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하급무사가 ‘정한론자’ 되기까지 (한겨레, 3/24)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00
조회
577
**하급무사가 ‘정한론자’ 되기까지 (한겨레, 3/24)

일제 ‘대동아공영권’과 뿌리가 닿아 있는 ‘탈아입구’론의 주창자이자 근대 일본 성공신화의 설계자, 일본 최고액 지폐 1만엔권을 장식한 얼굴의 주인공, 게이오대학(경응의숙) 설립자,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문명·개화·연설·경쟁·저작권 등의 서양말 번역어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 1884년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배후조종자(?)’. 골수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福澤諭吉)와 관련한 얘기들은 오래전부터 끝없이 인용되고 변주돼 왔다. 선구적인 계몽사상가로서의 고정적 이미지를 창출한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 <서양사정> 등 그가 쓴 책이나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 기사들도 적지않게 소개됐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인간인지, 그가 쏟아낸, 동아시아 근현대를 ‘창조’한 위력적인 담론들의 모태라 할 그의 내면세계와 성장배경 등을 제대로 알려주는 정보를 이땅에서 접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 펴냄)은 그가 누구인지, 어떤 시대배경과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말년에 자기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바로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원제 <복옹자전(福翁自傳)>의 이 책이 나온 것은 그의 나이 64살 때인 1899년(메이지 32년). 속기사에게 대필시키기 위해 그가 내용을 구술한 것은 그 2년 전이었다. 그가 뇌출혈 재발로 영면한 것이 1901년 66살 때였으니 그야말로 인생 최종정리라 봐도 되겠다.

후쿠자와는 오사카 나카쓰 번(지금의 규슈 오이타 현)의 가난한 하급무사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오사카에 있던 나카쓰 번 구라야시키 파견 회계담당이었는데 그가 두살 때 뇌출혈로 사망했다. 구라야시키는 나카쓰 번이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품 따위를 내다 팔기 위해 오사카에 설치한 현지 출장소 같은 곳이었다. 그가 태어난 1830년대는 도쿠가와 바쿠후(막부) 말기의 어려운 시대로 지방 하급무사들은 빈민과 다름없는 처지였는데, 고향에 돌아가 편모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후쿠자와의 인생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얼마나 곤궁한 가운데 시작됐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사실 자서전은 이런 출신배경이 그의 인생항로 선택에 결정인자로 작용했음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사족 사이의 문벌제도가 매우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단순히 번의 공적인 문제와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교제에서 아이들의 놀이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의 구별이 있어, 상급사족의 자제와 나 같은 하급사족이 서로에게 사용하는 말투가 달랐다. …단순히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아이들 놀이에서도 항상 문벌이라는 것을 가지고 말도 못하게 으스댔으니, 어린 마음에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렵은 봉건시대여서 일본 전국 어디서나 번의 제도는 수구 일변도였으므로 번사 각각의 신분이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상급사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는 부모도 상급사족이고 자식도 상급사족이었으며, 100년이 지나도 그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 하급사족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자연히 상급사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각자의 소질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상급사족은 하급사족을 깔보는 풍조가 일반적이니, 나는 소년시절부터 그게 너무나도 불만스러웠다.”

지방 번의 관례나 요구를 거부하고 일찍부터 나가사키, 오사카, 에도(도쿄) 등지로 떠돌며 난학(네덜란드어)과 영학(영어) 공부, 그리고 그를 통한 서양문물 익히기에 그토록 집착하고,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과 성실, 엄격한 자기관리로 일관한 것은 그런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으로 읽힌다. 그의 그런 선택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도래가 상징하는 서구의 충격에 휩쓸리면서 압축형 ‘서구화’ ‘서구형 근대화’로 요약할 수 있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치닫던 격변기 일본 상황과 맞아떨어져 하급사족 출신인 그가 막부 외무성 관리가 되고 메이지 시대 저명한 민권론자, 민주주의자, 합리주의자, 여성해방론자, 교육자, 언론인, 사상가로 설 수 있는 절묘한 찬스를 제공했다. 책은 그가 남다른 노력을 통해 어떻게 그런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성장하고 관리했는지 어릴 때부터의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일본적 성실성’의 전형이며,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그가 역사적 인물 가운데 여전히 일본 최고의 인기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의 기막힌 성공담이 절묘한 근대 일본 성공담의 축약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후쿠자와 인생행로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규정적인 키워드가 ‘부국강병’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뜻하는 바는 주쿠(경응의숙)에 소년들을 모아서 원서를 읽히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폐쇄적인 일본을 개방시켜 서양류의 문명을 불러들이고, 부국강병을 통해 일본이 세계 각국에 뒤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 서구 제국주의국가를 모방하는 ‘서양화’와 거의 동의어로 거듭 강조되는 그의 ‘부국강병’론은 ‘봉건 일본’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며, 그것은 곧 신분제에 묶여 절망하던 하급무사 출신 후쿠자와 개인의 강렬한 해방욕구와 겹친다.

이 책에는 ‘조선인’에 대한 언급이 딱 3번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매우 부정적인 문맥속에서다. “의리고 체면이고 없는 그 모습은 지금의 조선인이 돈을 탐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가 조선·중국을 극도로 폄훼하고 골수 민족주의·국가주의로 기울면서 “살아 있다 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라며 일제의 청일전쟁 승리에 감격하고 조선침략을 외치는 전형적 제국주의자로 변해간 것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서양 제국주의 모방형 ‘부국강병’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후쿠자와가 유능하고 ‘양심적’이며 뛰어난 일본 애국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웃나라들에겐 불행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는 모순이 근현대 동아시아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