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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1938년, 살육의 한복판에서 난 태어났다 (경향, 4/2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2 23:19
조회
607
**[와다하루키회고록] 1938년, 살육의 한복판에서 난 태어났다 (경향, 4/21)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 ①

지난 주 47회로 끝난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에 이어 일본의 저명한 역사가 와다 하루키(68) 도쿄대 명예교수의 회고록을 싣습니다. 러시아사와 한반도사 전문인 와다 교수는 남북한 모두에 정통한 연구자로 한국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연대하는 등 일본에서 흔치않은 한국통이기도 합니다. 격주로 연재될 와다 교수의 회고록은 주로 한-일관계 또는 한반도와 관련된 일에 초점을 맞출 예정인데, 한-일 현대사를 한층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 많은 새 시사점들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1. 고향마을 시미즈

나는 애초 러시아사 전문가로 출발했다. 그런데 1985년부터는 조선사(한반도사) 연구를 내 전문분야로 추가했다. 그렇게 된 건 1974년부터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하고 한-일관계를 바로잡겠다는 시민운동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게 한국, 조선(북한)은 러시아와 함께 큰 관심대상이고, 이들 나라와의 관계를 인간적으로 맺고 싶다는 게 내 평생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런 내가 한국, 조선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부터 한번 돌아보고자 한다.

나는 1938년 1월13일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사립 공업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업고 난징함락 축하 제등행렬에 참가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난징함락은 그 전년도 12월의 일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억은 잘못돼 있다. 아마 어머니는 산달이 가까운 큰 배를 안고 12월11일 오사카 거리를 가득 매운 ‘축 난징함락 항일 본거지 박멸’ 시민 축하 제등행렬을 구경했을 것이다.

그때는 어머니도, 그리고 총후(후방) 일본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일본군이 입성한 난징에서는 학살이 자행됐다. 많은 포로들이 살해당하고 허다한 여성들이 능욕당했다. 나는 실로 침략과 살륙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나중에 나는 내가 난징에서 살해당한 중국인 아기 대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내가 한살 반이 됐을 무렵 어머니는 폐병을 앓은 적 있는 아버지한테서 균이 옮았는지 폐첨염증이 생겨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다. 1939년 8월 어머니와 나는 오다와라의 어머니 친정에 맡겨졌다. 다행히 어머니는 1년이 지나지 않아 회복됐고, 다음해 5월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새 근무지인 도야마로 갔다. 일본해(동해)에 면한 도야마는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1945년 천왕이 항복했을 때 첫느낌은 공습의 공포에서 해방됐다는 안도감.
군국소년이던 나도 전쟁그림을 그만뒀다.
당당하게 무기를 버렸다는 패망 일본의 정서 어디에도 가해의식은 없었다.
난징학살 다음해 태어난 나는 살해당한 중국 아기가 아닐까 가끔씩 생가했다.

그러나 내가 도야마에서 겨울을 보낸 것은 한번 뿐이다. 1941년 10월 아버지는 새 임지 시미즈시로 옮겨갔다. 시미즈는 태평양 연안에 있는 시즈오카현 중부의 항만도시다. 후지산이 잘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 온난한 기후다. 거기서 유치원에 들어갔고 소학교에도 갔다. 그리고 고교 졸업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따라서 시미즈는 내 고향마을이다.

우리 일가가 시미즈로 옮아간 지 2개월 뒤 일본은 미국 영국에 선전을 포고했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1944년 국민학교에 들어간 나는 군인과 무사, 전쟁 그림만 그리는 군국아동이었다.

시미즈시에는 항구 가까이에 알루미늄 공장이 있고 조선소도 많고 무기공장도 있었다. 당연히 미군 공습의 주요대상이었다. 1945년 7월6일부터 7일까지 이틀에 걸쳐 시미즈시는 밤에 미군 폭격기 B-29의 대공습을 받아 시 전체의 52%가 불탔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139기가 공습에 나서 소이탄 1만4997발, 1029t을 투하했다. 307명이 죽었고, 353명이 중상을 입었다. 부모님과 나는 집 뒤 자그마한 정원에 파 놓은 방공호속에서 이 폭격을 견뎌냈다. 집도 불타지 않아 우리는 무사했다.

미군기는 완전히 일본 본토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날아와 거침없이 폭탄을 투하하고는 사라졌다. 일본의 도시와 국민 주거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방치됐고 국민의 재산과 기억이 하나하나 불타 사라져갔다. 군이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국민속에 자라난 것은 군에 대한 깊은 불신이었다.
그리하여 8월15일 천황의 방송으로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느낀 것은 공습의 공포에서 해방됐다는 안도감이었고, 전쟁을 중단한 천황에 대한 감사였다.

전쟁이 끝나자 나도 변했다. 전쟁 그림 그리기를 그쳤을 뿐 아니라 아예 그림 그리기 자체를 그만둬버렸다. 뭔가 내 속에서 작은 게 부서져내린 듯했다. 그때까지는 1, 2학년용 잡지 <착한 어린이의 벗>을 사 보고 있었는데 졸지에 그것을 중단하고 10월에 나온 <소년구락부> 8·9월 합병호를 사 보게 됐다.

그때의 잡지 중심기사는 사토 이치에이의 ‘새 일본의 아침을 맞아-도쿄의 아버지가 피난지의 아들에게’였다. 사토는 전쟁을 찬미한 시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패전 뒤 어린이들에게 얘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그는 천황의 칙어에 있는 ‘평화국가의 확립’이라는 말을 해설했을 것이다. 그는 ‘성인(聖人)의 길’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었다.

“이 성인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싸움에서 졌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을 깊이 되돌아보고 있다. 지로야, 멀지않아 세계의 사람들도 무기를 반납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할 수 있게 되는거야. 지로야, 생각해보면 이것은 즐거운 대사업이 아니냐. 일본은 당당하게 무기를 버렸다. 무기는 필요없다. 그대신 ‘성인의 길’을 곧바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무기가 필요 없다는 걸 알리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부터는 무기를 버리고 살아가야겠다는 기분은 전쟁에 진 일본인의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군대가 다른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고 그 결과 자기나라가 공습을 받아 초토화한 것이다. 군대는 아무 소용 없다. 여기엔 일본국가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고,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 침략을 확대하고, 동남아시아를 침공한 사실에 대한 책임, 가해의식은 없다. 그 결락을 안고 있으면서도 군대를 부정하는 일이 일본인의 전후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나는 1950년 4월 시즈오카대학 교육학부 부속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엘리트학교에 들어가서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지 입학식을 한 지 열흘 정도 지나 발 골절 부상을 당했다. 점심 쉬는 시간에 교정 구석에 있던 롤러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놀이를 같은 반 아이들이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끼어들었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 결과 나는 1학기에 2개월 반이나 결석하게 됐다.

마침내 학교에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 무렵인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낮 뉴스도 들었을 것이고 다음날 아침 신문도 크게 주목했을 텐데도 나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전쟁은 일본인에게 기묘한 전쟁이었다. 미군 B-29는 요코다와 오키나와에서 연일 날아올라 북조선(북한) 도시들을 폭격했다. 해상보안청도 국철도 적십자도 전쟁에 휘말렸으나 일반국민에게는 전쟁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허리까지 잠기는 시즈오카 성 해자에 들어가 뭔가를 건져올리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봤는데, 그것은 ‘조선(전쟁) 특수’로 광산경기가 불어닥쳐 고철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우리들 눈에 비친 한국전쟁의 유일한 그림자였다.
내 고향 시미즈에는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 그중 잊을 수 없는 두 사람.
70년대 포철 이사로 영입됐다 북한 간첩 혐의로 체포된 김철우와 68년
여관 인질극으로 재일조선인 문제 제기한 김희로…상상을 초월한 그들의 인생역정이란!

시미즈에는 조선인이 적지 않았다. 이 무렵 시미즈에 살았던 조선인 중에 나중에 유명하게 된 두 사람을 알고 있다. 두 사람의 인생은 상상을 절하는 고난의 역사였다.

김철우와 김희로는 각각 1926년과 27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나 시미즈시 소학교에 들어갔다. 김철우는 소학교 졸업 뒤 직장을 전전하다 만주에도 건너갔고, 교토 근처와 홋카이도 공사장에서도 일했으나 시미즈에 돌아와 막일꾼을 하면서 야간중학에 들어가 전쟁 말기에 졸업했다. 전후에는 도쿄로 가 일하면서 도쿄공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남동생 셋, 여동생 둘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사후 어머니가 도붓장사, 행상을 하며 필사적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5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시즈오카현 한국거류민단 단장의 딸과 결혼해 57년부터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리고 60년대 말에는 한국 포항제철소 이사로 영입됐다. 고난 끝에 얻은 성공이었으나 거기서 70년대에 북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홋카이도대학 조교수였던 동생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고 복역하게 됐다.

김희로는 소학교를 3년만에 중퇴하고 폐품수집을 하고 있던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으나 이윽고 자신이 일터로 나섰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도쿄 고아가쿠인(흥아학원)이라는 소년원에 수용돼 있었다. 종전과 함께 그곳을 나와 가케가와로 이사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그는 전후에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살았다. 1968년 시미즈의 캬바레에서 폭력단원을 사살하고 여관에서 인질극을 벌였다. 그 사건은 재일조선인의 마음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기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내 동향인, 동시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중학생 시절 내가 만난 유일한 조선인은 당시 교외에 살고 있던 우리 집에서 시미즈 시내 폐품수집을 하던 할머니였다. 언제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할머니한테서 조선 우표를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독립문을 그린 조선우표와 조선인삼을 그린 대한민국우표를 주었다. 우표에 씌어진 한글을 읽을 수 없어 조선우표가 대한민국우표가 된 까닭을 알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