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설움 자해하며 삭여… 남은 인생 ‘혼혈 인권’에 바치고파 (한겨레, 4/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09
조회
423
**설움 자해하며 삭여… 남은 인생 ‘혼혈 인권’에 바치고파 (한겨레, 4/7)

[혼혈,이젠웃을래요] (2) 좌절딛고 다시서는 오죠디
오죠디(43)씨. 온몸이 상처로 일그러져 있다.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제 손목을 긋고 제 배를 그었다. 자살도 시도했다.

누군가는 오늘도 무심코 이렇게 부를지 모른다. ‘튀기’. 실은 살인까지 부르는 무서운 편견의 외마디다. 실제로 안아무개(46)씨는 1997년 자신을 ‘튀기’라고 놀리는 사람을 살해하기도 했다. 오씨는 ‘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분노에 휩싸일 때마다 그는 자기 몸을 그어댔다. 손목에만도 20여개의 칼자국이 두렁처럼 돋아 있다.

그는 단호했다. “절대 결혼 안 하고 자식도 안 가질 겁니다.” 사랑했던 사람도 그를 떠났다. “상처가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데, 앞으로 또 떠난다 해도 어쩔 수 없지요.”

1963년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초등학교 때다. 의정부를 떠나 충남 아산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단란하게 살던 때였다. 선생님은 친구들과 똑같은 말썽을 부려도 그에게 유독 엄격했다. “근본이 없다”고도 말했다. 친구들도 ‘양놈’이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600여명 전교생 가운데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였던 그는 결국 싸움꾼이 됐다.

오씨는 영어를 잘했다. 1980년 중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가 있던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남짓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다른 영어 실력도 이 땅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는 못했다. 미국 고교를 중퇴하고 돌아온 그는 여러 무역업체에 지원했지만 면접도 보지 못했다. 장기 부사관도 지원했지만 거부당했다. “신체검사는 받을 필요도 없다며 돌려세우더라고요.” 결국 그는 떠밀리듯 유흥업소의 디제이가 됐다.

세상은 지겹게 시비를 걸어왔다. 한푼 두푼 모은 자금으로 연천에 민박집을 운영했지만 1999년 대홍수가 통째로 삼켰다. 마약에 손을 댔고, 2001년 자수했다. “정말 잘 참고 살았는데, 유치장에서 누군가 어머니를 놀리더라고요.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훈방 예정이던 그는 다른 수감자를 때리고 말리던 경찰관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죄가 더해지며 2년10개월을 갇히고 말았다.

한국 사회가 그에게 준 신분증은 주민등록증이 유일하다. 병역의무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2004년 출소 뒤 그는 더는 제 몸을 흠집내지 않는다고 했다.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사회를 원망하거나 사회로부터 도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했다.

“이제 혼혈인의 인권 신장 운동에만 남은 평생을 쏟고 싶다”는 오씨는 미국으로 다시 갈 생각도 완전히 접었다. “어머니가 한국에선 사는 게 힘들다며 절실히 원했지만, 돌아가지 않았어요. 여기가 바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시던 제 고향이잖아요. 상처를 준 곳도 여기지만 날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는 곳도 여깁니다.”

국제가족한국총연합에서 일하며, 오재경으로도 불리는 그가 ‘고향’에 묻힐 때쯤 장기는 이웃에게 돌아간다. 장기기증 카드까지 치면 오씨의 신분증은 그래서 두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