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어째 재앙이라고 못 받겠는가?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10-11 21:45
조회
832
어찌 재앙이라고 못 받겠는가?

욥 1:1,2:1-10, 히 1:1-4,2:5-12, 막 10:2-16

추석 명절을 잘 보내셨지요? 명절이 즐거워도 지나고 나면 마음에 무언가 후유증이 남습니다.
나이가 찬 미혼 여성들은 가족들의 결혼재촉이 부담이나 상처가 되고, 남성 가장들은 출세?성공에 대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고통이 계속되는 가족을 만나면, 우리에게 신앙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음에도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신앙적 갈등이 싹텄을 것입니다.
‘경건한 신앙인이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왜 계속 고통을 당할까?’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처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우리 현실에서 종종 갖게 됨으로,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전통적인 지혜는 구약성서 잠언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로운 삶의 길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인생에 복을 주신다.”
그런데 이 인생관은 까닭없이 고난당하는 사람의 현실을 외면하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경우가 빈번한 까닭입니다. 전통적인 인생관의 한계입니다.
주전 587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한 사건은 야훼신앙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선민의식으로 살았는데 나라가 망하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비참한 현실에서 그들의 신앙과 가치관이 무참하게 깨졌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뜻있는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하나님과 역사에 대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고, 인생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관으로는 포로생활의 고통과 좌절을 온전히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기존 신앙으로는 사소한 죄와 억울한 재난 사이의 불균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포로생활에서도 야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살아도, 고통스런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고통은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혼란스러웠고, 갈수록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조국과 자기들에 대하여 침묵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경건하게 살면 하나님의 은총을 충분히 받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와 정반대인 경우가 많아지자, 경건과 은총은 전혀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종종 이런 생각이 떠오르고, 신앙적으로 갈등하지 않습니까?
이런 바벨론 포로생활의 심각한 갈등과 고민에서 탄생한 작품이 ‘욥기’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랑하던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재앙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내기하자고 덤벼든 것입니다. 욥기의 이런 발상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믿음이 바르고 의로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탄의 이런 대화를 상상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인 욥은 난데없는 강도와 불로 많은 가축과 종들을 잃었고, 불의로 사고로 아들 일곱과 딸 셋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엄청난 환난을 당하였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욥이 뭐라고 말합니까?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또 사탄에게 자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에 사탄은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이 내기 결과, 의인 욥은 악성 종기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의인 욥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재앙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의 몰이해는 욥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하도 보기에 딱해서 한 말이겠지만, 아내의 이 말은 욥에게는 비수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말에 욥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참 대단합니다. 우리도 환난을 당할 때, 욥처럼 처신하면 됩니다.
문제는 욥의 신앙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욥의 삶에서 조금씩 배우면, 우리도 고난을 점차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지랑대가 무언지 아십니까? 마당의 빨랫줄을 바치는 긴 막대기를 말합니다.
빨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긴 빨랫줄이 늘어지지 않도록 중간에 바쳐놓는 장대입니다.
이 바지랑대는 농가에서 가장 긴 막대기였으니, 이것으로 밤도 따고 대추도 땄습니다.
우리 옛말에 “바지랑대로 하늘재기”란 말이 있답니다.
이번 기독교사상 10월호에서 배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지랑대가 아무리 길다 하여도 그것으로 하늘을 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부질없는 짓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내가 제법 긴 장대를 가졌다고, 그 장대를 들어 감히 잴 수 없는 것들을 재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제법 지식이나 경험이 있고, 또 신앙이 깊다고 하여도, 주제넘게 하나님을 제단하거나 고난의 원인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은 ‘바지랑대로 하늘재기’와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을 온전히 믿고, 고난이 주는 의미를 겸손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욥에게서 어떤 삶의 자세를 배우면 좋겠습니까?
첫째, 욥처럼 고난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알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겪는 어려움, 고통, 고난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결과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난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 살피는 것은 필요하지만, 극구 그 원인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 힘만 빠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마가복음 본문과 욥기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의 어떤 점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을 기뻐하며 잘 받아들이는 점입니다. 어린이들은 작은 선물도 좋아하고 즐거워합니다.
“왜 이 선물을 내게 주는 것일까?” 하고 따지거나, “내가 이것을 받아들이면 무슨 대가가 있
을까?”하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보상이나 대가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와 예수님 말씀을 결합하면, 고난도 어린이처럼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고통도 즐겁게 접수하라!” 여러분,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고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면, 원망만 생길 뿐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복을 받는 것처럼 재앙도 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나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광야대학에 입학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 40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여 세우셨습니다. 물론 처절한 40년이었지만, 이 40년은 은총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10절에 “하나님은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조차도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고난은 성숙해지는 필수과정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알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고난을 끌어안아서 오히려 고난을 자신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욥이 예기치 못한 환난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계속하여 붙잡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어찌 재앙이라고 못 받겠는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2:6-8에서 인용한 시는 시편 8편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시인은,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우리도 고난을 당하여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면, 그 상황에서 의외로 내가 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목격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고난에서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고난의 삶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사소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환난을 이기며 성숙해지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마가복음 본문은 이혼과 혼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욥이 까닭없이 고통당할 때, 아내가 위로하였다면, 욥은 환난을 견디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장과 공동체가 소중합니다. 고난의 동반자가 되는 까닭입니다.
교우들의 고난은 우리에게 서로 위로하며 더 열심히 돕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잘 알려진 “무릎 꿇고 있는 나무”이야기가 있습니다.
북 아메리카 로키 산맥의 해발 3천미터는 수목이 자랄 수 없는 한계지점입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하여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서운 인내력과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 아름다운 영혼으로 생명과 소망의 선율을 연주해내는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이겨낸 고통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알 수 없는 고통은 우리를 훈련하고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욥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공동체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고통에 연대하면, 더 쉽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재앙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