현재의 상태 대로 유지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認識)에 대한 이 과학적인 프로그램(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외양을 띤 사고체계 : 역주)은 오늘날 인식에 대한 프로그램에 멈추지 않고 행위에 대한 정책 프로그램으로까지 즉 전략으로까지 전환되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이 "이론"―이 이론이란 다름아닌 "방법론

상의 집단주의를 파괴하는(방법론상의 개인주의만을 강요하는 : 역주) 프로그램"이다―이 현실화되고 원할하게 작동되는 제조건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엄청난 "정치적, 정책적인 노력"(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부정적, 파괴적이기 때문에 도처에서 거부되고 있는)이 경주되고 있다. 즉 집단체(국가, 노동조합, 계급, 민족 등 : 역주)를 파괴, 해체시키고 개인을 원자화시키려는 엄청난 정책적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이 움직임은 금융에 대한 탈규제 정책에 의해서 그 실현이 가능하게끔 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정책수단들(그러한 정책수단들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다자간 투자협정'이 있는데, 이 협정은 민족국가들에 대항해서 외국인 기업들과 그들의 투자를 보호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다)을 동원한 변혁적이면서 "파괴적인"―이렇게 파괴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확하다―활동들을 통해서 그 실현이 달성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순수-시장의 논리에 대해 방해물로 될 소지가 있는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적 구조물들을 문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문제시되는 집단주의적 구조물로는, 그 운신의 폭이 부단히 좁아지고 있는 '민족'이 대표적이다.

또 노동집단들(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단위 : 역주)도 공격의 주요한 목표물이 되고 있는데, 노동집단들은 예컨대 임금과 근속기간을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개인별로 결정하는 것 및 그 결과로서 수반되는 노동자의 원자화를 겪고 있다. 또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집단체들 즉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협동조합들이 목표물이 되고 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집단주의적 구조물조차도, 연령계층에 따라 시장이 분단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통해서, 소비에 대한 자신의 [집단주의적] 통제권의 일부분을 잃어가고 있다.


2.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궁극적인 기초는 실업, 불안정 및 해고위협이라는 구조적인 폭력이다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자신의 사회적 힘을 자신이 그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사람들―즉 주주들, 금융 투기꾼들, 산업가들, 자유방임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조금 포기하는 쪽으로 개종한 보수주의적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인들, 그리고 바로 자기들 자신의 절멸을 교사하는 정책들을 강요하는 데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계의 간부들과는 달리, 그 정책들이 초래할 후과(後果)들에 대해 혹시 자신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즉 자신들이 희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위험을 추호도 느끼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을 밀어부치고 있는 금융계의 고위관리들―의 정치.경제적 힘으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총괄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경제와 사회현실 사이에 단절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사회에다 이론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해서 일종의 논리기계의 모양을 가진, 경제체제 즉 경제 주체들의 움직임에 대한 일련의 강제적인 구속(절대적으로 순응해야만 하는 제약 : 역주)인 것처럼 나타나지는 경제체제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정보기술의 발달과 결합됨으로써, 자본의 이동성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지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또 자신들의 투자에 대해 단기-고수익을 얻기를 바라는 투자가들에게 거대기업들의 수익성을 상시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가능성과, 또 상대적인 실패에 대해서 결과적으로(주가의 하락을 통해서) 처벌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기업들 그 자체는 이같은 항상적이고 항구적인 위협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기업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신속하게 시장의 요구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은, 기업들로 하여금 이른바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을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단기-고수익을 얻고자 하는 주주들의 지지를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떨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경영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능력과, 금융적인 지휘.감독을 통해서 경영자들에게 [경영에 관한] 기준과 원칙을 정해 주는 능력, 및 일자리, 고용 및 임금에 관한 경영자들의 정책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능력 등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다.

이와같이 해서 '유연성'의 절대적 지배가 구축되고 있다. 그리고 시한이 정해진 고용계약(계약직) 내지는 임시직 일자리와 "사회복지 계획"의 수혜가 교대로 반복되는 노동관행이 정착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동일한 기업체 안에서조차도 임금관계의 개인주의화를 통해서 자율적인 지사 또는 지점들 사이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강제된 작업반들 사이에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개개인들 사이에서 경쟁이 제도화되고 나아가 정착되고 있다. 임금관계를 개인주의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별로 업무성과의 목표를 정해 주는 것, 개인별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상시적으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개인별로 차등 임금인상하거나 또는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상여금을 수여하는 것, 및 개인별로 경력을 관리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또 "책임화" 전략도 있다. 이 전략 하에서는 자신의 상급자에게 강하게 종속되어 있는 단순한 봉급생활자이면서도 자신의 업무로서 책임맡고 있는 판매, 생산, 지점, 상점 등에 대하여 마치 "독립적인 사업주"인 것처럼 무한책임을 부여받고 있는 부류의 간부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자율적인 자기-착취로 나아가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또 "참여적 경영" 기법도 있다. 이 기법 아래서는 봉급생활자들의 "관여"(업무) 범위를 간부들의 직무 범위를 훨씬 넘는 데까지 확장하는 "자율 통제"가 요구되고 있다(작업 현장의 팀제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 역주).

이것들은 말하자면 '이성에 입각한 복종' 기법 같은 것인데, 책임지는 직위에 있는 간부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일 속에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초과투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또 화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일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제반 [인간적인] 기준 내지 규준들과 집단적인 연대를 약화시키거나 절멸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주3)

위계질서의 모든 층위에서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萬人)의 투쟁―이런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불안정, 고통 및 스트레스 속에서 일과 직장에다 자신의 소속감을 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이 벌어지는 다윈주의(생물의 세계처럼 인간의 세계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의.주장 : 역주) 세계의 실천기관(오늘날의 기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역주)은, 불안정이 만들어내는 "불안 분위기"로부터 방조(傍助)를 받지 못한다면 그처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위계질서의 모든 층위에서 그리고 특히 간부직들 가운데에서―그것도 최고위층에서까지도―보여지고 있는, 불안정화와 만성적인 실업의 위협에 의해서 순치된 산업예비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처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자유라는 휘장 아래 펼쳐지고 있는 이 경제질서의 궁극적인 기초는 결국 이 질서가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는 실업, 불안정 및 해고위협이라는 "구조적인 폭력"인 것이다. 즉 개인주의적인 미시경제 모델이 "조화롭게"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대중들의 질병 상태, 즉 실업자라는 산업예비군의 광범위한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사람들이 노동계약("계약 이론"에 의거하여 교묘하게 합리화되고 있는 반면에 실제적으로는 계약―대등한 당사자간의 거래―이라는 의미를 잃을 정도로 되어버린)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기업의 담론은 시간상의 보장을 일체 사라지게 만듦으로써(일자리의 3/4은 계약직이고, 전체 고용 가운데 불완전 고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부단히 증가하고 있으며, 개인해고{대량 정리해고만이 아니라}는 더 이상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매 순간순간 새롭게 자신의 소속처를 획득해야 하게 되어 있는 시기에, 신의, 성실, 협력 및 기업문화라는 말들을, 그러한 상황이 요청하는 것만큼 결코 쓰지 않았다. [신의, 성실, 협력과 같은 것들이 매우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시기에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대신에 폭력적인 수단들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지금, 신자유주의 유토피아가 어째서 실제의 현실 속에서는 일종의 폭탄(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기계장치)으로 구현되어 버리기 쉬운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법칙은 지배자들 자신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즉 지난 시기에 마르크스주의(현실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 역주)가 그러했던 것처럼―신자유주의는 이렇게 그 지배자들의 존립까지 파괴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점이 많은데―이 유토피아는 어마어마한 신뢰 즉 "자유무역 신념"(자유무역에 대한 신을, 금융인들이나 대기업의 주인들처럼 사실상 자유무역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자유무역 신앙을 가질만한 처지에 있는 : 역주)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람들 즉 자본주의체제의 지배자들 일반에게도 신앙으로 삼으라고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라는 유토피아는 정부 고위관리들이나 정치인들처럼 자신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자유무역에서 끌어내고 있는 사람들;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시장의 권력을 신성화하는 사람들(대표적으로 경제학자들 : 역주); [개인주의적] 합리성의 모델에 입각해서, 개인적인 이윤 극대화를 순전히 사적으로 추구하는 자본 보유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행정적 또는 정치적 장벽들을 철폐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예컨대 시민운동단체들 : 역주); 민족국가로 하여금 노동시장을 필두로 모든 시장에 대하여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절대로 금하고, 공공 서비스를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고, 공공적.사회적 지출을 삭감하는 등등을 하면서, 경제의 주인들에게 복무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자유라는 그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예컨대 지식인들 : 역주) 등에게도 자유무역 신앙을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배자들 자신의 자멸을 교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

1) 프랑스 경제학자인 오귀스트 왈라스(Auguste Walras, 1800-1866)는 '부의 본성과 가치의 원천에 대하여'(De la nature de la richesse et de l'origine de la valeur)(1848)의 저자이다. 그에 따르면 이론은 순수하다. 그는 수학을 경제학 연구에 적용하고자 시도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2) Erving Goffman, '피난처, 정신병의 사회적 조건에 관한 연구'(Asiles, Etudes sur la condition sociale des malades mentaux), 미뉘(Minuit) 사 편, 파리, 1968.

3) 이 모든 것에 관해서는 '사회과학 연구 기록'(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두개 호에 실려 있는 다음의 글에서 상세한 설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노동에 있어서의 새로운 지배 형태"(Nouvelles formes de domination dans le travail)(1 및 2)로서, 제114호, 1996년 9월호와 제115호, 1996년 12월호에 실려 있다. 다른 하나는 가브리엘 발라스(Gabrielle Balazs)와 미셸 삐알루(Michel Pialoux)의, "노동의 위기와 정치의 위기"(Crise du travail et crise du politique)의 서론, 제114호, p 3∼4.인데 여기에서 아주 전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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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자유주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원리로 하는 다윈주의를 인간생활의 최고의 규범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진정으로 신자유주의를 경배하는 사람들(초국적 자본 및 매판자본 : 역주)과 반드시 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신앙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자 하는 특유의 관심을 지니고 있다. 아니, 그것에 지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래야만 지배층의 호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역주)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수학적 합리성'이라는 외관을 씌운 유토피아의 경제적.사회적 효과에 대하여 자신들의 심정이 편하든 편하지 않든 그것에 상관함이 없이 이렇게 [신앙을 생산 및 재생산] 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전체로부터 분리되고, 특히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의(머리 속에 그린 것이 아니라 : 역주) 경제적.사회적 세상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구성물―대개의 경우 매우 추상적이고, 순 이론적이며, 공리공론적이지만―들 전체로부터도 분리된 상태에서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특히 '논리의 사물'과 '사물의 논리'를 매우 혼동하는 경향에 빠져 있다.(논리적으로 정합적이면 정합적일수록 사물들간의 물질적 연관--사물의 논리--을 정확히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 역주)

경제학자들은, 경험을 통한 검증을 받을 기회가 사실상 전혀 없는 모델들, 역사상 존재해 온 여타의 과학들―경제학자들은 [당연하게도] 이러한 부류의 과학들에서 자신들의 수학놀음이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은 수정같은 투명성과 순수성을 확인하지 못한다―이 획득한 지식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끔 만드는 [최신형의] 모델들, 대개의 경우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자신들조차 그것의 진정한 필연성과 심오한 복잡성을 깨달을 수가 없는 [오묘한] 모델들을 믿고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 모델을 신봉하면서 경제학자들은 하나의 어마어마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협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변화는, 비록 이러한 변화의 결과들 중의 몇몇은 그들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경제학자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언짢게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사회당에 회비를 낼 수도 있고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는 경우에는 당의 대표자들에게 사려 깊은 자문을 제공할 수도 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런 '부작용'들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들은 흔히 "투기성 거품"이라고 부르는 것에다 모든 탓을 돌릴 수가 있기―몇몇 경우에는 그같이 투기성 거품에다 탓을 돌리기가 명백히 곤란함을 무릅쓰고서--때문이다. 반면에 이 엄청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경제학자들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다듬어내고 있는 '극단적으로 합리적인'(마치 정신병의 몇몇 형태들이 그러한 것처럼) 무모순(無矛盾)의 유토피아를 현실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토피아가 현실화되고 있는 판에 그 정도의 사소한 문제들에 괘념하겠는가? : 역주)

그렇지만 세상은 세상이지 유토피아가 아니다. 찬란한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의 현실에의 적용은 즉각적으로 여러가지 효과들을 가져오고 있으며, 그것들은 지금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사회들에서,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비중이 점차 커져가고 있으며 소득격차가 비상하게 증가하고 있다 ; 그리고 상업적(영리추구적) 가치들을 침투시키고 강요함에 의해서 영화, 출판 등 문화 생산 분야에서 자율적인 영역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 뿐만 아니라, 그리고 특히나, 지옥기계(신자유주의 질서 : 역주)의 효과들을 거부할 수 있는 집단적인 심급(審級)들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집단적인 심급들 가운데 제일선에 위치하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관념과 결부된, 보편성 있는(만인 공통의) 가치들 모두를 수탁.보관하고 있는 존재인 국가, 바로 민족국가이다 ; 그리고 경제와 국가의 상층부에 또는 기업들 속에 등 도처에서 이같은 부류의 다윈이즘 정신--다윈이즘은 '승리자'를 [무조건] 예찬하는 정신으로서, 고등수학과 '탄력성 있는 도약'을 본떠서 (사물들의 연관성은 무수하면서 극도로 복잡하고, 변화는 우연적이면서 비약적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역주) 만들어져 있다--이 강요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적] 다윈이즘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냉소주의'를 모든 인간행위들에 관철되는 [최고의] 규범으로 치켜세운다.

사람들은, 이 정치-경제 체제가 만들어 내는 놀랍도록 엄청난 고통이 더욱 심해지게 되면, 훗날의 언젠가에 지옥의 심연으로 향해 나아가는 이 과정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어떤 운동이 출현될 것으로 믿으며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로 기이한 역설에 직면해 있다.

[도대체 어떤 역설에 직면해 있는 것인가?] 이 새로운 질서―이 질서란 자유롭지만 고독한 개인들로 구성된 질서이다―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부딪치게 되는 난관들은 오늘날 경직성과 의고(擬古)주의에 그 탓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간섭은--그러한 간섭이 국가로부터 나오는 것인 한에는, 그 간섭의 수단과 방법이 어떠한 것이든 불문하고--다짜고짜로 불신받고 있으며, 따라서 순수하고 익명적인 메커니즘 즉 시장(사람들은 시장에 대해서 그것 또한 이해관계들이 각축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에 이익이 되게끔 없애버리라고 독촉받고 있다.

반면에 [삶이] 불안정화된 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질서가 혼돈상태에 빠져서 와해되어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실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과정에 있는 구 질서의 제도들과 그 제도들의 집행자들, 사회적으로 일하는(사사로운 취미로 자기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 : 역주)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의 모든 종류의 노동들, 그리고 또 가족적인 것이든 여타의 것이든 막론한 모든 형태의 사회적 연대들, 등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거나 확고부동하게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로의 이행은 사람들이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따라서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대륙 표면의 이동이, 장기적으로 볼 때 극히 무시무시한 그것의 효과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에는]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무시무시한] 효과들은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요즈음 들어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구 질서를 방어하는 세력들의 저항들에 의해서도 또한 가리워지고 있다. 이 방어세력들은 구 질서가 지니고 있는 자원들(예컨대 화폐발행 및 통화량 관리 : 역주)로부터 힘을 길어내고 있으며, 옛적부터 전래되어 오던 연대들로부터 힘을 길어내고 있다. 또 아노미 상태로의 추락으로부터 현 사회질서의 상당한 부분을 보호하고 있는, 사회[복지]적인 자본(이 자본은 재충전되고 갱신되지 않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쇠퇴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고갈은 오늘내일 당장 발생하지는 않는다)의 비축분(예컨대 사회보장기금 : 역주)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길어내고 있다.

4. 민족국가의 역할을 보존하는 것은 수구 보수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보존"(conservation)하는 힘들―이것은 너무나 쉽게 보수주의(conservative)적인 힘들로 취급되고 있는데―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질서의 구축에 대해 '저항'하는 힘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힘은 [현존질서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모종의 타당성 있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기구들 속에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국가기구의 집행인들(특히 예컨대 말단 공무원들과 같이 그 기구들에 극히 밀접히 부착되어 있는 사람들)의 지향 속에 다음과 같은 창조해 내는 힘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 속에는 얼핏 보아서는 사라져버린 구 질서와 그것에 부수하는 "특권들"에 대해 단순히 방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마치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사주에 따라] 이 저항들에 대해 즉각 방어적이라고 그것을 비난하게 될 터인 것처럼―시련을 견디어 내고 결국 새로운 질서―이 새로운 질서란 이기주의적인 이해관계와 사적 이윤욕을 추구하는 것을 유일한 계율로 삼지 않는 질서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질서는 그런 것들(이기주의적인 이해관계와 사적 이윤욕 : 역주) 대신에 집단적으로 구상되고 승인된 목적들의 이성적인 추구를 지향하는 집단체로 대체시키는 질서이다―를 발견하고 건설해 내고자 애쓰게 되어 있는 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운동단체, 노동조합, 정당과 같은 집단체들 가운데서 어째서 국가―민족국가 또는 유럽연합과 같은 초(超)민족적인 국가(세계국가를 향한 중간단계인)는 더더구나―에 대해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국가들이야말로 금융시장에서 실현된 이윤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그것에 과세를 징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히 금융시장이 노동시장에 대해 행사하고 있는 파괴적인 작용을 방어할 수 있다.

국가는 노동조합들의 도움을 받아서 '공공적인 이해관계'―이 공공적인 이해관계는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간에, 비록 산술적인 기장(記帳)에 있어서 이러저러한 오류를 지니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대신에 (지난날 "식료.잡화 상인"이 흡사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쉽게 셈할 수 있는 [고등수학이 아닌 산술의] 모습(새로운 신앙인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셈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추는 것에 대해 인간 성취의 최고의 형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으로부터 결코 이탈하지 않을―의 구상과 방어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3월호에 실렸던 글을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가 번역하여 98년 6월에 <주간정세동향>에 실었던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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