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7-24 21:44
조회
973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본문 루가 13: 1-5

오늘의 복음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보낸 로마군인들이 성전에서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딘지 조금 문맥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 전해준 처참한 소식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서로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의 내용은 그야말로 끔찍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무자비한 탄압과 피식민지 이스라엘의 처참한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울분을 자아내고, 피를 끓게 하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어떤 심정에서 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의 응답을 유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부분은 빠져있고 다만 예수의 대답만인 나와 있습니다. 원래의 이야기가 아주 극렬한 정치적 갈등의 상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대답은 의외로 죄와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빌라도의 무자비한 탄압과 갈릴래아 사람들의 원통한 죽음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다만 죄와 회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자극적인 하나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것이 자극적인 사건의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피식민지 경험을 해 본 우리 민족은 식민지 점령군이 피식민지 백성을 학살했다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인지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은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로마군과 싸우던 중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군에게 공격을 가하던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라 종교 행위 중이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것입니다. 요즘의 이라크 상황에서 비유하자면 테러를 시도하던 이라크 사람들을 죽인 게 아니라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만일 미군이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 중이던 이라크 사람들을 이렇게 학살했다면 아마 전 세계가 떠들썩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극적인 또 하나의 측면은 죽은 사람들의 피가 희생 제물에 물들였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에서 성전이 얼마나 거룩한 장소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 거룩함의 중심은 희생제물입니다. 희생제물은 속된 세상에서 난 것을 가지고 거룩한 하느님께 바치기 합당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 바쳐서 마련한 것 입니다. 성전예물을 어떻게 성화할 것인가는 유대교 가르침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예물이 피로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학살자들에 대한 저주 대신에 제자들에게 죄와 회개를 말씀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식민지 지배 정책은 정치-경제-군사적 지배에 관심이 있었지 종교적 지배에는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반란 일으키지 않고, 세금만 잘 내면 그들이 무엇을 믿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원활한 지배를 위해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였고, 종교지도자들은 적절히 대우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대사제들이 로마 군인들과 아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다는 것을 예수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은 로마가 금지하던 예배를 드리다 죽은 것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어쩌면 이들은 반로마 테러활동을 벌이던 열혈당원들로서 로마군에 쫒기다가 성전으로 도망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혹시 이들은 성전 문고리를 잡은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성전으로 피신했으나 이런 관습을 무시하고 성전까지 따라 들어온 로마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전체 유대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대대적인 반 로마 봉기에 나서도록 촉구하기위해서 일부러 성전을 죽음의 장소로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은 유다라는 지도자에 의해 대대적인 반 로마 항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다시는 뭉쳐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수십 내지 수백명 단위로 묶여서 로마가 다스리던 광대한 지역 여기저기로 보내지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될 때까지 2천여 년간 유지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 말씀을 읽어보면, 왜 예수께서 죄와 회개를 말했는지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망원경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분노가 보입니다. 그러나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열혈당원들인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양면성을 모두 지적하고자 죄와 회개를 말씀하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인으로 당연히 동족을 무참하게 학살한 빌라도에게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어찌 피가 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에 맞선 저항이 의로운 행동이기는 하지만, 극한 투쟁 만이 항상 옳은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투쟁은 일상의 행복을 고스란히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민중들은 생업에 종사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로마 항쟁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희생하기를 강요합니다.
몇 년 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갈릴래아 수도였던 고대도시가 발굴되었습니다. 온 도시가 완전히 불타고 철저히 파괴된 후에 땅속에 묻혔다가 2천년 만에 그 흔적이 햇볕아래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고고학자 및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갈릴래아 수도였던 이 도시의 원로들은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는 대신 로마군으로부터 치안유지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가운데 번영을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발굴된 모자이크들은 당시 건물들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결국 열혈당원들이 이 도시에 숨어들어와 대로마 투쟁을 벌이게 됨으로써 이 도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 결과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살던 도시민들도 대부분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사후에 일어난 유대전쟁도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고 지도상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흔히 투쟁의 와중에서 강경노선에 반대하여 맞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즈음 북한 미사일 위기나 노조투쟁들을 보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명분과 이유는 분명히 있어 보이지만 그러한 강경노선이 과연 유일한 선택이며, 최선의 길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투쟁의 국면에서는 항상 자신들은 투쟁은 정의롭고 상대방은 불의한 자들로 규정됩니다. 자신들은 선한 무리이고 상대방은 악의 집단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백퍼센트 선도 없고 백퍼센트 악도 없습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순간과 상황 속에서 선악과 옳고 그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구분이 불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상황 속에서만 그렇게 여겨질 뿐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사 속에서 대부분의 충돌은 이기심의 충돌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정당한 권리가 부정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정당한 권리조차 이데올로기로 절대시하면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경직성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죄와 회개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운데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가?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다같이 음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서는 바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어놓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은 열매를 따볼까하고 기다리다가 삼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자 포도원 지기에게 잘라버리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는 주인을 설득합니다. 한 해만 더 두고 보자고 말합니다. 자기가 거름을 주고 최선을 다해 도롤 터이니 다음 철까지 두고 본 후에 그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시도록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이 말씀을 비추어 보면서 누가 무화과나무인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대결의 국면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바로 무화과나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화과나무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나무를 심은 농장 주인을 실망시키고, 행여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할까 농장 지기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자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충분한 재능을 우리에게 심어 주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무화과 열매가 변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우리를 변호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직접 심지 않았음에도 포도원지기는 그 무화과나무에게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돌보면서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그 포도원지기 같은 분이 계시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바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