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세상읽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자 / 박구용 (한겨레, 6/1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28 23:43
조회
890
**[세상읽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자 / 박구용 (한겨레, 6/13)

좋은 사회란 살 만한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라, 못살겠다는 사람이 적은 곳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40살 이상 자살률 1위 나라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은 없다. 죽음은 자연이나 사회에서 강제할 뿐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강요된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요즘 들어 곳곳에서 죽음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굿판 소리가 요란하다. 죽음을 강요당한 자들의 분노와 아우성은 굿판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고, 타살은 은연중에 자살로 둔갑한다.
지난달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안마사 자격 인정을 시각장애인으로 제한한 ‘안마사에 관한 규칙’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위헌판결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지만 핵심은 하나다. 앞의 규칙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기본권 침해 최소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헌법재판소는 재판 결과를 강제할 별도의 장치가 없다. 헌재는 오로지 주권자인 국민의 지지를 통해서만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과 언론은 헌재의 판결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비판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직 헌재 판결의 법적 논리를 비판하는 소리가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헌재 판결 자체가 법적 논리보다 국가 체계에 관한 재판관들의 정치적 가치 지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선택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헌재 판결의 근거는 형식적으로 옳을지 모르지만 내용적으로는 거짓이다. 시각장애인을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에게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들은 자아실현을 위해 안마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안마사 직업은 생존의 조건이다. 안마사 자격제한은 시각장애인에게 한동안 베풀어진 시혜가 아니라,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그들의 생명권이었다. 헌재는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근거로 시각장애인의 생명권을 침범한 것이다.

한 시각장애인이 이미 생명을 잃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투쟁하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에는 더 무서운 논리가 숨어 있다. 헌재는 헌법에 그나마 협소하게 남아 있는 제한경쟁의 원칙을 기본권이란 이름으로 제거한 것이다. 국민 통합의 원천인 헌법 체계를 무한경쟁이라는 야만적 시장 논리에 귀속시킨 것이다. 경쟁 이외의 다른 어떤 규범도 사회·경제적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쟁이 악은 아니다. 경쟁은 나쁘기도 하지만 좋은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무한경쟁은 야만이고 악이다. 무한경쟁은 사회의 하층민뿐만 아니라 중간층조차도 몰락의 항구적 위협에 노출시킨다. 생존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사회적 연대성과 통합의 힘은 사라진다. 연대성 없는 사회에서 경쟁력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우리 안의 타자’로 전락한 이들 하층민은 죽음 이외에 자기를 표현할 모든 언어를 빼앗긴다. 무한경쟁이 벌이는 죽음의 굿판에서 인간적 삶을 향한 이들의 외침은 언제나 묵살된다.

헌재의 이번 판결이 시장의 요구에 법을 굴복시킨 봄맞이 굿이었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한여름 땡볕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굿판이 될 것이다. 살 만하다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못살겠다는 사람이 즐비하게 늘어설 것이다. 무한경쟁은 사회적 약자의 타살을 넘어 공동체 자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 시각장애인이다.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