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악, 누구냐 너는? (한겨레, 3/24)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00
조회
432
**악, 누구냐 너는? (한겨레, 3/24)

아우슈비츠, 캄보디아, 보스니아, 이라크…. 잇단 전쟁과 대량살륙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 뒤에 어른거리는 악과 악마와 대면해야 한다.
<악의 역사>(르네상스 펴냄)의 지은이가 20여 년에 걸쳐 ‘악’의 뿌리를 천착한 이유이고 현대인에게 자칫 공허할 수 있는 악마 이야기가 일면 엄숙하게 들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고대로부터 초기 기독교,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학, 철학, 문학, 미술, 대중예술을 아울러 두꺼운 먼지를 훌훌 털어내 악(악마)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악(악마) 자체가 아니라 악(악마)에 대한 인식의 역사다.

“악마는 하나의 피조물이다. 악마는 신에 의해 비로소 악마 구실을 한다. 악마는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 이 세상의 물질과 육체를 지배하고 선한 하나님에 대적하는 전쟁을 끊임없이 벌인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선한 하나님한테 패배한다.” 신약시대 이래 굳어진 기독교의 악마관이다.

여기에는 고대로부터의 유산이 녹아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한 신-악한 신, 빛의 신-어둠의 신. 그리고 그리스의 영혼-물질 이원론이 그것.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유일신화 하면서 악의 존재로부터 면책시킬 필요가 생겼다. 타협점이 동급의 악한 신을 하나님이 피조물로 격하시킨 것. 하여 악마는 유다의 존재처럼 신의 그림자인 동시에 대부분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편리한 존재가 되었다.

개별적 종말론이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장된 것도 종교 간의 습합 탓이라고 본다. 본디 세상의 종말을 가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이원론이 끼어들면서 선한 영과 악한 영 사이의 싸움에서 한쪽은 승리하고 다른 한쪽은 멸망하게 되면서 절정의 설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중세의 악마는 날카로운 발톱, 갈라진 발, 덥수룩한 털, 거대한 남근, 날개, 뿔, 꼬리를 가진 염소 비슷한 모양인데, 이 가운데 동물 모양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날개와 뿔, 갈퀴는 신화로부터 물려받았다.

지하세계가 징벌의 장소로 정착된 데는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 신화의 영향이 크다.

“악마는 존재할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유가 존재했다. 나는 악마가 존재하는지 확신하지는 못하며, 존재한다면 어떤 존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악의 인격화, 악의 원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악(악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악마한테 악을 전가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개별적인 책임이나 부당한 제도·법·고통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간과할 수 있다. 반면 존재하는 악을 조정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지은이는 ‘악마’에게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더 위대한 선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한다.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악마의 개념을 연구할 뿐”이라는 지은이의 객관성 강조는 그가 기독교적인 자리에 서 있음을 분명하게 할 뿐이다. 학자는 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믿지 않지만 신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러므로 저서의 내용과 저술작업 자체가 신앙고백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악과 악마를 줄줄이 꿴 이면에 선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듯하다.

“신은 절대 선이다. 그러나 신의 선은 우리가 이해하는 정도의 그런 선은 아니다. 신은 우리의 언어(의식)에 포착되는 그런 악이 존재하는 우주를 창조했다. 따라서 악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