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나는 2등 시민이 아니다” 인도 시각장애인의 승리 (한겨레, 6/1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28 23:42
조회
537
인도 북동부 아삼주에서 구호단체를 운영하는 프라사나 쿠마 핀차(사진)는 올해 초 사무실 근처에 있는 은행에 계좌를 만들러 갔다가 푸대접을 받았다. 은행은 그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라며 계좌 개설을 거부했다. 핀차는 “장애가 나를 2등 시민으로 만들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지만 허사였다. 영국 〈비비시 방송〉이 6일 소개한, 그의 끈질긴 권리찾기 싸움의 시작이었다.
핀차의 항변은 곧 현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은행은 마지못해 핀차의 계좌 개설을 허락했다. 하지만 은행의 괄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행은 핀차에게 서명이 위조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동의서를 써야만 수표를 쓸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핀차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동의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럴 필요가 없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은행은 완강했다. “파렴치한 이들이 서명을 위조해 시각장애인의 수표를 함부로 이용하는 것을 막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며 고집을 부렸다. 핀차는 “앞을 볼 수 있어도 서명이 위조될 위험은 있다”며 “시각장애와 서명 위조 가능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맞받았다. 참다 못한 핀차는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은행 변호인단은 “2005년 9월 정부 장애위원회가 시각장애인에 대해선 수표를 쓰기 전에 서명이 위조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동의서를 반드시 받으라는 규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 규정에는 전화·전기 요금 납부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만 시각장애인에게 지문을 찍은 수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인도은행연합회가 제시한 규정에도 문맹인이나 시각장애인에게는 일반적으로 수표책을 발행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핀차는 “1995년 만든 장애인 평등법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계좌 개설이 제한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고 맞섰다. 그는 특히 “장애위원회의 규정은 모든 시각장애인들이 서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문 날인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차별적 규정”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법원은 핀차의 탄원을 받아들여 핀차에게 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계좌를 개설해주라고 은행에 지시했다.

법원은 다음 심리에선 장애위원회가 만든 규정의 적법성을 검토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인도 시각장애인들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의 시각장애인 수는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보건기구의 2004년 집계를 보면,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은 전세계에서 3700만명으로 추산된다.

요즘 핀차는 또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보험회사가 시각장애인에게 다칠 위험이 더 높다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요구하는 현실을 바로잡을 계획이다. 핀차는 〈비비시〉와 인터뷰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자신의 투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싸움에서 이겼을 뿐입니다.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