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DMZ 포럼]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2-28 22:10
조회
3666
비무장지대(DMZ)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분단의 라인'을 '신뢰구축을 위한 매개체'로
1999. 10. 20. 岡本 厚
(日本 岩波書店雜誌 「世界」편집장)
보통 '38도선'이라고 불리고 있는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는 일본국가 및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슈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총격전(銃擊戰) 등과 같은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상기되어지곤 했지만, DMZ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 거의 전무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 심포지엄의 주최자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제안을 받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오히려 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에 대해 주최자께 감사드립니다.
DMZ는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를 두 개로 나누어 놓은 분단선인데, 이 분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바로 '민족의 분단선'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분단선이 만들어 진 것은 한국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질서를 장악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결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형성된 분단선은 반세기에 걸쳐 같은 언어와 문화 및 같은 역사를 가진 한국민족을 반으로 갈라놓았으며, 이 선을 넘어서서 서로가 거의 교류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화시켰습니다.
따라서 DMZ는 일단 '민족의 분단 라인'으로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동일한 민족으로서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제도가 완전히 다른 체제로서 반세기 이상 갈라진 남한과 북조선 사회의 차이점은 현재로서는 결코 적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근간 20년 동안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중심으로 한 남과 북의 격차는 더욱 커가고 있으며, 구 소련의 붕괴는 이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제의 분단선'이라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적인 냉전체제는 세계 전체를 두 영역으로 분할하였는데, 동아시아에 있어서 한반도는 대만해협과 일본의 북방 영토까지 포함하여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그리고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력이 부닥치는 대결의 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이는 또한 단순히 '냉전' 그 자체로만 볼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한반도와 베트남은 이로 인한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따라서 DMZ는 바로 세계적 대결구도의 최전선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일본 역시 이 구도를 지지하는 데 있어서 크게 기여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 국가에 놓여있는 한국과 대만에 대한 안전보장을 이유로 막대한 원조를 행하는 가운데, 소위 일본 주변에는 군사적 울타리를 강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같은 역학구조 속에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이를 주도적으로 전개시킨 것은 미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沖 )를 포함한 일본 주변을 군사화 함으로써 자체적으로는 경제활동에 전념했으며, 군사력에 자본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일본은 냉전의 '수혜자'라 할 것입니다.
일본이 이와 같이 DMZ의 대립 구조를 지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책임의식이 거의 없었던 것은 (정부든, 민간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러한 냉전체제의 주체는 미국이며 일본은 단지 이에 따르도록 동원된 단순한 참가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잠재해왔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냉전체제는 10년 전에 이미 종식됐으며, 옛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도 크게 변화해가고 있는 오늘날, 이 '체제의 분단 라인' 구조 역시 극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남쪽(대한민국)은 소련과 중국과의 공식국교를 맺었으며, 따라서 북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을 지지해온 배후의 지지세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DMZ가 분단 라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민족의 분단 라인'과 '체제의 분단 라인' 이 두 요소는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으므로 단순하게만 생각되어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남과 북의 양쪽체제에 놓여 있는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원이자 목표는 이 민족의 분단이 극복된 통일이라고 여겨지는 데, 이를 위해서는 '체제의 분단 라인'을 형성시켜온 동아시아 (또는 세계전체)의 평화와 상호신뢰 구축이 필수적입니다.
'체제의 분단 라인'이 아직도 존속 유지되고 있는 데는 미국과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초에 남과 북이 동시에 국제연합(UN)에 가입했으며, 그후 북쪽으로부터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며 북쪽과의 관계개선 또한 지연돼 왔습니다. 오히려 핵 개발문제나 미사일문제로 인해 매우 심각한 위기까지 초래했습니다. 이 배후에는 북측이 머지않아 곧 붕괴되리라는 잘못된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94년 이후 북한과의 대화를 착수하면서 최근에는 베를린회담에서 획기적인 합의를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과 북한은 보다 획기적인 관계개선을 이루리라고 봅니다. 다만 남아있는 문제는 일본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맺게 된다면, 이 지역의 모든 나라들, 즉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대만이 서로 교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체제의 분단 라인'에 대한 의미가 결정적으로 전환되리라 봅니다. 이로써 앞으로는 분단의 의미 자체가 소멸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남과 북 사이에 놓여있는 '민족분단의 라인' 철폐를 의미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매우 많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분단라인의 철폐가 지금까지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제도의 붕괴 자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를 통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삼켜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북측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과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북측의 이같은 공포심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DMZ의 활용방안이라는 이야기가 부상합니다.
분단된 라인이 존재한다면 건너편에 있는 상대방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왜곡된 정보에 동요됨으로 불신과 의심이 확대되며, 이로 인한 공포가 오판을 낳게 만듭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이 곧 DMZ의 활용 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분단 라인'의 현실을 어떻게든지 '신뢰의 매개'로 바꾸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냉전시대는 양쪽의 이해득실이 합쳐져서 영이 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었습니다. 이 쪽에 유리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불리하게 되며, 거꾸로 상대방이 점수를 얻게 되면 이쪽은 점수를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냉전시대는 끝났습니다. 시대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롭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이 시대의 전선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그래서 이해득실이 합쳐서 플러스가 되는 플러스섬 게임(plus-sum game)의 양상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체제가 될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이 안고 있는 문제나 고통은 실제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나 아픔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화에 의한 방대한 자본의 흐름에 의해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와 환경문제 및 에너지문제, 핵폐기물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머지않아 이같은 동일한 문제를 놓고 서로 손잡고 협력해 나가야 할 파트너요, 동지로서 상대를 바라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를 파트너로 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유익만을 외치는 '언어'로서는 건설적인 대화를 결코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 언어라 할지라도, 곧이어 많은 민족에게 보급되어 함께 통용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얇고 좁은 '언어'를 깊고 넓은 '언어'로 변화시켜 확산될 수 있는 방안으로 DMZ가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DMZ는 자연의 보고입니다. 우선 이곳에 대한 동식물의 관찰과 기록 및 보전을 위한 협력부터 시작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의 관찰을 위한 공동위원회 같은 것을 설치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활동을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을 DMZ내에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은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서 충분한 매개체입니다.
그리고 축구장을 비롯한 스포츠 시설물을 건설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금년 여름 평양에서 남북노동조합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이곳에 상설 스타디움이 생긴다면 매우 즐거울 것입니다.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펼침과 동시에 공동의 팀웍 또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스포츠 또한 이를 위한 훌륭한 공통의 언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극장이나 회의장을 DMZ에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언어가 그다지 필요 없는 전시장을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예를 들면 그림 전시회나 서예전 등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다 더 대중적인 규모로 서로가 보고 느끼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음악과 춤, 또는 영화나 연극을 이곳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의장에서는 학술적인 토론회나 심포지엄을 열 수 있습니다. 주제는 우선 자연과 환경문제 및 과학기술의 문제, 또는 공동의 역사 문제 등을 잡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정치적인 이슈나 군사문제, 또는 경제협력 등의 서로에게 민감한 문제는 양측의 신뢰관계가 어느 정도 구축될 때까지 가능한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통의 언어'를 발견했다면 이제는 '대화'를 성립할 수 있습니다. 대화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대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화'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일방적인 논리를 피력하며 파탄을 초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제의 분단 라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DMZ안에 국제연합 같은 시설물을 유치하거나 국제회의장을 건설해보는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남한과 북조선만이 아닌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몽고나 ASEAN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이 '분단의 라인'은 남과 북을 위한 '매개'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평화적 교류를 위한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전쟁의 최전선이었으므로 지뢰(地雷)를 해체하거나 철거하기 위한 국제연구소 및 평화연구소, 분쟁예방연구센터, 또는 국제연합평화유지군(PKO)을 위한 국제적인 훈련센터 등의 평화센터로서 세계적인 연구자나 유지(有志)들이 모일 수 있는 설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은 꿈같은 현실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꿈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몇 발자국만 더 나간다면 실현 가능한 꿈입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지금 우리는 마치 꿈같은 지점에 와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인류는 노예제도와 식민지제도, 그리고 인종차별정책(Apartheid) 등을 폐지시켰습니다. 물론 현실로는 이의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여전히 안고 있지만, 인류의 평화와 인권, 평등, 정의, 그리고 풍요로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도, 조선반도 이 땅에 이러한 시도를 감행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명확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력과 구상력, 그리고 마지막까지 어떤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이 꿈을 실현시키겠다는 정치적 실천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께서는 이미 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해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 또한 이 반세기 동안 최대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냉전의 수혜자' 입장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하루빨리 거듭나야 한다는 인식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보다 국가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지방 자치적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 지에 있습니다. 일본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전개시켰는가 하면, 전반기 50년은 군사적인 힘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여 석권했습니다. 후반기 50년은 경제적 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만, 아시아 지역에서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본은 싫든 좋든지 간에 아시아의 동반자로서 진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될 위치에 처해있습니다. 이는 바로 아시아의 각국으로부터 환영받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동반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옛날처럼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적대국가로 전락될 것인 지의 문제로서, 향후 10년이 이런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현재 일본은 군사력 보유를 법으로 금한 평화헌법을 개헌하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본에 대하여 대항자가 아닌 친구로서 항상 뜨거운 관심과 애정으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주목해주시기를 바라며, 이로써 일본이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역군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인도해주시기를 이 자리를 빌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분단의 라인'을 '신뢰구축을 위한 매개체'로
1999. 10. 20. 岡本 厚
(日本 岩波書店雜誌 「世界」편집장)
보통 '38도선'이라고 불리고 있는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는 일본국가 및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항상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슈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총격전(銃擊戰) 등과 같은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상기되어지곤 했지만, DMZ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발상은 지금까지 거의 전무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 심포지엄의 주최자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제안을 받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오히려 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에 대해 주최자께 감사드립니다.
DMZ는 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를 두 개로 나누어 놓은 분단선인데, 이 분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바로 '민족의 분단선'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분단선이 만들어 진 것은 한국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질서를 장악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결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형성된 분단선은 반세기에 걸쳐 같은 언어와 문화 및 같은 역사를 가진 한국민족을 반으로 갈라놓았으며, 이 선을 넘어서서 서로가 거의 교류할 수 없는 상태로 고착화시켰습니다.
따라서 DMZ는 일단 '민족의 분단 라인'으로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동일한 민족으로서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제도가 완전히 다른 체제로서 반세기 이상 갈라진 남한과 북조선 사회의 차이점은 현재로서는 결코 적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근간 20년 동안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중심으로 한 남과 북의 격차는 더욱 커가고 있으며, 구 소련의 붕괴는 이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체제의 분단선'이라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적인 냉전체제는 세계 전체를 두 영역으로 분할하였는데, 동아시아에 있어서 한반도는 대만해협과 일본의 북방 영토까지 포함하여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그리고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력이 부닥치는 대결의 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시아의 경우 이는 또한 단순히 '냉전' 그 자체로만 볼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한반도와 베트남은 이로 인한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었습니다.
따라서 DMZ는 바로 세계적 대결구도의 최전선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일본 역시 이 구도를 지지하는 데 있어서 크게 기여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 국가에 놓여있는 한국과 대만에 대한 안전보장을 이유로 막대한 원조를 행하는 가운데, 소위 일본 주변에는 군사적 울타리를 강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같은 역학구조 속에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이를 주도적으로 전개시킨 것은 미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沖 )를 포함한 일본 주변을 군사화 함으로써 자체적으로는 경제활동에 전념했으며, 군사력에 자본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일본은 냉전의 '수혜자'라 할 것입니다.
일본이 이와 같이 DMZ의 대립 구조를 지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책임의식이 거의 없었던 것은 (정부든, 민간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러한 냉전체제의 주체는 미국이며 일본은 단지 이에 따르도록 동원된 단순한 참가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잠재해왔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냉전체제는 10년 전에 이미 종식됐으며, 옛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도 크게 변화해가고 있는 오늘날, 이 '체제의 분단 라인' 구조 역시 극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남쪽(대한민국)은 소련과 중국과의 공식국교를 맺었으며, 따라서 북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을 지지해온 배후의 지지세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DMZ가 분단 라인으로 존재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민족의 분단 라인'과 '체제의 분단 라인' 이 두 요소는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있으므로 단순하게만 생각되어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남과 북의 양쪽체제에 놓여 있는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소원이자 목표는 이 민족의 분단이 극복된 통일이라고 여겨지는 데, 이를 위해서는 '체제의 분단 라인'을 형성시켜온 동아시아 (또는 세계전체)의 평화와 상호신뢰 구축이 필수적입니다.
'체제의 분단 라인'이 아직도 존속 유지되고 있는 데는 미국과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초에 남과 북이 동시에 국제연합(UN)에 가입했으며, 그후 북쪽으로부터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며 북쪽과의 관계개선 또한 지연돼 왔습니다. 오히려 핵 개발문제나 미사일문제로 인해 매우 심각한 위기까지 초래했습니다. 이 배후에는 북측이 머지않아 곧 붕괴되리라는 잘못된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94년 이후 북한과의 대화를 착수하면서 최근에는 베를린회담에서 획기적인 합의를 맺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과 북한은 보다 획기적인 관계개선을 이루리라고 봅니다. 다만 남아있는 문제는 일본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국교를 맺게 된다면, 이 지역의 모든 나라들, 즉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대만이 서로 교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체제의 분단 라인'에 대한 의미가 결정적으로 전환되리라 봅니다. 이로써 앞으로는 분단의 의미 자체가 소멸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남과 북 사이에 놓여있는 '민족분단의 라인' 철폐를 의미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아직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매우 많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분단라인의 철폐가 지금까지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제도의 붕괴 자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를 통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삼켜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북측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과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북측의 이같은 공포심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DMZ의 활용방안이라는 이야기가 부상합니다.
분단된 라인이 존재한다면 건너편에 있는 상대방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왜곡된 정보에 동요됨으로 불신과 의심이 확대되며, 이로 인한 공포가 오판을 낳게 만듭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이 곧 DMZ의 활용 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분단 라인'의 현실을 어떻게든지 '신뢰의 매개'로 바꾸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냉전시대는 양쪽의 이해득실이 합쳐져서 영이 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었습니다. 이 쪽에 유리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불리하게 되며, 거꾸로 상대방이 점수를 얻게 되면 이쪽은 점수를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냉전시대는 끝났습니다. 시대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롭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이 시대의 전선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그래서 이해득실이 합쳐서 플러스가 되는 플러스섬 게임(plus-sum game)의 양상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체제가 될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이 안고 있는 문제나 고통은 실제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나 아픔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화에 의한 방대한 자본의 흐름에 의해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와 환경문제 및 에너지문제, 핵폐기물 문제 등이 그것입니다.
머지않아 이같은 동일한 문제를 놓고 서로 손잡고 협력해 나가야 할 파트너요, 동지로서 상대를 바라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를 파트너로 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대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유익만을 외치는 '언어'로서는 건설적인 대화를 결코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된 언어라 할지라도, 곧이어 많은 민족에게 보급되어 함께 통용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얇고 좁은 '언어'를 깊고 넓은 '언어'로 변화시켜 확산될 수 있는 방안으로 DMZ가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DMZ는 자연의 보고입니다. 우선 이곳에 대한 동식물의 관찰과 기록 및 보전을 위한 협력부터 시작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의 관찰을 위한 공동위원회 같은 것을 설치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활동을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을 DMZ내에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은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서 충분한 매개체입니다.
그리고 축구장을 비롯한 스포츠 시설물을 건설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금년 여름 평양에서 남북노동조합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이곳에 상설 스타디움이 생긴다면 매우 즐거울 것입니다.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펼침과 동시에 공동의 팀웍 또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스포츠 또한 이를 위한 훌륭한 공통의 언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극장이나 회의장을 DMZ에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언어가 그다지 필요 없는 전시장을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예를 들면 그림 전시회나 서예전 등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다 더 대중적인 규모로 서로가 보고 느끼며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음악과 춤, 또는 영화나 연극을 이곳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의장에서는 학술적인 토론회나 심포지엄을 열 수 있습니다. 주제는 우선 자연과 환경문제 및 과학기술의 문제, 또는 공동의 역사 문제 등을 잡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정치적인 이슈나 군사문제, 또는 경제협력 등의 서로에게 민감한 문제는 양측의 신뢰관계가 어느 정도 구축될 때까지 가능한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통의 언어'를 발견했다면 이제는 '대화'를 성립할 수 있습니다. 대화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대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화'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일방적인 논리를 피력하며 파탄을 초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제의 분단 라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DMZ안에 국제연합 같은 시설물을 유치하거나 국제회의장을 건설해보는 아이디어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남한과 북조선만이 아닌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몽고나 ASEAN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이 '분단의 라인'은 남과 북을 위한 '매개'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평화적 교류를 위한 '교차점'이 될 것입니다.
전쟁의 최전선이었으므로 지뢰(地雷)를 해체하거나 철거하기 위한 국제연구소 및 평화연구소, 분쟁예방연구센터, 또는 국제연합평화유지군(PKO)을 위한 국제적인 훈련센터 등의 평화센터로서 세계적인 연구자나 유지(有志)들이 모일 수 있는 설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은 꿈같은 현실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꿈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몇 발자국만 더 나간다면 실현 가능한 꿈입니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지금 우리는 마치 꿈같은 지점에 와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인류는 노예제도와 식민지제도, 그리고 인종차별정책(Apartheid) 등을 폐지시켰습니다. 물론 현실로는 이의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여전히 안고 있지만, 인류의 평화와 인권, 평등, 정의, 그리고 풍요로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도, 조선반도 이 땅에 이러한 시도를 감행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명확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력과 구상력, 그리고 마지막까지 어떤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이 꿈을 실현시키겠다는 정치적 실천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께서는 이미 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해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 또한 이 반세기 동안 최대의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냉전의 수혜자' 입장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하루빨리 거듭나야 한다는 인식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보다 국가 이기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지방 자치적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 지에 있습니다. 일본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전개시켰는가 하면, 전반기 50년은 군사적인 힘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여 석권했습니다. 후반기 50년은 경제적 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만, 아시아 지역에서 진정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일본은 싫든 좋든지 간에 아시아의 동반자로서 진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될 위치에 처해있습니다. 이는 바로 아시아의 각국으로부터 환영받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동반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옛날처럼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적대국가로 전락될 것인 지의 문제로서, 향후 10년이 이런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현재 일본은 군사력 보유를 법으로 금한 평화헌법을 개헌하고자 하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일본에 대하여 대항자가 아닌 친구로서 항상 뜨거운 관심과 애정으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주목해주시기를 바라며, 이로써 일본이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역군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인도해주시기를 이 자리를 빌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