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9 21:43
조회
933
[하나님의 나라] The Kingdom of God

사무엘상 15:34-16:13/ 고린도후서 5:6-10/ 마가복음 4:26-34

지난주에 저는 금강산댐 옆에 있는 최전방인 펀치볼이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인데, 춘천에서 소양강 땜을 굽이굽이 돌아가면 양구가 나오고, 양구에서 산을 하나 넘어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산 입구 검문소에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하는데, 그곳에서부터 민간인통제선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산꼭대기 등성에는 유명한 백두산부대가 포진하고 있는데 그곳이 남한에서 가장 추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 산을 넘으면 큰 분지가 보이는데 그곳이 해안면입니다. 6.25전쟁 때 미군들이 축구공이 떨어져 움푹 파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펀치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전쟁 때는 북쪽의 금강산이 보이는 김일성고지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흘려졌고, 수많은 지뢰가 뿌려져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뢰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전쟁 직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다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살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400여호의 집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뢰밭을 개간하여 간신히 살고 있는데 최근에 땅주인들이 나타나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라는 조그만 시민단체를 만들어 매년 일어나는 지뢰사고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7명의 민간인이 지뢰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뢰피해자가 가장 많이 사는 펀치볼에는 여러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3년 전, 제가 대학교회 설교시간에, 지뢰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한 지뢰피해자 한 사람이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꽃장사한다고 거짓말하고, 실제로는 거리에 누워서 찬송가를 부르며 구걸을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남선교회 여러분이 헌금을 모아 주셔서 그 분에게 전해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그 분에게 꼭 감사편지를 써서 회장님께 보내라고 부탁했는데도 보내지 않아서 속이 탓었는데, 알고 보니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하여 글을 쓸 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펀치볼에는 많은 지뢰피해자들이 정말로 한 많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올해 81세 되신 박춘영 할머니라는 분은 둘째 아들과 큰 손자가 지뢰사고로 죽고, 당신과 셋째아들은 지뢰사고로 다리가 잘렸습니다. 한 가족에 네 명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남편은 일찍 병사하고 설흔 서너 살 때 한쪽 다리로 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길렀으니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요. 이번에 갔을 때, 13살 때 아버지를 지뢰사고로 잃어버린 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무를 하러 산에 갔는데, 점심 때 도시락을 가지고 아버지가 늘 나무를 하던 장소에 가보니,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있고, 한쪽 팔이 짤려서 나무위에 걸려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4남 4녀를 둔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니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느냐고 하면서 울먹였습니다.
우리 단체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이런 분들을 도와드리려고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보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민간인지뢰피해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안”을 만들어서 다음 회기에는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시켜서 이 분들의 한은 풀어 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피해보상을 비롯하여 과거사를 풀기 위한 특별법들이 많은 만들어졌지만 지뢰피해자들 처럼 억울하고 불쌍한 사람들도 없습니다. 이번에 이런 분들을 만나서 피해보상을 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니까. 어떻게 받을 수 있겠냐고 하시면서 고개를 흔드시는 분들도 있고, 받지 못하면 억울해서 어떻게 죽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접경지역에 사는 분들은 입주할 때 관할부대에 각서를 제출했습니다. 지뢰사고와 같은 폭발물 사고를 당해도 군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보상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땅을 개간하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나라가 보상을 해주겠느냐고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했는지 정말 보상이 가능하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반드시 받게 될 것이지만 언제라고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지, 어떻게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느냐고 계속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국회의 일정과 법안의 진행과정을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작년 한해만도 외국의 지뢰피해자 구원 및 지뢰제거 비용을 30억원을 원조한 정부가 안보재해의 성격이 강한 국내의 피해자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분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풀어드릴 좋은 날이 와야 할 것입니다.
지뢰애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하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어쩌면 그 분들에게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상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대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고 외치시면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은 뒷전인 주제에,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데 그게 언제야?’ 하면서 수근대곤 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여 어느 때입니까?’ 라는 질문을 연발하였고, 제자들도 내심 큰 관심을 가지고 때가 되면 한자리씩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명확하게 알려달라는 요청에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종말의 날을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때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마12:28)” 예수님 자신이 직접 싸움터에 나가서 말씀과 행위로서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17:20-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곧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대변자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건설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분명하고 이미 왔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주역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이 대답한 말씀입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많은 성서학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해석이 나온 구절입니다. 땅에 뿌려진 씨가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낫을 가지고 추수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씨를 뿌리기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가 나고, 자라서 열매 맺는 것처럼, 저절로 나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비록 우리에게 가려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참고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고, 종말적인 변화에 대한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시작은 은폐되어 눈에 뜨이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시대와 이 세계 안에서는 눈에 뜨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이 시대와 이 세계 안에서 시대와 세상을 변혁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새롭게 출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일어났고, 또 언제나 새롭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건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의 날의 도래가 얼마나 분명하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져 나무로 성장하면 3m 정도로 커서 새가 깃들이고 둥우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스럽게 출현하는 것이지만 그 나타난 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크게 나타납니다. 이는 ‘누룩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대의 것이 최소의 것 속에 숨겨져 있고, 가장 작은 것 속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작은 것이 그 속에 가장 큰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시작과 상상도 못할 결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미 구약성서에 예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지만 크리스천들은 특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바로 겨자씨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스릴과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이 몇 배나 큰 골리앗장군을 돌팔매로 이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이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는 장면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제사장 사무엘은 자기가 임명한 사울왕이 무서워서 덜덜 떨면서 몰래 베들레험에 사는 이새에게로 갑니다. 그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성읍 장로들을 베들레험으로 소집합니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장로들은 불안해하면서도 “좋은 일로 모인다” 는 제사장의 말에 위안을 삼으면서 베들레험으로 모였습니다. 이새의 자녀들을 만난 사무엘은 첫눈에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 이 친구에게 얼른 기름부어 왕으로 세우고 출행랑을 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고 하시면서 거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일곱 명을 모두 보았으나 모두 거부당하고, 결국 양떼를 치고 있던 막내아들 다윗소년을 불러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아마도 장로들은 사무엘이 무언가 실수한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믿어지지 않아서 웃어 넘겼을 것입니다.
소년 다윗의 왕위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믿어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후에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고 북과 남을 하나로 통일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잘 것 없었으나 하나님은 소년을 통하여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사람들을 깜작 놀라게 하고, 세상을 뒤흔드는 그런 굉장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작지만 미래를 향한 큰 꿈을 가지고 서서히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매우 어려운 개념인 것 같으나 단순화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할 때에는 반드시 비유를 들어서 단순하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들어있는 40여개의 비유 말씀 가운데 1/4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갖는 속성이랄까 아니면 이념, 혹은 성격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오후부터 일한 사람이나 모두 같은 임금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말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침에 온 사람이 임금을 많이 받고 저녁에 온 사람이 임금을 적게 받는 당연한 생각을 거부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와 같이 맨 끝이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맨 끝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권력자들이 정하여 제도화시킨 법의 기준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외치면서 인간의 高下를 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인간은 적어도 생존권에 대하여 평등하여야 한다는 놀랍고 새로운 원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이 나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가는 주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끝에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이 나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 마리의 양을 버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것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원리는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봉하듯이 그 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합니다. 실로 예수님 그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모방하고 그의 가신 길을 뒤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나타날 영원한 나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9:1)”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소망도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서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필경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몸을 떠나서 있든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몸으로 행한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마음이 든든할 수 있는 믿음, 아니 어떤 위기에서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믿음, 그것이 우리가 얻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힘의 원천입니다.
보잘 것 없는 소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막내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분명히 이 땅의 모든 작은 자들, 작은 일들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 나라의 싹을 움트게 하고 계실 것입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적은 임금이라도 받아가야 하는 품꾼들에게 하루의 임금을 더해주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천리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입니다. 저는 지뢰피해자들과 같이 연약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이 기를 펴고 살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거기에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

예1)히라노교회에서의 경험- 86세의 할아버지 세례문답, 할머니의 정신질환과 교회 출입,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할아버지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아, 믿으니까 세례받으러 왔지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2) 홍종명화백의 그림, 과수원과 두 아이, 북에 두고 온 두 딸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홍화백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믿음- 기억하는 것,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김학수 화백의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 못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