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내가 천 번 산다면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9-14 21:44
조회
938
내가 천 번 산다면
유연희 박사
말씀 : 막 5:25-34

저는 요즘 아시아에서 교회 여성들을 만나고 선교사님들을 만나면서 신앙이 무언가, 선교가 무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만나는 여성도 신앙의 인물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낫게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셨겠지만 오늘은 이 여성이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을 향해 뻗치는 손을 상상하시며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혈루증이란 생리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현상입니다. 요즘은 이것을 호르몬으로 치료하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를 다른 사람과 의논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옛날에는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알만합니다. 레위기 성결법은 피가 몸밖으로 나오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데, 이런 사람이 닿는 모든 사람, 장소, 물건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의 모임은 물론 성전에서의 예배에도 참여할 수가 없었지요. 12년간이나 아팠으니 소문이 났을테고 사람들이 먼저 이 여성을 피했을 것입니다. 이 여성은 돈도 다 잃은 것은 물론, 몸은 몸대로 무척 쇠약해졌을 것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다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희망이나 신앙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 여성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들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는 것, 그리고 감히 예수를 만지려고 하는 것은 부정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운은 없지만 이 여성이 힘껏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순간 자신의 몸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여성이 예수님을 만진 것을 가지고 굳이 두 번이나 “누가 나를 만졌냐”고 물으시며 이 여성을 찾아내십니다. 베드로의 말마따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고 당기고 하는 통이라 누구라도 예수님과 닿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유독 이 여성이 만졌을 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성이 우연하게 닿은 것이 아니라, 아주 진실하고 간절한 만짐,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이끌어낸 그러한 만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성을 불러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이 여성에게 나간 것이 아까와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여성을 불러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서 이 여성은 겁이 나서 떨었습니다. 그런데 야단치실 것 같았던 예수님은 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누이여,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십시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만인이 보는데서 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예수님은 “환자가 . . .‘ “여자가 . . .”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앞에서 이 여성을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그의 신앙을 칭찬하셨고, 감히 규범을 어 긴 행동까지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치유의 마지막 과정이 끝난 것입니다. 이 여성은 이제 몸의 치유만이 아니라, 12년동안 다른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은 영혼까지도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이 여성이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런 사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는 예수를 만난 신앙인들의 역사였고, 그 신앙인들이 복음을 전한 역사였습니다. 오늘 이처럼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는 그 열매요, 산 증거입니다.

저는 아시아에서 성서의 혈루증 여성 못지 않게 힘든 삶의 조건에서 사는 여성들을 만납니다. 아시아에는 온 종일 일해도 하루 1,500원밖에 못버는 그런 가난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지난 3월에 캄보디아에서 여성지도력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아시아의 일반 교회 여성들과 처음 접한 기회였습니다. 세미나는 깨끗하게 지어놓은 수련회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저는 좋은 호텔에 묵으며 국제회의에 많이 참석해 보았기 때문에 사실 그 수련회 장소가 겉만 깨끗해 보였지 방과 욕실이 불편했습니다. 식사도 입에 맞지 않고, 양탄자도 더러웠고, 밤에는 몇 번씩 일어나 모기를 잡아야 했기에 속으로 불편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나 중간에 참석한 여성들에게 세미나를 참석한 소감을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빼빼 마르고 까맣게 그을은 한 여성이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어젯밤 꿈에 예쁜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 여성은 꿈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처음 이렇게 좋은 곳에 와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곳에서 훌륭한 음식을 하루 세끼 주다니요. 아이들과 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 꿈에 교회를 보았다는 말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저는 꿈에 교회를 보기는커녕 모기 때문에 불만이 가득했는데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그 여성과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세미나에 와서 잘 먹고 쉬며 배우니 감사와 행복이 넘친다고요.
그 직후에 베트남감리교회 여성들을 위한 여성지도력 훈련 세미나가 사이공 주변에서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사우디 아라비아, 북한 등과 더불어 아직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 몇 나라 중 하나입니다. 법적으로는 개인이 무슨 종교든 믿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종교 집회를 자유롭게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이 모임에는 18세에서 50세 사이의 25명이 참석했는데, 가정교회에서 열리는 비밀 집회였기 때문에 더 큰 규모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장소까지는 차로 가고, 다시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시골 마을의 한 집으로 들어갔지요. 오토바이는 모두 집 안에 놓아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참석한 여성들은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우선 여성끼리 모여 지도력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중 절반은 평생 처음 집을 떠나 먼 길을 여행한 이들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시작하는 세 미나에 참석하려고 토요일에 집을 떠나 1200 km가 되는 길을 총 20여 시간 낡고 좁은 버스를 갈아타며 일요일에 도착한 이들도 여럿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교인에게서 쪽지 하나를 받았어요. 쪽지에는 그저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고 다음에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고 또 다음에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서 내리라는 말만 적혀 있었지요. 저는 무척 걱정이 되었습니다 .”
행여 공안에게 들킬 경우를 대비해서 막연하게 적은 지시사항이었던 것이지요. 이틀간 처음 해보는 여행이 무사할지, 여행의 끝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떠나는 여행을 상상해 보십시오.
또 18세의 참석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여성지도력세미나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서 꼭 오고 싶었습니다.”
그러고서 평생 처음 집을 떠나 이틀 걸려 도착했다는 것이 지요. 그리고 버스라는 것도 우리 한국 중고차 9인승 밴을 개조해서 20여 명까지 태우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참석자들은 한 웍샵에서 단상에서 하나씩 자유롭게 연설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와 말해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쑥스러워 말을 못하고 우는 사람도 있었지요. 공안이 출입을 보고하라고 들들 볶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몰래 예수 믿는 게 지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함께 우는 이들이 많았던 것은 박해받는 기독교인들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여성은 소녀 적에 기타를 배운 경험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기타를 배울 때 오빠, 아버지, 이웃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자애가 무슨 기타냐, 결혼하면 다 소용없다.”
이 분은 지금 결혼한 지 20년쯤 되었고 요, 그 지도력 세미나에서 기타로 멋지게 반주하며 내내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저는 그 베트남 여성들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적으라고 나눠준 공책을비닐도 풀지 않고 가방에 넣고, 먹으라고 준 간식을 안먹고 가방에 넣는 모습, 돌아가 가족에게 주려는 것이겠지요. 여염집 방 한 칸을 교회로 꾸며놓은 가정교회에서 며칠간 들킬까봐 나가지도 못하고 먹고 자면서 기쁨과 눈물에 젖어 함께 찬양하고 배우는 여성들을 보며 한 마디 말이 자꾸 제 마음 속에 맴돌았습니다. 신앙이 무엇이길래!
아시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현지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만날 기회가 많 이 있습니다. 캠보디아에서는 사돈인 젊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사돈 어른도 평 생 시골 목회만 고집하고 최근 은퇴하셔서 제가 존경했는데, 이 아들 목사님은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들 도움을 받을까봐 본교회인 성결교가 아니라 감리교신학교로 진학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서 그 역시 제가 기특하다 생각하던 차였지요.]
캄보디아에 온지 1년이 안되었는데 언어를 익히기 위해 매일 개인 교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신학교는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도록 별로 공부를 열심히 안했는데 선교사가 된 후 제대로 섬기고 싶어서 죽어라고 언어공부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는 축구로 청소년 선교를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어린 딸이 셋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무식하게 애가 셋이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거기서는 외로운데 애 들끼리 서로 놀 수 있어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거라고 웃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정이 넘치는 것을 보며 또 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마침 제 신학교 동기 목사님이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보다 더 베트남 사람처럼 생긴 분인데, 그분 역시 죽어라고 가자마자 베트남 말을 공부해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지금 10년째인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교를 잘 하고 계셨습니다. 그 분은 선교사로서 그 지역 사람들, 즉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보며 참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분은 베트남이 캄보디아 보다 인구나 경제 규모 면에서 매우 앞섰다, 베트남은 지금은 어렵지만 선교의 가능성이 아주 많은 나라다, 경제면에서도 사이공과 그 일대를 개방했고 점점 나아진다, 등 주변 나라들과 견주어서 베트남 편을 확실히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 시피 베트남은 한류 열풍이 대단합니다. 하긴 제가 다녀보니 베트남만이 아니라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에서 모두 한국 연속극을 방영하더군요.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연속극이 나오기는 하는데 마치 옛날 변사가 하듯이 한 명의 성우가 모든 남녀 등장인물의 대사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캄보디아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등장인물 숫자대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더빙을 했더군요. 제가 그 베트남 선교사님에게 그 얘기를 해주면서 그것은 캄보디아가 베트남보다 앞서 있더라고 했더니 선교사님은 “그럴 리가 없는데. . .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상처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두 분 선교사를 보며, 저 역시 미 연합감리교회 여성국의 선교사이기도 하므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한국에 파송되어서 한국인들을 위해 일한 외국 선교사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한 명의 선교사에 대해서 요즘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묘소의 감리교 선교사 가족』이라는 책에서 접한 이야기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한국에 파송된 미 감리교회의 Ruby Kendrick이라고 하는 미혼의 젊은 여성선교사입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1907년 가을에 개성에서 소녀들을 위해 선교하다가 불과 8개월만인 다음
해 6월에 죽었습니다.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내가 천 번 산다면 그 생명을 모두 한국인에게 줄 것입니다.” 이 글은 죽기 하루 전에 텍사스의 엡웟청년회가 받은 편지 속에 있었습니다. 이 청년회는 켄드릭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었고, 그 날 편지를 받고 선교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그 청년회는 마침
연합대회를 열고 있었는데, 켄드릭 선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놀라고 슬퍼했습니다. 그 날 선교사로 지원한 청년이 무려 2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중 여러 명이 한국에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 후 텍사스 엡웟청년회는 해마다 헌금을 하여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생활비를 보조하였습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회에 가서 10명, 20명, 50명 의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달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저는 켄드릭 선교사처럼 말하기에는 겁이 납니다. “내가 천 번 산다면 모두 아시아 여성에게 주겠다고?” 얼마나 사랑해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러나 두려우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저 역시 제가 섬기는 아시아 여성, 어린이 , 청소년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그들을 위해 열심히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섬긴 사람들을 한 사람에 한 문단씩 정리한 것인데도 책이 한권이더군요.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우리 한국 감리교인을 위해 헌신하고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섬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감동이 됩니다. 지금 작은 월세집에 살며 죽어라고 캠보디아어를 공부하는 사돈 선교사님과 그의 가족, 베트남 사람에 대해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고 오늘도 공안의 눈길을 피해 사역하는 배선교사님, 그런 분들 때문에 오늘은 힘든 아시아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시아의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세끼를 맘대로 먹지 못하고, 나을 수 있는 병인데도 약이 없어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교회에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운을 내어 팔을 뻗쳐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려는 그들을 우리는 존경하고,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의 신앙이 있기에, 우리의 기도가 있기에 그들의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켄드릭 선교사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그밖에 수많은 선교사들과 목회자들과 선배 교인들이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온 결실입니다. 성서에서 혈루증 여성이 예수님을 만나 새 인생을 살게 되었듯이, 우리 역시 이 모든 이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새 인생을 살게된 사람들입니다. “내가 천 번 산다면” 그 생명을 다 한국인에게 주겠다는 사랑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랑의 빚진자로서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