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특파원리포트] 아버지의 집착이 빚은 참극 (한겨레, 6/25)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7-12 23:44
조회
524
**[특파원리포트] 아버지의 집착이 빚은 참극 (한겨레, 6/25)

독일 월드컵 조별 리그가 한창이던 지난 20일 일본 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한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현 다와라모토초에서 일어난 16살 고교 1년생의 방화 살인이다. 소년은 새벽녘에 자신의 집에 불을 질렀고, 아무 것도 모른 채 2층에서 잠을 자던 어머니(38)와 7살, 5살 두 동생은 화재에 따른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경찰조사에서, 소년은 1층 부엌에서 라이터로 수건에 불을 붙인 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쓰레기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불은 삽시간에 집 전체로 번졌다. 소년은 그대로 집을 빠져나갔다. 근처 역으로 걸어가 전철을 타고 교토까지 갔다. 그 일대를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22일 새벽 한 가정집에 들어가 잠을 자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잡혔다. 날짜를 하루 착각해, 일본과 브라질의 축구 경기를 보려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피곤에 못이겨 그대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소년의 아버지(47)는 종합병원 비뇨기과 부장이다. 어머니도 의사로, 집 근처 노인개호시설에서 일했다. 친어머니는 아니다. 아버지가 9년 전에 이혼한 뒤 직장에서 알게 된 지금의 어머니와 재혼했다. 그렇지만 주변에선 친어머니나 다름없이 보일 만큼 소년과 관계가 좋았고, 소년 또한 동생들을 잘 돌봤다고 한다.

소년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소년의 한 초등학교 친구는 “머리가 좋고, 공도 잘 차고, 명랑하고 농담도 잘했다”고 회상했다. 그 동네 학원에선 초등학교 4학년 때 5학년반에 섞여 공부를 할 정도였다. 공부도 열심히 해, 교토·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긴키지역 굴지의 사립 중고일관교에 합격했다. 이 학교는 명문 도쿄대와 교토대 등에 해마다 몇십명의 합격자를 내는 학교다.

(일본의 사립중학교는 입시가 기본이다. 명문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입시학원을 다니며 중입 대비 수험생활을 시작한다. 진학 중심의 사립학교에는 중고 과정을 한꺼번에 두는 일관교가 많다. 중학교 입시에 합격하면 고교까지 6년을 다니며 대학 진학을 준비하게 된다. 때문에 일본에선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 진로가 크게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문집에 아버지와 같은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적었다.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집안 분위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소년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유명 사립 중고교를 다녔다. 소년이 중학교 때 검도를 배운 것도 아버지를 본받은 것이다. 소년은 검도 2단이다.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매우 열심이고, 상당히 엄격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학교 수험시절부터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소년을 심하게 야단쳤고,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1층에 있는 소년의 공부방에서 맨투맨식 지도를 했다. 이 공부방을 병원의 집중치료실(ICU)에 빗대 ‘집중공부방’으로 불렀다고 한다. 소년은 성적이 떨어지면 곧바로 얻어맞았다고 말했다.

소년의 최근 성적은 전체 200명 가운데 중간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 성적부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소년은 점점 게임에 빠져들었다. 어머니가 “게임만 하고 있다. 뭣 때문에 진학학교에 갔는지 모르겠다”고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구타를 동반한 강압적 교육에 대한 소년의 증오가 마침내 폭발했다. 이번 사건이 나기 며칠 전 소년은 아버지를 죽이려는 시도를 했다. 소년은 경찰에서 “한밤에 흉기를 들고 아버지의 침실 앞까지 갔으나, 아버지가 눈치채 그만뒀다”고 말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중간고사에서 영어시험을 잘 봤다고 거짓말을 해놓은 터여서 탄로날까 마음을 졸이던 상태였다.

사건이 발생한 20일은 학부모회가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기로 돼 있었다.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극도의 초조함이 가족 3명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범행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소년은 “엄하게 설교하고 때리는 아버지가 미웠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선, 아버지가 없을 때 자신의 생활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불만이 컸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건 당일 당직근무를 하느라 집을 비워 죽음은 면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자녀를 모두 잃었다. 살인범이 된 맏아들을 포함해. 유복한 가정을 처참하게 무너뜨린 주범은 맏이에 대한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집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을 꼼꼼히 챙겨보게 된 것은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아버지들이 한국에도 많기 때문이다. 나 또한 큰 애를 맨투맨식으로 가르칠 때도 있고, 큰 애에 대해선 유독 엄격하다.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