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현 세계무역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은 타당한가?(2)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3-13 23:1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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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적용을 위한 가능한 조정방침

지속가능성의 원칙에 부응할 수 있는 지침들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1. 가치규모에 대한 인식. 첫째로 천연자원은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경제활동들은 이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헤르만 달리(Herman Daly)는 경제제도가 생태제도의 보조제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준다. 그는 침범돼지 말아야 할 가치규모나 척도에 대한 개념을 조성시킨다. (주7. Daly는 또한 이 지구의 생태학적 만재선(滿載 Plimsoll)에 대한 현저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절대적 최적의 적재량은 해상의 만선제도에 통용되고 있다. 수위표가 만재선을 가르킬 경우, 이 배는 수용능력의 한계를 채운 것이다.... 생태학적 거시경제학의 주요 임무는 만선표식에 비유된 경제제도를 기획하는 데에 있다"; cf. Sustainable Growth: A Contradiction in Terms?, Geneva, 1993, pp.41-42.) 이들 가치척도들은 자연세계에 있어서 균형의 원칙 및 재생의 능력과 더불어 조화롭게 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인간의 요구가 결단코 역행할 수 없는 위험의 요인으로까지 나갈 수는 없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가치규모의 개념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억측에 대해 반대한다. 사실 자원의 수용능력에 관한 1970년대의 추정치는 너무 비관적인 것으로 입증됐다. 당시에 예측했던 것 이상의 큰 규모로 천연자원이 꾸준히 지속 유지됐으며, 일정한 자원들에 대한 대체물이 발견될 수 있을 것처럼 보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이에 대한 압력이 증가됐으며, 이상적인 가치규모를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경제개발착취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요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일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7톤 이상 초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측정했으며, 최대 기준치의 설정은 오늘날 어업권을 둘러싼 국가들 간의 분쟁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요인으로 적용되고 있다.
가치규모의 개념과 유사하게 관련된 사항으로 인간의 요구와 욕망에 대한 한계설정 또한 필요한 것으로 제기된다. 경제제도는 일정한 지점까지 그 이상으로 성장돼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 모두는 총체적으로 일정한 부의 충족수준에 대해 선포해야할 필요가 있다. 일부 저자들은 경제제도를 나무의 성장으로 비유하여왔다. 나무가 고유한 특질을 규정짓는 크기에서 벗어난 상태로 성장하게 되면 이는 비정상으로 간주될 것이며, 아마도 암적인 질병의 상징으로까지 취급될 것이다. 나무가 "하늘까지의 성장"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반드시 배타적인 경제성장의 잣대로서 이의 업적을 측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를 최대화하는 대신에, 이 사회는 충족과 간소함 및 보살핌과 연대와 같은 가치들에 의해 선도돼야 할 것이다.
구즈와드(Gouzwaard)와 헤리 데 랑게(Herry de Lange)는 "최대수준의 소비주의를 설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고유한 기본요구(모든 이의 기본요구와 마찬가지로)를 위한 최소전망"에 대해 다루었다. 이들은 이러한 "충분 경제학(economics of enough)"과 연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이는 "오늘과 미래 세대들의 합법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물질적인 사치스런 욕망들"을 구분하는 것이며, "경제적 필요성에 부합되는 것: 극빈자와 일자리를 잃은 자들의 요구, 환경과 이의 지속가능성 및 인간공동체의 요구사항"에 대해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질서에 대한 이러한 개혁조치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즉 물질적 욕망이 치러야 할 대가를 말한다. 충분 경제학에 준거하여, 통상적인 소득의 증가는...결국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 사회가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8. Bob Goudzwaard and Harry de Lange, Beyond Poverty and Affluence: Towards an Economy of Care, Geneva, WCC, 1994, pp.74,78,90; 이와 유사한 논제들을 펼친 작업으로 Anna Sax, Peter Harber and Daniel Wiener, Das Existenz-Maximum, Zurich, Werdverl., 1997.)

2. 지역의 중요성. 경제와 사회를 조정하는 데에 있어 두 번째 제안사항은 통상적으로 보다 작은 단위에 대한 강조에 있다. 세계적인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지역 공동체의 역할에 보다 큰 가치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설정을 피력하는 주장들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의 많은 경우가 인간 관계의 질적인 면에 대해 우선적인 관심사를 표방한다. 조그만 공동체를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들은 인간공동체가 본래대로의 작은 단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을 피력하면서 이는 바로 시민의 책임감과 문화적 특수성이 꽃피울 수 있는 단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의 본질적인 주장은 바로 지속가능성을 피력하는 데에 있다. 개발과 생산 및 소비가 제한된 지형학적인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다면, 자원들은 보다 지혜롭게 사용될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동력의 가동성 및 상품에 대한 필요성을 감소시킬 것이다.
이는 물론 경제의 자급자족을 위한 필요성 자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많은 문제점들이 지역의 권한을 무시하며 국제적 합의만을 요구하는 데서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역의 불평등을 조장함으로써, 국제적인 통상거래가 절대적 양상으로 부각되는 현실이다. 이 이슈는 바로 어떤 지역과 지역의 공동체들이 국제 공동체의 틀 내에 부합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지방 분권"의 주창자들은 지역 공동체야말로 각종 사회의 시발점이자 목표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조성시킨다. 이들은 종종 세계적인 사회를 "공동체들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라고 표방한다.
헤르만 달리(Herman E. Daly)와 존 콥(John B. Cobb)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실존하지도 않는 공동체의 체제들에 복무시킨다는 가정 하에 국가적 차원의 기존 체제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첫째로 국가 공동체의 연약한 결속력을 정비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런 연후에 임금과 복지체계 및 인구통제, 환경보호, 수호정책 등에 있어서 비슷한 기준들을 지닌 국가적 공동체들 사이에 보다 큰 규모의 교역지대로서 동맹관계를 펼침으로 공동체를 확산시켜 나가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진정한 효능이란 퇴행적인 개별주의적 자유무역의 경쟁으로부터 어렵게 성사시킨 이들 공동체의 기준들을 보호하는 데에 있는 것이며, 이는 최소의 공통분모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9. Herman E. Daly and John B. Cobb, For the Common Good: Redirecting the Economy toward Community, the Environment and the Future, Boston, Beacon, 1989, p.235.)

콥은 지속 가능한 사회란 바로 "지방분권의 사회"라고 말한다. 인간의 욕구들은 "가급적이면 무역이 필요한 경우에만, 이에 의존하는 형태"로서의 지역적인 차원에서 충족돼야 한다. 지역공동체만이 인간공동체로서 건강하게 성장될 수 있으며, 보다 크게 살아 움직이는 환경의 틀 내에서 효과적인 인류공동체를 수립할 수 있는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경제방식에 대한 기본적 통치권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급진적인 지방분권에 의해서만 소모적인 에너지 공급의 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주10. John B. Cobb, Sustainability, Maryknoll, NY, Orbis, 1992, p.48.)
이와 유사하게 레리 라스뮈센(Larry Rasmussen) 은 부차성(subsidiarity)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고전적 인식을 부여하고자 한다: "부차성은 보다 큰 규모의 동떨어진 단체들에 의해 주어지거나 취해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가능한 자원들과 더불어 근접한 범위에 있는 보다 작은 규모에서 높은 참여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11. Larry Rasmussen, Earth Community, Earth Ethics, Geneva, WCC, 1996, pp.336f.) 이 지침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자원과 권력의 편파적인 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지역이 더 이상 우리가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장소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동반할 유일한 소재지가 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조직하며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이의 필요지침은 '무역반대'나 '시장반대' 또는 '최소한의 무역'과 '최소한의 시장'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 지침은 어딘가의 수용능력에 대한 적절성을 최소화시키는 것으로, 결국 현재와 미래 세대의 다른 사람들과 여러 종에 대한 생명의 위험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주12. Ibid., p.339.)


해결되지 않은 충돌양상

고려사항과 이론들이 합리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현 발전체제의 역동주의는 바로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어떻게 조정된 사회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도록 가치규모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를 출범시킬 수 있을까? 일정한 분야에서 자원의 사용에 대한 규제가 요청되는 드문 경우들이 일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창조성을 전개시킴으로써 상황을 시정하기 위한 일차적인 부르심으로 해석될 것이다. 과연 어디에서 일정한 소비의 수준에 만족시킬 수 있는 채비를 구비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욕망은 원칙적으로 무제한적이라는 확신이 서구문명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이는 또한 현 시대의 이익관계로서 작용되기 때문에 이 사회의 모든 수준 곳곳에 강력하게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어떻게 인간사회가 지역공동체에 초점을 두었던 자신들의 옛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변화를 획득하기 위해 제기된 각종 시나리오의 약점은 바로 어떻게 현재의 정황들 아래서 변화를 위한 의지가 개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없는 나름대로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13. 어떻게든 경제제도가 변화될 수 있는가와 관련된 구체적인 제안들은 Daly and cobb의 앞의 책 마지막 부분 제안들과 경제회복을 위한 "12단계 프로그램"에서 자신들의 분석을 보여주었던 Goudzwaard and de Lange의 앞의 책(pp.134-61)에서 볼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동적인 힘이 너무 강력하여 이와 반대되는 운동은 거의 기회가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에 따르는 대세가 너무 명백한 연고로 이는 실질적인 유일한 발전양상인 것처럼 부각되고 있다. 다른 방향에서 제기된 사안들은 과거에의 동경이나 낭만적인 꿈 또는 이상주의적인 프로그래머이거나 필경 실제로는 적용될 수도 없는 이론적인 발상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원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심사숙고하게 고려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현 과정의 가능한 시정방안 차원의 논의를 제한시키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없을 바에야, 지속가능이 실현될 수 없는 마당에 최소한의 보다 근접한 지속가능을 위해서는 현 단계의 개발을 이루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녹색당과 NGO 환경단체들은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경제와 사회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이들은 종종 자신들의 심오한 결의와 관심사에 부응하지 못하고, 현재 논의되는 작업의 틀에 맞추어진 입장들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안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속 깊은 구석 가운데 삶과 진행방식이 모순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들은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간단한 수정차원 보다는 보다 과감한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자신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을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현재의 과정으로는 지속가능성의 요구가 성취될 수 없으며 어떠한 대안들도 추진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함 또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동력의 가동성은 이러한 분열된 의식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의 부정적인 결과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주의자들조차 이의 감소 조치들을 제안하는 데에 있어 주저할 수밖에 없는 판국이다. 대신 이들의 논의 초점은 가능한 수정방안으로 맞추어지는 데에 있다: 자동차의 과학기술 개선책, 가솔린 가격으로 현상경비의 내면화, 우송수단을 도로에서 철도로 대체하는 방안 등.
결과적으로 우리는 두 세계에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세계와 협력하여 조화로운 삶을 누리는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처해 있다. 시인들이나 영화제작자들 및 모든 지식층들은 이러한 주제들을 자신들의 소재로 담고 있다. 이들은 가슴속 깊이 인간의 고통의 흔적을 일깨어준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의 흐름을 보다 확고히 구축하며 강력한 추진력을 위한 결정들을 취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차원

우리 사회의 세계관은 왜 이다지도 유대관계를 서로 형성하여 무역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을까? 이와 다른 관점은 왜 이다지도 상상하기조차 힘들단 말인가?
첫째로, 진행과정은 역사적 발전의 실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속가능성은 새로운 조정국면을 상정하고 있는 반면 세계화 프로젝트는 이 역사 위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으로 무역을 확장시키는 것은 최근 몇 십년과 금세기의 경제 역사상 취해야 할 논리적 다음 단계로서 부상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발전양상이 현재로서는 성공의 황금면류관처럼 보여지고 있다. 최소한 선진화된 세계에서는 부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문제점들과 표면상으로 나타난 부자와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불평등이 극복될 수 없을 만큼 확산되고 있지만, 아주 극소수만이 부와 안위에 대하여 보다 초기단계로의 귀환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있는 판국이다. 과학과 첨단기술은 지식과 수용능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과학과 첨단기술 및 생산과 무역, 소비관계는 서로 매우 긴밀하게 얽혀있는 연고로 사회의 심각한 분열양상의 위기가 초래되지 않는 한, 이러한 진행과정은 변화될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더군다나 최근 몇 십년간의 역사는 반목의 두 체제에 의해 지배됐던 시기로서, 한편에서는 경제적 힘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옹호해왔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중앙의 통치체제를 수호해왔다. 그러나 동서 양쪽이 많은 분야에서 깊이 양분됐다고는 하지만, 사실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즉 경제적 성장을 통한 복지국가의 번영을 위해 전념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팽창을 이룸으로써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우위를 증명하려했던 것이다. 이들이 반목했던 최근 몇 십년간은 경제적 차원의 중요성이 보다 크게 부각됐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 통치체제의 몰락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몰락에 있었다. 드디어 자유체제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승리를 거둔 편에서는 인제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패턴을 제공해야할 과제를 떠맡게됐다. 과거에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사고의 패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인제는 서방체제가 세계의 기본방침으로 추진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어떻게 서방체제가 이 기회를 역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 모두는 중요하게 고려돼야 할 사안이지만 이들은 여직껏 온전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 시장의 비전 이면에는 서방세계의 역사에서 추진됐던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전제조건이 놓여있는 것이다. 이는 총체적으로 인간과 인류의 운명 및 소명에 대한 특수한 인식의 문제를 의미한다. 인류는 역사의 과정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존재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 지식과 수용능력이 확산됨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자연에 대한 주인으로 부상된 것이다. 한때는 자연에 의해 영원히 부과됐던 것처럼 보이던 굴레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졌던 것이다. 이들은 보다 많이 부를 획득했다. 시야의 세계를 점차적으로 넓혀갔다. 역사는 일직선의 진보가 아니듯이 실패와 대격변이 있기 마련이지만, 기본적인 인류의 소명의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상승된 진로를 향해 움직일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 인식은 다양한 뿌리를 갖고 형성된다. 르네상스가 출현되면서 이는 17세기에 있어 서구세계의 지배정신이 되었다. 일찍이 인간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되는 존재로서 취급됐었다. 인제 이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이 인간의 경제적 삶에 대해 생존과 연대적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고려했던 까닭에 증식된 부와 경쟁성에 대한 범주들이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자아확산과 밀착된 비전은 분명한 현실세계의 일치를 향해 인류애가 점차적으로 더불어 확산될 수 있다는 전망에 있다. 경계선이 무너질 것이다. 분단된 세계는 서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문화들은 대폭적인 교류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평화를 이루며 살아갈 세계에 대한 비전이 점점 더 중요하게 부상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는 새로운 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들의 세계적인 속성상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흉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충돌양상은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준비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방세계는 이러한 진보가 자신들의 개척자적 역할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자인한다. 과학과 첨단기술을 통해 이룩한 세력으로 서방세계는 새로운 세계를 출범시키기 위한 특수임무를 자신들이 부여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인류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자신들이 설정했던 지점을 향해 인류를 선도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으로 자처한다. 영국제국은 문화적 소명의식을 강조했지만, 후에 국가들의 경제적 발전양상으로 초점을 전환시켰다. 1946년 트루만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은 향후 몇 십년간의 정치적 행보에 반영될 프로그램으로 상정됐다.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국가들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위해 "저개발국가들"을 지휘 감독할 임무를 지녔으며, 따라서 국가들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에 교황의 칙서 Populorum progressio (1967)는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개념들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현재의 역사에서 약속된 땅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과연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의 열매가 역사적 사건에서 진정으로 숙성되고 있다고 보여줄 수 있을까? 과연 힘이 공유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는 국가로서의 공동체가 출현될 수 있을까? 임마누엘 칸트는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인류의 보편적인 "자연 법칙(plan of nature)"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주14. Immanuel Kant, 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urgerlicher Absicht, These 8.)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가 냉혹하게 계급없는 사회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이들 모든 기대치들은 역사의 "객관적" 인식을 근거로 하여 주장됐던 것들이다. 이에 대한 입증은 실현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지난 몇 십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실현될 수 없음이 확연해졌다. 역사의 반목으로부터 평화로운 세계로의 전이는 인간능력 밖의 일로 입증됐다고 하겠다. 가장 이타주의적인 메시아운동조차 집권세력과 대응세력간의 힘 겨루기 게임을 중단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메시아운동은 너무 안이하게 착취와 억압의 힘으로 분명히 전환되는 현상을 보여주는데, 이들은 주장된 바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명목으로 현 세대의 안녕에 대해서는 희생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자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고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모든 국가들을 포함시키는 발전의 개념이 형성되고 있으며, 새로운 프로젝트가 이 세계에 자유와 부를 가져오리라는 의미로서 부각되고 있다. 경계선을 초월해야 하며, 집중화된 교역행위는 새로운 유대관계를 창출할 것이며, 국가들 사이의 폭력들이 감소될 것이라는 등의 과거에 제기됐던 동기가 부활되고 있다고 하겠다.
1995년 11월 국제금융기구(IMF)의 사무총장 미셀 깡드슈는 로마카톨릭의 한 학술단체에서 미래의 "세계도시(global city)"에 관해 강연한바 있다. 그는 50년 전에 유엔과 브레튼 우두 체제가 설립된 것을 회상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의 비전이 구현될 수 있도록 이들이 새롭게 추진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두 개의 사건에 의해, 즉 베를린 장막 철폐와 세계화의 역동주의가 출현함에 따라 역사의 흐름이 변화됐다고 말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인류의 자유와 형제애에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즉 이들은 새로운 질서 - 모두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통합된 세계와 세계경제 체제 -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길목에 서있단 말인가? 깡드슈는 이에 대해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자연의 법칙(plan of nature)"도 "역사적인 객관적 과정"도 일깨우지 못했다. 그의 시각에서 펼쳐진 미래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택된 이 길에는 엄청난 약속들이 주어질 것으로 그는 믿고 있다. 모든 불확실성들에도 불구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볼 때 가치 있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이 프로젝트에 최대한 참여하도록 도덕적인 요구까지 동원하고 있다. 현재의 불안전한 상황이 결코 이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징조들은 세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해주는 시대적 조짐들이라는 내기에 모험을 걸도록 우리에게 요청한 것으로서, 이 내기에서 우리는 잃을 것이 전혀 없다. 단지 우리에게는 이 역동적인 흐름에 걸맞게 적절한 책무가 주어질 뿐이며 따라서 보다 우정어린 세계가 구현되도록 이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깡드슈가 객관적인 확실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기회와 위험적 사항에 관해서만 언급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열정은 희망이라는 절대사안에 의해 세계화 프로젝트를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신조에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다 나은 운명을 이루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의구심과 걱정을 반드시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것은 도덕적인 조건으로 설정된 것을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가 보기에 이를 거스르는 자들은 10세기경의 사람들에게 천년에는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고 예고했던 것과도 유사한 "커다란 두려움"의 존재로 대두된다. (주15. 사실 10세기에는 두 번째 밀레니엄과 관련하여 이와 다른 예외적인 공감대가 없었으며; "커다란 두려움" 자체는 물론 "어두운" 시대적 상징물로서 짐짓 정중하게 경시됐던 것을 알 수 있다; cf. Lukas Vischer, "Zwei Jahartausendwenden", In Theologie auf dem Weg in das dritte Jahrtausend, Gutersloh, Gutersloher Verl. -Haus, 1996, pp.69ff.)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주장들에 직면하여 가치규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단계의 후퇴로 해석될 수 있을 뿐이며, 지역 공동체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인류의 소명에 위배되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다. 향후의 참된 전망은 오로지 세계화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증언

이러한 논의 가운데 교회들이 과연 인류의 소명에 대한 다른 입장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경고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교회들의 사고가 과연 이에 대한 대책을 표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사실 교회들은 인류의 통합을 가장 크게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 비전에 대해 공감한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이들은 혹시 이러한 비전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추진세력으로까지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객관적 현실이 이와 다를 바가 없는 정황으로 전개되고 있는 양상에 대해 우리는 이를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기독교 교회들의 메시지는 전 인류의 지평선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간이 되셨다.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이의 목적과 성취를 구현시킨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결정적인 순간이 모든 민족들에게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들 모두에게 부여된 것이다. "기뻐하라 이방인이여,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거듭 주님을 찬양하라 모든 이방인들이여,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이 주님을 찬양케 하라"(로마서 15:10-11). 사도들의 설교가 전 오이쿠메네를 향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선포되고 있다. 이의 목적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만인이 찬양의 삶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이 운동은 엄청난 역동주의를 보여준다. 경계선들이 초월된다. 장벽들이 새로운 교류를 이루기 위해 철폐된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복된 소식의 선포 결과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성전의 살아있는 주춧돌이 된다.
이러한 기독교적 비전의 관계성이 사실 민족들의 역사로 하여금 점점 더 하나의 유일한 인류의 역사로 통합시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러한 역사적 발전양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지평선이 확장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꾸준히 축소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과연 교회들이 지닌 역할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기독교적 관점들이 이러한 발전의 추진력으로 작용되어오고 있다는 데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류의 통합"이 출현되는 양상은 교회들에 대한 만만찮은 도전으로 부각됐다. 인제 교회는 자체적인 참된 본질의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다. 교회의 신조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인 사도의 교회"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발전양상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위해 새롭게 추구된 표현방식을 부여하기 위한 계기라고 밖에 볼 수 없단 말인가? 선교사와 후기 에큐메니컬 운동들은 여러 동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모두는 인류의 상호의존성을 확산시키는 역사적 발전에 대한 일부의 대응 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새로운 지평선에 직면하여, 국가들의 상호작용에서부터 분출된 충돌양상에 직면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주의의 영향력 확립에 직면하여 교회들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국가적 경계선 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보다 넓은 공동체로의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회와 인류의 관계성에 대해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에는 다른 답변이 주어질 수 있으며 줄곧 이같이 이루어져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주16. 교회의 하나됨과 지금까지 확산된 인류의 상호의존성 간의 관계성에 대한 문제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컬운동의 주제로서 다루어져왔다. 이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있어서 WCC에 의해 광범위하게 설정됐던 기본적인 연구작업의 주제였다. Cf. Gert Ruppell, Einheit ist unteilbar: Die Menschheit und ihr Einheit als Thema der okommenischen Bewegung, Rothenburg, Eemst Lange Institute, 1992.)
교회는 자칫 인류의 센터로 자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복음의 선포는 민족들을 위한 모델이 되도록, 영감의 근원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는 완벽한 사회 (societas perfecta)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공동체의 실존을 도래시킨다. 교회는 있는 그 자체의 본연으로서 민족들이 이루어내야 할 공동체에 대해 예기한다. 따라서 이의 증거는 - 이의 실존과 말씀을 통한 - 참된 교류의 근원을 지시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인간공동체의 이탈을 비난할 것이며, 이의 분명한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자아인식은 특히 로마카톨릭교회의 경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한편, 에큐메니컬 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로서 전개되어왔다. 대주교 오타비아니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미국 방문 길에서 돌아왔을 때, 교황은 교회가 "모든 민족 공동체의 영혼"으로 고려돼야 할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에 대한 간명함을 보여주었다.
보다 긴밀한 재검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들은 지속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교회는 완벽한 사회를 이루는 것과 무관하게 분열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교회의 존재와 이의 증거들은 세계를 분열시키는 충돌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세계화의 과정을 지배하며 이를 결정짓는 추진력으로 밝혀진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스스로가 단순하게 이를 "영성"과 관련지움으로써, 이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고를 피력하기 위한 환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현 사회의 프로젝트가 발산된 서구세계는 사실 기독교 전통에 의해 형성됐으며, 이를 결정짓는 메시아적 차원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는 기독교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표명은 따라서 근본적인 자아비평을 기본으로 설정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의 전환 및 새로운 출발의 작업들이 요구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교회는 서구적 발단과 동일시되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전세계적 일치를 향한 다른 운동들의 업적을 평가하기 위한 방법론의 제기에서부터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교회는 국가들 사이의 보다 긴밀한 유대관계를 향한 발전에 있어서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교회는 다른 세력들과 더불어 보다 확충된 발전의 세계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종교와 일반 세속 공동체 모두가 각자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도전양상들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도록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2천년의 경축행사는 필경 기독교의 주장들과 이들 모두를 초월한 당위성에 관해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됨은 교회 단독에 의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은 교회라는 공간이 결코 권력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희생자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현 추세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복음을 실천하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대가를 당연히 치르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한다. 지난 몇 십년간에 걸쳐 교회들은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는 대중들과 더불어 새로운 연대의 형태를 점진적으로 이루어왔다. 점차적으로 이들은 충돌양상에 대해 대화와 평화 및 중재를 요청하기 위한 자신들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희생자들을 위한 목소리와 저항운동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도 노력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들은 특수한 관심사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안에도 불구하고, 민족들 사이의 하나됨을 성숙시키는 정당성과 타당성의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의와 평등을 위한 조건들의 확보 차원에서만 논의들이 극단적으로 집중됐던 것이다. 교회들은 전세계적인 공동체에게 보다 자애로운 모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폭력과 불의와 억압에 반대하며, 연대와 평화 및 정의 등의 가치들을 조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전양상들은 새로운 문제를 부각시킨다. 현재까지 인류의 불가피한 운명으로 고려되어왔던 하나됨을 향한 발전과정에 대해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된 것이다. 사실 이미 교회와 인류의 일치에 관한 WCC의 연구과제로 설정된 1968년의 첫 논문작업들 가운데 하나를 보면, 이는 분명 새로운 절정을 위한 단계로의 표방이 아닌 "자아파괴의 길로서...., 진보가 아닌, 필경 어딘가에 이미 붕괴되어 있는 교량들을 향한 불확실성에 대해 오히려 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상호독립을 확산시키기 위한 대등한 발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는 이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자아파괴의 지속가능성이 가면 갈수록 배제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진보를 굳게 믿었던 계몽주의 철학자 Marquis N.C. Condorcet(1743-94)는 우리가 반목의 상황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우리가 거하는 이 지구의 일시적인 실존에 있어서, 한계만 보여주는 진보는 자연에 의해 좌우된다." 그가 말하려했던 것은 실질적으로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사실 그가 보여주었던 한계란 오늘날에 있어 점점 더 명확히 대두되고 있다. 지구의 실존이 바로 위협 자체가 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인류에게 안전한 거주지를 제공하는 이의 능력은 보장할 수 없게 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개발의 발전을 수정하는 차원이 아닌, 이의 한계가 존중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어떻게 관계를 수립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보로 여겨오던 것이 인제는 미래의 위협으로 대두된 것이다.
교회들은 이러한 측면을 옹호하는 중심세력에서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교회들의 증거는 현재까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틀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교회가 여러 측면에서 비판적이라 할 지라도, 자신들의 비판에서조차 이의 전제조건들에 대해서는 공감했던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관점들의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들 내의 진정한 논의는 아직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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