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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주세요 언제까지나” -캄보디아 고아소녀 삐찌싸의 서울살이 1년 (한겨레, 6/1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28 23:43
조회
1167
**“내 손을 잡아주세요 언제까지나” -캄보디아 고아소녀 삐찌싸의 서울살이 1년 (한겨레, 6/13)

두 사람은 헤어져야할 시간을 넘긴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병원과 언어치료실을 함께 오갈 때는 물론이고 숙소인 맑음터(장애인재활센터)에 돌아와서도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됐다.

오랜 이별을 앞둔 것도 아니고 며칠만 지나면 또 만날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그 가벼운 헤어짐 조차 쉽지가 않다.
“또 올께. 응?”
“아우~ 아우우!”

삐찌싸(6)는 임신자(34)씨의 손을 꼭 잡은 채 도리질을 했다. 대신 임씨의 손을 잡고 끌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달래주기를 여러 차례. 이미 돌아갈 시간을 놓친 임씨는 울먹거리는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옆에서 지켜보던 맑음터의 김미경 사회복지사가 그의 맘고생을 덜어주려고 “밥먹으러 가자”며 아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순간 삐찌싸의 그렁그렁했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볼 텐데 왜 울어? 응?”
김 복지사가 아이를 안고 달래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임씨를 향해 손을 뻗으며 울부짖는 삐찌싸의 울음소리는 오히려 커져만 갔다. 결국 두 사람의 손이 다시 맞닿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왜 그리 헤어지기 힘들어하는 것일까. 곧 다시 올텐데, 겨우 며칠만 떨어져 있을 뿐인데. 보채는 아이를 떼놓고 돌아서는 게 저리도 힘든 임씨와 까무잡잡한 피부의 삐찌싸. 지난달 5월23일 늦은 오후 서울의 한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의 모습은 그랬다.

삐찌싸의 인공달팽이관 수술에서 재활까지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을 하루 앞둔 지난해 9월 20일.
엠아르아이(MRI) 검사를 준비하던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이비인후과 장기홍 박사팀은 당황한 표정으로 삐찌싸를 마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을 재운 뒤 편안한 상태에서 검사를 해야 하는데 삐찌싸는 계속 잠들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소량의 마취제를 투여했다. 하지만 삐찌싸는 잠시 눈을 감을 듯 하더니 이내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면의 무언가가 완강히 잠을 거부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잠이 쉽게 깨고 불안해 하던 아이는 자신을 위한 일이란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어둠의 공포만을 걷어내려고 애를 썼다. 한 두 차례 더 마취제를 투여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섯 살 도 채 안된 어린 아이지만 한번 겪은 죽음의 공포를 쉽사리 털어내지 못하는 듯했다. 장 박사는 결국 검사를 포기하고 수술에 최선을 다하자는 말로 미련을 거두었다.

“선천적으로 청각을 잃은 사람은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청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후 언어치료의 과정을 잘 거치면 자연스레 말을 익힐 수 있지요.”

장 박사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할 뿐더러 점점 퇴화되어 가는 시력을 지닌 삐찌싸에게 “말이라도 하게끔 해주고 싶더라”며 병원 사회사업팀에 부탁해 인공달팽이관 기계값을 제외한 수술비와 치료비 일체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네 시간여에 걸친 수술을 잘 견뎌낸 삐찌싸는 일주일 간의 입원 치료 뒤인 10월18일부터 언어치료를 시작했다. 캄보디아에서 온 자그마한 아이를 위해 장 박사를 비롯한 두 명의 언어치료사와 인공달팽이관 개발사의 직원이 매주 화요일 병원 3층 언어치료실에서 만남을 가졌다. 임신자씨는 그림자처럼 삐찌싸를 보살폈고, 장 박사의 지인인 채수동 언어치료사도 응원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초기 수면제 마취제도 ‘거부해’ 의료진 당황
3시간 수술 견뎌내고 ‘따따따~’ 흉내 시작
‘빛’ 잃어가지만 ‘소리’ 얻으면서 밝고 건강해져

“따따따~~.” “나나나~~.” 삐찌싸는 언어치료사가 동물소리를 들려주면 그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입 모양을 흉내다며 따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짓을 벌이긴 했지만 조금씩 소리를 들으면 따라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45~75데시벨(dB)이면 일상적인 대화하기가 가능한 가청영역이지만 90dB 소리도 듣지 못하던 삐찌싸는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삐찌싸는 다양한 소리를 어렴풋이나마 구분하기 시작했다. 전화벨 소리도 알아듣고,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소리를 듣더니 직접 해보겠다며 나서기도 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알아채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삐찌싸는 빛을 잃어가는 대신 소리를 얻으면서 훨씬 더 밝고 건강해졌다. 자신을 아끼고 함께 있어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것을 삐찌싸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찌순이한테 받은게 더 많아요”

“찌순아!” 멀찍이서 별명을 불렀더니 냉큼 뒤돌아보며 웃는다. 임신자씨의 목소리를 아는 모양이다. 임씨는 소리에 반응하는 삐찌싸의 모습이 기쁘고 반갑다.
“따르릉!” 맑음터에 전화가 걸려오면 냉큼 달려가 수화기를 들더니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연신 떠들어댄다. 임씨는 상대가 알아듣건 말건 혼자 떠들어대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대견스럽기만 하다.

임씨가 삐찌싸를 만난 건 2004년 캄보디아에서였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임씨는 2001년 다니던 복지재단을 그만두고 선교사 자격으로 그곳에 갔다. 왠지모를 삶의 공허함 때문이었다. 프놈펜 대학 심리학과에 적을 두고 장애아동심리를 강의하던 그는 틈틈이 캄보디아 전역을 두려움없이 혼자 돌아 다녔다.

“뭔가 가슴 속에 무거운 기운이 있었지요.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가벼워졌어요. 열악한 삶 안에서도 잔잔한 행복을 보여주더라구요.”

2003년 그곳에서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던 오인돈 예수회 신부와의 만남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안내했다. 오 신부의 권유로 그는 ‘자비의 빛’이라는 장애아특수 기숙사에 들어가 일하기로 한다.

“그냥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러다가 삐찌싸를 만났지요. 처음에 봤을 때 되게 작다는 느낌이었어요. 잘 걷지도 못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벽에 부딪히고 그러더라구요. 눈과 귀가 불편한 중복장애아라는 것도 그때 알았지요.”

뇌수종을 앓는 장애아와 자폐아를 돌보느라 바빠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울음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한 아이가 혼자 일어나 슬피 울고 있었다. 삐찌싸였다. 얼른 달려가 보듬어 안고 달래줘도 울음을 쉬 그치지 않는 아이. 두 사람의 특별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삐찌싸는 아침을 챙겨주고 안아주는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임씨도 삐찌싸가 점점 가슴에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해 7월 임씨는 삐찌싸의 치료를 위해 오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임씨는 늘 아이 곁에 머물면서 엄마의 역할을 떠맡았다. 밤이면 비명섞인 잠꼬대를 하는 아이를 달래주느라 밤을 새고, 진료를 위해 매주 병원에 데려가는 등 힘든 날을 함께 하면서 그는 점점 더 아이와 가까워졌다.

임씨는 삐찌싸가 인공와우 삽입수술을 마치고 상처가 아문 뒤 처음 청력검사를 받던 지난해 10월18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를 듣던 날. 삐찌싸는 깜짝 놀라 품에 안기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가끔은 어른들 욕심 때문에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어쩌면 인공와우를 안했어도 충분히 행복해 할 만큼 단단한 아이거든요.”

수술과 어려운 재활과정을 지켜보면서 맘고생을 많이 한 그는 삐찌싸가 겪은 힘든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로 인해서 제 삶이 바뀌었어요. 어렵게 살아난 아이잖아요.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있는 순간은 내삶에 충실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애가 참 밝잖아요.”

오히려 삐찌싸로부터 받은 게 더 많다는 임씨에게서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기꺼이 삶을 나눈 마더 테레사의 맑은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삐찌싸’ 발견에서 귀향까지
죽음 문턱 넘어 귀꿇리고 입도터져…

2001년 11월 1일 캄보디아 프놈펜 외곽 숲속. 예수회 자원봉사자가 길을 지나다 우물 옆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했다. 끔찍했다. 벌레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그 아이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이는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그는 서둘러 그 아이를 보호시설로 데리고 왔다. 사람들은 우물 이름을 따 그 아이를 삐찌싸라고 불렀다.

갓난 아이 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삐찌싸(6)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한다. 청력은 아예 없다. 왼쪽 눈은 소안구증이어서 시력이 나오지 않는다. 오른쪽 눈도 아주 심한 고도근시여서 약간의 빛을 인지할 뿐이다. 가끔 벽에 부딪히면서도 삐찌싸는 익숙한 공간에서는 꽤 잘 돌아다닌다. 몇 번 만난 사람은 몸짓만으로도 구별한다.

지난해 7월 치료를 하려고 찾은 한국 땅에서 삐찌싸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비쳐왔다.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시력회복은 불가능하지만 인공달팽이관 이식수술을 통해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 오 신부와 임씨는 앞을 못보는 아이에게 청력이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다행히 병원쪽에서 수술과 치료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밝혔고, 2100만원이 드는 인공달팽이관 기구 값은 오 신부가 모금(한겨레 2005년 9월 2일 치)해서 해결했다.

수술 뒤 삐찌싸는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소리를 듣게 되면서 ‘우~’하는 소리만 내던 삐찌싸는 조금씩 다양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하려는 의지도 무척 강해 보였다.

현재 언어치료 등 재활 과정을 밟고 있는 삐찌싸는 7월6일 캄보디아로 돌아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어린이 기숙사 ‘자비의 빛’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때까지 언어치료를 마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 장기체류가 쉽지 않은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무엇보다 고향인 캄보디아로 돌아가 자신의 고국어를 익히도록 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다.

후원 국민은행 011237-04-001984(예금주:한국예수회). 입금시 ‘삐찌싸’를 찍으면 전액 삐찌싸를 위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