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현 세계무역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은 타당한가?(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3-13 23:14
조회
893
신학적 성찰

필자는 새로운 조정방안들이 세 가지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창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 첫째로 인간은 창조의 일부이며 따라서 자신들에게 부과된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강조돼야 한다. 인간은 이들 한계들을 넘어설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이에 대한 기본적인 의존성은 자신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인류는 다른 인간들 및 총체적인 창조와 더불어 교통할 경우에만 이의 온전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인간 삶의 성취는 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이와의 관계를 통한 지혜와 돌봄에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세계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지혜는 모든 것들에 앞서 창조됐으며 따라서 모든 사안들을 다스린다. "하나님이 지구의 창조를 계획했을 당시에 나는 하나님 옆에 지배인으로 있었으며, 나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의 광명에 거했으며, 하나님이 계시는 세계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잠언 8:29-31). 따라서 과제는 창조에 나타난 지혜의 방안을 발견하는 데에 있으며 이들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현세의 공적인 삶을 결정짓는 가치들 - 확충된 생산과 경제적 성장 및 점점 늘어나는 소비주의 - 는 분명 지혜의 법칙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가 없다. 부의 수준이 상승되고 있는 것조차 절대적인 긍정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지혜의 관점에서 가장 먼저 고려돼야 할 사안은 바로 개발과 재생간의 평정상태라고 할 수 있다.
2. 인류가 합리적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성경은 진정 상승되는 진보적 선상에서 역사를 말하는가? 많은 성경구절들은 이와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해준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과적으로 목적 지향적으로 옮겨가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왔다. 이스라엘은 민족중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이 지평선은 확대되어가고 있는데, 특히 묵시문학을 보면 그런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통치하신다. 예언자 다니엘에 의한 비전은 인류의 역사가 오히려 하향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국들은 반대되는 측면만을 추종하고 있으며, 각 제국들은 이전의 제국보다 더욱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양상들을 띠게된다. 백성들의 참된 소망은 인류의 역사 너머 저편에 두게 된다. 제국들은 파괴될 것이며 - 아니 오히려 자멸될 것이며 -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같은 청사진이 신약에서도 펼쳐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가 결코 새로운 고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폭력과 죽음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교회의 궁극적 소망은 역사를 넘어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이의 윤곽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와의 교통으로 이의 실현을 예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기독교의 희망은 종종 위로 상승되는 인류역사의 틀 내에서 희망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에 직면하여, 특히 미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부닥치며 확신과 역동주의를 향한 본능적인 인간의 욕망에 직면하여, 역사적 발전을 증명하기 위한 유혹이 거의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더불어 펼쳐졌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는 발전의 논리로 해석됐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와 상반되는 방향으로 해석됐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역사의 과정에서 서서히 성숙되는 열매로 보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는 줄잡아 말해도 근본적으로 열려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정의와 평화로서 더불어 사는 것이 허용되는 조건들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소망은 끊임없이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개발해야 한다는 망상으로부터 심령들을 해방시킨다. 기독교적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인 실용주의를 실천하도록 힘을 부여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세계적이며 지역적인 교류관계. 인류의 상호의존성이 확산되는 양상은 따라서 단순한 유익으로만 볼 수 없게 됐다. 모든 역사적 발전단계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매우 유동적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경향으로 치우쳐온 교회들은 보다 근본적인 평가작업을 개발시켜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성경적 증거들이 두 가지 방침에 대해 강조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에서는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또는 종교적 배타성에 대해 끊임없이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경계를 초월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나 각기 공동체들 나름대로의 사소한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모든 배타적 행위는 반드시 거부돼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세계의 제국들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적 기준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백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방식이 거대한 힘의 상호작용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의 역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각별한 백성으로 이스라엘이 존재한 것 자체가 제국적 정당성에 대한 살아있는 비평임을 말해준다. 발의 일부를 철과 찰흙으로 빚은 거대한 조각의 형상(다니엘 2장)은 이에 대한 성경적 메시지의 단호한 면을 보여준다. 특히 성경본문들은 무역의 결과 발생된 권력의 유혹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무역행상의 풍요를 통해 너는 폭력으로 가득했으며 죄를 지었다"고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의 왕에게 말한다(28:16).
초창기부터 교회의 역사는 이와 유사한 비평으로 특징지어져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 불가피하게 로마제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약성경은 이에 대한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가 진보함에 따라 인간의 자아확신은 보다 완고해지며 공격적으로 되어갔던 것이다.
이 이중의 모습은 두 가지 차원의 증거를 말해준다. 복음은 한편으로는 배타성의 모든 요인들에 대한 비평을 요구한다. 교회들은 너무나 자주 나름대로의 특수한 이점들을 고려하는 유혹들에 대해 굴복하고 만다. 간혹 이들은 민족적이며 그밖에 다른 정체성들의 추진세력 및 영적인 보증자임을 자처하기까지 해왔다. 교회의 메시지는 총체적인 오이쿠메네(oikoumene)의 방향지침에 대해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는 상호의존성의 진전을 향한 모든 운동들이 바람직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들은 모든 힘의 집중화현상에 대해 거부해야 한다.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반드시 각기 속한 모든 공동체의 질적 사안에 놓여져야 할 따름이다. 보편성 개념의 고유성은 두가지 차원 - 지역성과 보편성 - 모두를 포괄하는 데에 있다. 교회들은 지역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공동체들간의 상호작용이 견실하게 이루어지도록 기여해야한다. 따라서 이들은 유세한 전세계적 체제의 주장에 대항하여 지역 공동체의 유익을 옹호하기 위한 과제 또한 지니게 된다. 전세계적 질서의 양질을 위한 시험은 모든 처소에 위치한 공동체 각각의 양질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인류가 안고 있는 명백한 위협적 상황이야말로 교회들을 위한 분명한 지침을 설정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으로 이들은 모든 처소에서 책임질 수 있는 사회들이 옹호되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 자명한 원리들이 새로운 지침으로 보여질 수 있겠으나, 이들은 사실 기독교의 사회적 가르침의 전통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실존(subsistence)"과 "보충(subsidiarity)"이라는 친밀한 개념들과도 일치하는 것들이다. 실존은 온전한 창조 내에서 이상적이고 공정한 인간의 요구들에 대한 이슈를 제기한다. 반면 보충은 전세계적 연대를 굽히지 않고, 책임감이 최저의 가능한 차원에서 이행되는 것을 시사한다. 필자는 오늘날의 도전적 상황에서 교회들이 이들 개념들을 부활시켜 발전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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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과정이 여전히 변화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없다. 기껏해야 현재의 발전양상으로 볼 때, 변화될 수 없다는 견해를 따르는 쪽이 지배적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보다 더한 파괴현상 및 삶의 질의 손실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지침의 시작이 명백하다할 지라도, 이 사회의 대안 모델이 마련될 수 있을 정도로 여론을 모으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고 보여진다. 새로운 미래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는 보다 건강한 사회적 형체로 복귀하기에는 너무나 늦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필자는 떨쳐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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