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시민군과 계엄군이었던 형제 (한겨레, 5/16)
\"아픔은 치유돼야지만 정신은 잊지말아야죠\"
1980년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쏜 총탄은 장선호(51)씨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붉은 피가 쏟아졌다.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주위는 아수라장이었다.
살아야한다는 일념하에 선호씨는 가슴을 움켜잡고 인근 \'반 이비인후과\' 문을 두드렸다. 그는 곧 기독병원으로 옮겨져 수술대에 올랐다.
장씨가 총탄을 맞은 지 하루 뒤 20사단 60연대 2대대에서 근무하던 장씨의 동생 장진호(49)씨는 성남공군비행장으로 이동했다.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병이었던 진호씨는 군장하고 헬기에 올랐다. 헬기는 곧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형과 동생은 최근 5.18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했던 옛 전남도청에서 만났다. 80년 5월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지 26년.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 만난 뜻깊은 자리였다.
1980년 5.18은 선호씨 둘째 형(55)의 결혼식이었다. 둘째 형은 계엄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초주검이 돼 돌아왔다. 신혼여행은 사치스런 말이 돼 버렸다. 분개한 선호 씨는 시민군이 돼 옛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나흘만에 부상을 당했다.
\"오후 쯤 계엄군의 발포명령이 있은 지 5분 만에 총알을 맞은 것 같아요. 맞자 마자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까스로 병원에 갔어요. 병원 안에는 부상자들로 넘쳐났습니다.\"
선호 씨는 이후 적십자 병원을 거쳐 기독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후 그에게 5.18의 기억은 없다. 6월 중순이 지나야 퇴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헬기를 탔던 동생은 23일 새벽 2시께 광주에 도착했다. 그는 실탄 108발을 M16총에 장착한 채 \'폭도\'들을 수색하는 작업을 맡았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향우들을 `폭도\'로 매도 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지...하지만 힘이 없었습니다. 수색 작업에 어쩔 수 없이 참가했습니다.\"
그가 형의 부상 소식을 들은 것은 5.18 작전에 참가해 얻은 특박으로 나온 6월 중순이었다. \"괴로워서 형의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었다\"는 것이 그때 생각이었다.
선호씨도 \"동생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왠지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요\"라고 회고했다.
이후 선호씨는 83년부터 5.18민주화 운동 부상자회에서 활동을 했다. 동생은 한국전력에 취업, 울산, 목포, 인천 등에서 근무하며 광주를 떠나 살아왔다.
명절 때 만나도 이들은 5.18에 대해 함구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언급하기가 꺼림칙했다. 누구하나 나서서 화두를 던지지 않았던 것은 서로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26년이 흘러야 이야기 할 수 있는 아픈 기억이지만 이제는 딛고 넘어야 할 기억의 편린이었다.
이들은 \"5.18은 민주화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그 혜택을 우리와 우리 후세대가 누리고 있고요. 이제 아픔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정신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