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평화의 영성과 개혁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8-28 21:44
조회
796
평화의 영성과 개혁


시편 85장 1-13; 에페소 3장 14-21


20세기 초 조선반도가 일본제국주의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때 26세의 나이에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씨를 도와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을 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오늘에 목 놓아 크게 운다] 사건으로 폐간을 당하자 대한매일신문의 주필로 바로 부임하여 [이날에 또 목 놓아 크게 운다-시일야우방성대곡]의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히 비판하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당대의 대표적인 언론인.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의 취지문을 쓰고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일관한 혁명가. 중국 망명시절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남겨 민족사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 1936년 57세의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8년의 옥고생활을 죽음으로 마친 이분은 다름 아닌 단재 신채호선생이십니다.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

1924년에 [조선사]총론을 집필하면서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분명한 역사이해입니다. ‘무엇을 ’아‘라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 미 법 로...등은 제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이뿐 아니라 학문이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그밖에 그 무엇이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이에 대치한 비아가 있어 투쟁한다,’ 단재의 사관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아 정치 사회 등 각 분야의 소장성쇠를 서술하는 뚜렷한 자아주체론입니다.

다음해인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이란 평론은 너무나 잘 알려진 글이며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스승(本師)의 본뜻(精義)을 잘 이해하여 자가의 리(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는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면,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외래적인 사상에 편승하려는 조선민족의 사대적 노예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글입니다.

[전시작전통제권과 조선의 특색]

요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로 정치 사회계가 시끄럽습니다. 조선 동아 보수언론은 노태우시절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할 당시 전시작전통제권도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환수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하더니만 지금에 와서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재직 시절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된 전직 국방장관들이 재직 당시에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적극 추진하던 이들이 이제 와서 안보불안을 들먹거리며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었습니다. 이를 두고 쓸개 빠진 인간들이라 하고 조삼모사형 인간이라고 하지요. 단재 신채호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물질과 껍질로 된 소아의 인간이요 아의 역사를 거슬리는 비아들입니다. 아마 지금도 속리산 저 산중 무덤 속에서 슬피 울며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라며 슬피 울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조건 미국의 보호 안에 들어가야 안전한다.는 매우 사대주의적이고 노예적인 사고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도자나 언론은 민족의 긴 장래를 보면서 객관적 자료에 근거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감정적이고 정략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도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고 하면서 미군의 전략유연성을 인정하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매우 이율배반적입니다. 왜냐하면 전략유연성이란 미국의 이해에 따라 평택에 주둔하는 미군이 다른 나라와의 교전을 허락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을 상대로 하는 나라는 평택의 미군을 폭격할 것입니다. 여러분 평택은 우리 땅입니다. 결국 우리도 전쟁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평택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고 심지어는 전시작전통제권을 계속 미군에게 맡기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력 10위에 군사력은 6위이며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객관적 군사력 또한 북한에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 국방비를 확보하고 신무기를 계속 구입하기 위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왜 우리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고 다른 나라들은 다 철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철수에 철짜도 꺼내지 못한 채, 이러고 있는 것입니까? 젊은 애들 사막에다 갖다 놓고 살 빼기 다이어트 훈련하는 것입니까? 뭡니까? 이게 바로 우리 남한이 군사적으로 미국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우선 경제제일하는데, 우리나라가 정말 미래의 경제를 먼저 생각했다면 자유무역협정은 중국이랑 먼저 해야 합니다. 중국의 시장 크기는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역적으로도 가깝습니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중국과의 자유교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먼저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요구한 4대선결조건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이고 미국과 먼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변명이 중국의 값싼 농산물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제일 큰 피해는 농민들이 입습니다. 어차피 땅덩어리가 큰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게 되면 농산물 부분은 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것이 농산물 때문이다. 이는 천하가 다 아는 거짓말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진짜 이유는 미국의 감정을 건들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러한 굴욕적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사작전통제권을 남의 나라에 맡기고 있는 나라는 남한이 세계에선 유일한 나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맡겼으니 이건 나라가 아니죠. 전시군사통제권이라는게 뭡니까? 쉽게 얘기하면 내가 누구하고 죽기로 싸우는데, 주먹을 뻗으려다가 뒤에 있는 형님보고 어디를 먼저 때릴까요? 복부를 먼저 칠까요? 턱을 먼저 칠까요? 왜냐하면 통제라는 것은 허락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더 두들겨 맞죠. 흔히들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여 공산화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미국을 은인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하면 미국이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까? 남한국민들은 참으로 선량한 국민들이고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다 그러니 우리가 목숨 걸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래서 참전을 하였나요? 그건 아니지요. 미국이 참전한 것은 순전히 자기를 위해서 한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이해우선의 나라]

미국 입장에서 보면 만약에 남한이 공산화가 되면 일본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대상으로 태평양 전체를 방어해야 합니다. 지금은 155마일 38선만 틀어막고 있으면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할 수 있지만, 남한이 넘어가면 결국 미국은 태평양 전체 수천마일이 최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엄청난 국방비를 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목숨을 걸고 참전을 한 것이고 지금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지금은 미국이 우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엄청난 국방비를 줄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격히 말하면 남북은 왜 갈렸습니까? 물론 해방이후 우리의 자주역량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그었습니다. 미국이 반대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왜 일어났습니까? 미국이 철군하면서 한반도를 방어지역에서 뺀다고 하는 아치선 선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김일성정권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계 제2차 대전에서 다 쓰지 못해 5년간 창고에 수북이 쌓여있던 먼지 묻은 무기를 통째로 북녘 땅에다 갖다 부었습니다. 여러분도 한국전쟁 기록영화를 보면서 이런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평양상공을 날던 미군 조종사가 관제탑에다 이렇게 말합니다. ‘There are no more targets, 로저’ 갖다 부으려고 포탄을 들고 갔는데 더 이상 부을 데가 없다는 겁니다. 집 한 채 제대로 서 있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 소름이 끼치지 않으십니까? 그 폐허에서 울부짖는 분들이 누구에요?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누님이요 형님들입니다.

여러분 미국은 지난 60년동안 한반도를 시작으로 월남에서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에서 두 번 이라크에서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을 앞세워 왜 그리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지 아시지요. 식품에만 유효날짜가 있는게 아닙니다. 포탄도 유효날자가 있습니다. 그 날짜 안에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식품공장을 하는데, 물건이 나가지 않아 창고에 싸두었다가 날짜가 지나 폐기처분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문 닫아야하지요. 6.25가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그만 이 꼬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는 엄청난 인명피해와 시설들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미국의 군수공장은 다시금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여기에 하청을 받아 떼돈을 벌었습니다. 곰은 재주가 넘고 돈은 누가 가져간다고 하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한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미국을 은인의 나라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뭐 일본사람들이 근면해서 폐허를 딛고 일어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국은 여러 인종이 얽혀 사는 다인종의 나라이기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기본입니다. 서유럽의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이해타산이 밝은 나라입니다.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성과 합리보다는 의리를 중히 여겨 한번 도와주었다고 미국을 은인의 나라로 여기고 이 의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거 없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도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 때는 뒷돈 집어주며 써먹었지만 말 안 들으면 테러집단으로 몰아 미사일을 퍼붓습니다. 시청 앞에서 미국을 우방 맹방 하면서 성조기 흔드는 분들 참 순진해도 보통 순진하게 아닙니다. 미국을 몰라도 정말 모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나라가 미국인 것을 모릅니다. 전 나중에 그분들이‘순정을 다 바쳐 사랑했는데’ 하며 돌아선 임 바지 가랑이 붙들고 울까봐 걱정입니다.

[한반도정신착란교란병]

그런데 미국하고는 이렇게 의리를 중시하면서 왜 같은 백성끼리는 나 몰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남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권에 너무 약싹 빠릅니다. 집단 농간으로 아파트 값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진 사람들의 사치와 방종이 너무 지나칩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 20만원짜리 중국시계가 명품으로 둔갑을 해서 9천만원에 팔리는 사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출신이 김정일위원장이 먹는 정력제라고 해서 수억원을 사기를 친 사건도 발생했더군요,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력제하고 명품 좋아하는 일이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단체로 해외여행가서 명품 싹쓸이 하는 일은 유명합니다. ‘거기 있는 것 다 주세요.’ 하는 민족은 남한사람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어른들을 따라 강남의 초등학생들의 머리방울이나 헤어밴드에도 한 개에 10만원이 넘는 명품을 쓴다고 합니다. 중고등학생들도 신발 지갑에 마찬가지이구요. 왜 그럴까? 신문에 한 심리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가 갖고 있는 물건으로 몇 초 만에 사람을 파악하려는 현대인들의 조급하고 비뚤어진 성격과 명품으로 자신을 확대포장하려는 심리가 저급한 명품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경향신문 8월 9일 9면)

그러나 이 분의 주장대로 현대인들이 갖는 보편현상이라면 외국에도 같은 열풍이 일어나야 하는데, 외국에는 그렇지 않거든요. 극소수의 사람들이 그러긴 해도 이게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지는 않습니다. 명품열풍은 현대인이라서 생기는 열풍이 아니라 남한의 부자들에게만 일어나는 특이 현상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남한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그건 제가 자주자주 말하는 대로 분단고착화로 인한 한반도정신착란교란병입니다. 부가 제 혼자 잘나서 생긴 부가 아니라 실제는 많은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수고의 열매인데, 세법의 허점으로 그 부가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소수의 사람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때에 시작한 재벌 키우기 경제정책의 후유증입니다. 저는 서유럽과 같이 지금이라도 누진소득세를 올려 많이 버는 사람들로부터는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남북평화통일기념주일입니다만, 남북의 대화가 막혀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남북교회가 만든 공동기도문을 읽었지만 실질적인 대화의 창구는 막혀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정의와 평화]

성서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의 나라의 핵심이 되는 두 단어는 평화와 정의입니다. 완전한 평화,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의와 평화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대표적인 구절이 구약성서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5편이고 신약성서에서는 야고보서 3장 18절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해서 정의를 먼저 앞세우고 있고, 야고보서의 말씀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라고 말함으로 평화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평화와 정의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단독으로는 설수 없습니다. 평화 없는 정의는 힘센 자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모순된 정의요. 정의 없는 평화 또한 힘센 자들만의 거짓된 평화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시편과 야고보 성서기자의 서로 다른 이해가 작은 차이이긴 하지만, 오늘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주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말하면 자연히 불의한 것을 처단하는 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평화를 말할 때는 화해를 위한 악수나 포옹이 먼저 떠오릅니다. 생각과 뜻이 다른 적을 대면할 때에 정의의 칼을 먼저 드는가? 혹은 평화의 손을 먼저 내미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의도는 같습니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 또한 정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의도는 같지만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정의와 평화는 동전의 앞뒤마냥 같은 것이로되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략적으로 먼저 추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스라엘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있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사람들에게 평화의 악수를 하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포탄이 떨어져 어린이와 여인들과 동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은 항복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독립운동을 한 경험이 있어 나라를 빼앗긴 헤즈볼라 백성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정의가 먼저 요구되어야 합니다. 정의가 먼저 실현되어야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남한 사회는 어떠한가? 60년대로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군사독재로 인한 국가적 폭력이 난무하던 때에 정의를 외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4.19와 5.18과 6.29를 통해 국민들은 정의의 깃발 아래 일어섰고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있어서도 계속하여 정의만을 외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이 사회에 불의가 많고 이 때문에 민중들이 고통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을 향해 정의의 칼을 빼어 일어서라고 외치는 일은 뭔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남한의 정치권을 포함한 사회 종교 일반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고 있습니다. 지난주 열린우리당이 주최한 학술모임에서도 결국 대안 없는 얘기만 하다가 모임을 마쳤습니다. 진보적인 종교계도 7,80년대 보여주었던 밀집력이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한국교회협의회가 존재하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고, 목회자정의평화연합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총무의 월급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여 열심히 모여 토론을 하긴 하지만 해결방법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를 심어 정의의 열매를]

저는 전략상 60년대 이래 지금까지 지켜왔던 정의를 앞세우던 전략에서 이제는 평화를 앞세우는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시편의 말씀과 같이 정의를 심어 평화를 거두어들이는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평화를 심어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정의의 전략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계속 한곳으로 모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투쟁일변도였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무방비의 상태로 상대방을 사랑으로 품습니다. 정치도 예전에는 독재권력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모든 힘을 중앙으로 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분권화가 되었습니다. 이는 시대적인 요청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회의 권한을 분산하여 평신도중심인 목회운영위원회를 만드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 있습니다. 목회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 일인 중심의 목회에서 전 교인이 함께 참여하는 흩어지는 목회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모일 때가 있고 흩어질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은 평화를 심기 위해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작정 흩어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흩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가 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평화를 효과적으로 심기 위한 방법인 것이고 그리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주님은 평화이십니다. 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과제는 예수님을 따라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는 단지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으로 나누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이 지나쳐서 당적이 다르다고 인간적인 미움으로 번지는 일은 잘못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서로 문화적 습관이 달라 지역적으로 나누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 미워하고 지역 출신만으로 서로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견해가 달라 진보보수로 나누이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서로를 배척한다면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러한 우리 안의 분단을 해결하지 않은 채 남북이 통일된다면 이는 통일이 아닌 우리 안에 또 다른 분단을 만들어내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향린교회의 새로운 사명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로의 외침과 같습니다.‘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 오늘 남북평화통일주일을 맞아 남북이 하나되는 일을 찾되 동시에 우리 남한국민들끼리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은 다르되 보다 큰 뜻을 위해 함께 걸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가까운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먼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가끔 만나니까 북의 형제가 반갑고 좋지요. 만약에 우리가 매일 만난다면 아마도 너무나도 다른 차이 때문에 함께 살수 없다는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목사는 말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자세로 임한다면 적이라 불리는 형제의 지혜를 잘 활용하여 배우고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흑인은 비폭력의 정신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회지배체제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인종차별은 싫어하되 인종차별주의자는 사랑하는 능력을 길렀습니다. 흑인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에게 족쇄를 채워온 체제를 파괴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리면서 반대 세력을 존중해야 비폭력운동에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반대세력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교와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오늘 사도바울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이기심을 뜻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길이입니다.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넓이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일입니다. 이것은 삶의 높이입니다. 이 의무를 다하는 일이 곧 완전한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말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조국과 민족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깊이입니다.’

19세기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 ‘가리발디’는 통일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당시 지역국가이면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로마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패배를 눈앞에 둔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장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난과 죽음 밖에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조국을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시오.’

저는 계속해서 향린의 개혁과 영성의 길이란 제목으로 네 번째 하늘뜻펴기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기조는 여전합니다. 주님은 평화이시고 우리는 모두 평화를 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내적 인간을 굳세게 하여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심어 정의의 열매를 맺는 일은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맺는 일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오래 걸리고 그 열매가 쉬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심어야 합니다. 정의는 혼자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함께 심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바로 이 평화를 함께 심어가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작은 교회 공동체운동이란 바로 이 평화심기운동을 말합니다. 향린교회가 작은 단위의 여러 개의 교회로 나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심기 위해서 그리고 이 평화를 보다 효율적으로 심기 위해서 나는 작은 단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단위로 움직이는 지금까지의 평화심기는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숫자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보다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땅에 묻어두고 있습니다. 저는 향린교회 담임목사로서 후에 하느님 앞에 가서 ‘자네는 왜 교인들의 그 좋은 은사들을 다 땅에 묻어두었는가?’라는 책망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제게 주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더 잘하여 열매 맺는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감히 용기를 내어 가리발디를 따라 말하겠습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난과 죽음 밖에는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한다면 나를 따르십시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