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이리 와서 함께 떡을 먹읍시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1:38
조회
1236
(2006년 1월15일-주현절 둘째주일)

<설교제목> 이리 와서 함께 떡을 먹읍시다.
<성경본문> 룻기 1장 14절 -16절
<교독> 교독문 42(마태복음 5장)
<찬송>373, 94

<본문주해>룻기는 이방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본문이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가난한 이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룻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오미라고 불리우는 한 여인이 모압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이 거기 머무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버렸다. 나오미는 며느리가 둘 있었는데 모압 여자들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 나오미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오다가 도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며느리들이 계속 시어머니를 따라가려고 하자 나오미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며느리들에게 남편감을 마련해줄 수가 없다며 돌려 보낸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기어코 홀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선다.
베들레헴에서의 나오미와 룻은 생계가 막연해진다. 그래서 룻은 이삭을 주으러 나간다.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룻이 이삭을 주으러 간 밭은 공교롭게도 나오미의 남편과 한 집안사람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다. 이미 룻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보아스는 룻에게 친절히 대한다. 점심을 나눠주고 자기 밭에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다. 룻이 이삭줍기를 한 밭주인이 보아스인 것을 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기로 마음 먹고 작전을 짜서 결국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오늘 본문은 이렇다.

14절: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에 초를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의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메 룻이 베불리 먹고 남았더라.
15절: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을 사이에서 줍게 하며 책망하지 말며
16절: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를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
오늘 본문의 보아스는 이삭줍기를 하는 룻에게 넉넉히 베푼다. 룻에게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할 뿐만 아니라,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가서 물을 먹도록 하였다. 또한 먹을 때가 되니, 음식을 먹도록 하였다. 룻이 먹고 남아 싸가지고 가서 나오미에게 줄 정도다. 그리고 젊은 일꾼이 룻을 못살게 굴지 않도록 한다. 이런 보아스의 태도에 룻은 이렇게 말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외국인노동자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가? 우리나라 실정은 어떤가?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줍기를 허락하고 자비를 베푼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신에 따른 것이다. 신명기 24장 19-22 에 의하면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을 싹 훑어 자기 집에 가져 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너희 땅에서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말아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 가난한 자와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거두도록 남겨두어라.(레위기 19:9-10).

외국인,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을 보호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외국인, 고아, 과부는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없는 대상인 바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 이삭줍기를 허용하는 법은 신명기 24장의 약자 보호법과 관계가 있다. ”같은 겨레나 너희 땅 성문 안에 사는 외국사람 가운데서, 가난하여 품팔이 하는 사람을 억울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날 품삯은 그날로 주되, 해가 지기 전에 주어야 한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날 품삯을 그날 받아야 살아갈 수가 있다. 그가 그날 품삯을 못받아,너희를 원망하면서 주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돌아갈 것이다(신명기 24장 14-15절).

이렇게 품삯을 제대로 줄 뿐만 아니라 햇곡식을 거둔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서 레위인과 외국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먹으며 즐기라고 하였다. 나아가서 3년마다 소출의 십일조를 떼어 레위인, 외국인, 과부와 고아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이 성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라고 명령하셨다(신명기 26:11-19). 외국인 이주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신과 자세는 레위기 19:34절에 잘 명시되어 있다. “너에게 몸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아껴라. 너희도 에집트 나라에 몸붙이고 살지 않았느냐? 나 야훼가 너희 하나님이다.”

보아스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법의 정신에 따라서 이방인여성인 룻을 돌보았다. 이삭줍기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었으며 그의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보아스의 이런 행동은 오늘날 외국인노동자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자선적인 차원이 아니라 외국인의 생계를 보장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 하나님 공동체의 법정신임을 깨우쳐 준다.

룻기는 모두 4장으로 되어있다. 전반부 2장은 룻이 이삭줍는 이야기로 끝이 나고 후반부 3장에서 4장은 룻이 나오미의 계획 아래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나오미의 대를 이어주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그런데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하나의 사랑 이야기라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법까지라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룻기 3장은 나오미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추진하는 장면이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 요구와 결부되어 있다. 가난한 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억눌린 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공동체의 윤리를 반영하고 있다.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와 룻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룻은 나오미의 계획에 따라 밤중에 보아스의 발끝에 가서 살며시 눕는다. 보아스가 누구냐고 묻자 룻이 대답한다.“접니다. 어른의 품에 저를 안아주십시요. 어르신은 속량자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입니다.” 영어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저를 당신의 부인으로 삼아주십시오.(living bible)” 하고 되어있다. 룻의 이러한 행동은 신명기 25:5-10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죽은 형의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그 형의 후손과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레비라토’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룻기에서는 이 레비라토 율법을 직계 형제가 아닌 집안 친척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나오미와 룻의 소망을 안 보아스는 나오미 집안의 유산지분으로 있는 땅을 속량시키고 이를 통해서 레비라토법을 이행하려 한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보아스처럼 외국인노동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권리투쟁에 연대한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외국인 여성인 룻과 결혼해서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보호해준다. 오늘날 보아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보아스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연대하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룻이 낯선 나라에서 이삭줍기를 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예화1>지금 우리나라에는 생계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등지고 우리나라에 와서 일을 한다. 법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금년 2005년 8월말 현재 36만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 근래 한국역사상 가장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 있고, 이것은 I.M.F. 이전보다 더욱 많아졌다. 사실 세계적인 현상으로 보면 이해가 갈만한 일이다. 한국도 심각한 경제위기에 있지만 동남아시아 전역이 총체적인 경제위기에 있다. 일례로 방글라데시는 인도의 큰 강줄기가 빠져나가는 삼각주지대이다. 한반도 크기만한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1억6천 5백만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살고 있다.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마다 여름이면 전 국토 면적의 절반이상이 홍수롤 쏠려나가고 있어서 유엔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심지어 한국의 방글라데시 대사관에서 외국인노동자에게 원조하는 모금을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나라에서는 외국으로 나가 주는 것이 애국이다. 더구나 나가서 달러를 벌어다주는 것은 굉장한 애국인 것이다.
70년대 초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원들이 독일에 나가서 마르크화를 벌어다 준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도 이동하지만 노동이 전 세계적으로 이동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WTO에 가입하고 난 후 1996년 1월 1일부터 우리나라에 인력파견업이 공식적인 개방업종으로 고시되었다. 이미 세계 굴지의 인력파견업체 66개가 한국에 인력파견업 신고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외국인 노동자문제는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고 경기가 좀더 풀리면 세계 도처의 싼 인력을 뽑아 한국의 여기저기에 있게 하는 상황이 곧 벌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현재도 이제까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동남아시아 뿐만 아니라, 구소련권의 우즈베키스탄, 몽골인 등 사회주의권은 물론이고 멕시코,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우리나라로 일하러 오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한다. 소위 3D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교센터에는 영세공장에서 외국인노동자를 보내달라는 전화가 가끔 온다. 그곳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려고 하지 않아서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 외국인노동자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김포근처의 어느 공장의 경우에는 한국인 노동자는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외국인노동자 12명이 일하고 하루 2교대를 하면서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지키고 있다. 기숙사라고 해야 조그만 조립식 건물로 지어놓았고, 식사도 자기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비일비재했던 일이지만 오늘 날 일일 2교대 하는 곳에, 그것도 잘못하면 손발이 짤린 위험한 곳에 한국인이라면 어느 누구가 일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영세공장의 사장들은 벌금을 물을 것을 각오하면서, 그렇게 외국인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한국인 기업주들은 밥도 넉넉히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온갖 폭력을 행사한다. 더욱이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불법임을 미끼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IMF 이후 경제가 어렵다보니 임금체불을 상담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례 2>장용남이라는 중국동포의 이야기이다. 경기도 오산에서 40여명이 함께 주택공사 택지정리작업을 하고 1억 5천여만원의 임금이 체불되었는데, 같이 일했던 6명의 한국사람에게는 임금을 완전히 청산을 하고 중국동포 42명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장용남을 대표로 뽑아 회사롤 찾아가 항의를 했다. 회사 쪽에서는 한푼의 월급도 주지 않은 채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이 사람을 출입국관리소에 넘겨 추방시켜 버렸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노동부나 경찰 어디에도 항의할 수 없이 겁을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 사람은 돌아가서 너무 분하고 억울해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천 여만원의 돈을 빌려 도둑배를 타고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당신들이 피를 나눈 동포냐 하면서 원자폭탄이 있으면 이 남한 땅에 터뜨려 버리고 싶다고 절규하면서 돈을 내놓으라는 것었다

<사례 3> 2005년 초 인천 부평에서 중국 동포 한 사람이 분신자살을 하였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스프레이에 써 놓은 글들이 큰 공장의 흰벽에 남아있다. 거기에는 “사장, 김태호, 천벌을 받는다. 내 영혼이 영원히 너를 쫓아다니며 저주하겠다. 한국이 슬프다. 김인성.” 사장은 자기는 잘못한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왜 저렇게 써 놓고 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왜 이 땅이 이토록 슬픈 땅이 되었고 슬픈 나라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례4>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직장에서 해고되면 단순히 직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원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당장 먹고 잘 곳이 없어진다.
근래 들어와서 외국인노동자들 가운데 폐결핵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공장의 아주 지저분한 자리 한 켠에 움막을 치고 자거나 또 지하실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자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다. 또 한편으로 잘 먹지 못해 영양도 부실해서 우리가 1950년대에 폐결핵 환자들이 많았던 것처럼 바로 이들이 폐결핵으로 쓰러져가고 있다. 얼마 전에 방글라데사 청년 한 명이 피골이 상접한 채 서울외국인노동자센타를 찾아왔다. 개인병원에서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었는데 자기 나라에 돌아가기 전에 큰 병원에서 정확히 진단이라도 받아보고 고국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 것이다. 이 분들이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려면 여간 돈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서울대학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2백여만원을 들여 정밀진단을 받은 결과 폐암이 아니라 폐결핵이라는 것이다. 이 분은 곧바로 퇴원해서 폐결핵 약을 먹고 일하게 되었다. 폐결핵 환자들은 푹 쉬고 잘먹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이다. 이 분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은 후 현재 일하고 있다.

<사례5>현재 36만명의 외국인노동자들 중 약 19만명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보통 10일 정도 병원에 일반환자로 입원하면 자기들이 1년동안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번 돈 6백여만원을 몽땅 들어간다. 이 분들은 아프면 곧 직장에서 해고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쉽게 아프다고 병원을 갈 수도 없다. 작은 병을 크게 키우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병원에 가더라도 말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펜잘을 벤졸로 알아듣고 약국에서 잘못 주어 고생한 청년도 있다.
(이상 <서울외국인노동자센타 자료실>에서)

결론> 이 보아스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과이 보아스처럼 외국인노동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룻기 4장에 보면, 룻의 요구에 응답하여 룻에게 레비라트법을 이행한 보아스를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축복한다. “그대의 집안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안같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유다가 자기 아들이 해야 할 레비라토법을 이행시키지 않자 시아버지 유다에게 그 책임을 물은 여인이다. 룻은 보아스에게 권리를 요구해서 그 권리를 쟁취한 여인이다. 그러기에 다말과 룻은 같은 선상에 서 있다.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힘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요구하며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룻과 다말과 같은 반열에 서있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보아스, 그는 한국인들이 닮아야 할 표상이다. 바로 나오미와 룻, 보아스 같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메시야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룻기의 이야기는 인종차별, 민족주의, 계급주의를 거부한다. 룻기를 통해 우리는 건전한 사회의 삶의 양식은 외국인과 조화를 이루고 가난한 자를 위해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본다. 룻기의 이야기는 지구촌시대에 외국인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한국인들에게 무엇이 참된 공동체적 삶인가를 깨우쳐주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고 한국교회가 인간화를 위한 전위대가 되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