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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8 21:43
조회
1081
제목: 복 있는 사람
채수일 교수(한신대)

성서: 시 1편/ 마태 7,7-11


1.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오늘 세계의 최강국인 미국 대륙의 광활함과 그 자연의 아름다움, 또 그 엄청난 군사력과 자본의 힘에 놀라게 됩니다. 세계에서 아름답고 큰 도시들도 미국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뉴욕은 세계 제 1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욕은 맨해튼, 브루클린, 브롱크스, 퀸스, 스태튼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뉴욕 가운데 뉴욕이라면 단연 맨해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뉴욕에 사는 사람을 뉴요커라고 하지 않고 맨해튼에서 사는 사람을 뉴요커라고 합니다. 유럽인들이 맨해튼에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는 인디언인 이로쿼이족과 알공킨족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맨해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알공킨족으로 ‘언덕이 많은 섬’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1626년 네델란드 서인도 회사의 페테르 미노이트가 불과 24달러에 상당하는 물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맨해튼 섬을 알공킨족에게서 사들임으로써 맨해튼은 유럽인의 식민지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디언에게서 단돈 24달러에 산, 아니 헐값에 빼앗았다고 해야 할 맨해튼 섬이 지금은 세계 최고의 정상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물론 국제정치,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 전위성과 방대함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가장 치열한 경쟁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세계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맨해튼의 5번가와 7번가 사이의 넓은 구역에 19채의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있는데, 그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만 6만 5천명이고, 해마다 17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이곳은 라카펠러 센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록펠러로 알려져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알려진 존 데이빗슨 라카펠러 1세(1839-1937)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공황기에 실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 존 데이빗슨 라카펠러 2세가 건설한 라카펠러 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존 라카펠러 1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이룩한 엄청난 세계적 부를 보기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은 라카펠러 왕국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부자들이 많으니까요. 그러면 왜 지금도 사람들이 라카펠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세계적인 재산가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류를 위해 가장 크게 쓴 세계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석유회사로 출발하여 40세에 이미 미국 20대 갑부 중 한명으로 선정된 그는 ‘내 재산은 온 인류를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그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인류를 위하여 큰 일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 세계 명문대학의 하나가 된 시카고 대학, 새로운 백신개발로 질병퇴치에 기여한 ‘라카펠러 의학연구소’(1901년), ‘사회보건국’(1911년), ‘제1차 세계대전 후 구호사업’, ‘북경 유니온 의과대학’(1914년), 미국의 해외선교, 미국국립공원조성,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 ‘클로이스터 미술관’, ‘UN 본부’(1946년 락카펠러 2세가 뉴욕 이스트 강변 부지를 기증하여 세워짐),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무역센터 등 그의 이름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의 큰 기부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라카펠러가 세계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 또 그 재산을 인류를 위해 크게 쓸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어머님의 신앙의 영향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일라이저 라카펠러는 엄격한 스코트랜드 장로교 출신이었습니다. 도덕적이고 준엄하며 금욕주의에 가까운 절약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카펠러에 대한 전기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유달리 재산을 모으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가 7살 때에 이미 야생 칠면조를 부화시켜 비싼 값에 팔았고 그렇게 모은 동전을 어머니가 거실의 궤짝 위에 두었던 푸른 색 자기 사발에 모았고, 그렇게 3년을 저축한 돈 50달러를 이웃집 농부에게 이자 7%를 받고 빌려주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1년 뒤 원금과 함께 이자 3달러 50센트를 받은 라카펠러는 크게 감동을 받았는데, 3달러 50센트라면 그가 하루 열 시간씩 열흘은 감자를 캐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자가 된 것은 그의 돈버는 재주보다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들어 평생 동안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장로교회의 격언, ‘무절제한 낭비의 결과는 무자비한 가난뿐이다’라는 격언의 결과였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데 그는 단지 일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큰 포부를 위한 디딤돌이 될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휴이트 앤드 터틀 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된 그는 주급 4달러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 동안 회계장부를 썼다고 합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장부를 기록했으며, 한 푼도 소흘히 하지 않고 수입과 지출금, 저축과 투자금, 그리고 사업과 자선금의 내역을 작성해 나간 것입니다. 매주 그는 싸구려 하숙집의 집세로 1달러를 지불하는 것 외에도 소액기부모임에 75센트를, 그리고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에 5센트, 빈민구제활동에 10센트, 해외선교활동에 10센트를 헌금했습니다. 그는 3달러 50센트의 주급에서 일정하게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이런 십일조 정신은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주었다는 이른바 ‘라카펠러 10계명’의 3계명에 실려 있습니다.
평생 동안 꼼꼼하게 회계장부를 기록하고, 금욕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절약하여 낭비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할 때는 크게 하는 이런 정신은 그의 아들 라카펠러 2세에게도 전승되었습니다.
라카펠러는 19살에 교회의 집사가 된 후, 교회를 떠난 적이 없었고 또한 교회학교 교사로서 늘 봉사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여 아무리 바빠도 예배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교회학교 교사로서의 봉사를 소흘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언제나 낙천주의자였습니다. 사업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에도 그가 흔들림 없이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자기 재산은 인류를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망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첫 직장을 가졌을 때부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매일 아침 6시 반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하고 세심했던 그는 일을 마친 후에도 ‘기회가 왔을 때 조심해야 해. 자만심에 빠지면 실패하기 쉽지. 서둘러서 잘 되는 일은 없어.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야’라고 늘 다짐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카펠러처럼 오늘 하루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 자만심에 빠지지 않는 사람, 쉽고 빠른 길을 가지 않고 힘들고 더디 가더라도 정도를 걷는 사람,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말라기 3,8-10), 교회학교 교사건 무슨 직분이건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순종하며 충성하는 사람, 철저하게 절약하되 선한 일에는 크게 쓸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육간에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카펠러는 분명히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라카펠러 외에도 당시 부자는 많았고, 지금도 부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자가 라카펠러처럼 자신의 부를 인류를 위해 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다른 세계의 부자들과 달리 복 받은 사람이 된 것은 그가 그의 부를 인류를 위해 크게 쓰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했고, 또 그 고백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2.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 해가 시작될 때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서로 덕담을 나눕니다. 건강의 복, 재물의 복, 자녀의 복 등 저마다 간구하는 복이 다르지만 인간이 복 받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인종과 종교, 보수와 진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모두 한결같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잘 못된 기복신앙은 비판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복의 수단으로 시험하거나, 하나님을 매수하려는 기복신앙은 잘 못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진실로 복 받기를 원하고, 또한 복 받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복을 베푸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위에서 번성하여라’(창 1,22)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도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 내려 주셨으며,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복 내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면서 복 받은 사람, 복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만민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2-1. 시편 1편의 시인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어성서인 Good News Translation에 따르면 ‘악인들의 충고를 거절하며, 죄인들의 예(example)를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주님의 율법을 순종하는데서 기쁨을 찾으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공부(study)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독일어 성서는 복 있는 사람을 ‘악인들의 충고를 따르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을 걷지 않으며, 빈정대는 자들 가운데 앉지 않으며, 주님의 명령을 기뻐하며, 그 명령을 밤낮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아니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잔머리나 굴리면서 꾀를 내어 눈앞의 작은 이익을 탐하는 소인배 같은 악인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고 흠집을 냄으로써 반사이익을 취하는 악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인들과 오만하며 빈정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그가 어울리는 사람처럼, 그런 사람만큼의 인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오만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악하고 오만한 사람이 됩니다. 선하고 뜻이 높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친구들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부정문의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이제 2절에서는 긍정문의 형태로 서술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하며, 말씀을 조용히 소리 내어 쉬지 않고 낭송하는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소리 내어 낭송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마음에 기쁨을 안겨주는’(시편 19,7-8)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내리실까요? 이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되는’ 복을 받습니다(시 1,3). 성서는 영혼의 복과 육체의 복을 나누지 않습니다. 복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이며 또한 영적이며 미래적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주신 복은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며, 큰 민족을 이루어 크게 이름을 떨치고, 만민이 그들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창 12,2-3; 창 22,17-19; 창 28,13-15)이었습니다. 시편 1편의 시인도 복 있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고 노래합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져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 영혼의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성서가 약속하는 복, 성서가 증언하는 복 있는 사람은 ‘값싼 은혜의 낙관주의’나 ‘눈먼 성공주의’가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철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열매는 너무 일러도, 너무 늦어도 제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제 철을 만났을 때 맺어진 열매가 가장 향기롭고 맛있는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은 삶의 열매를 맺을 철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철을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여호수아처럼 용감하게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 하십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 책에 씌여진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 1,7-9).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으며, 심판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며,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이 더 잘되고, 뻔뻔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더 잘사는 현실을 보고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악착스럽고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자기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여 오만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공연히 시기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악한 사람들의 길이 결국은 망할 것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길을 서두르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을 내려, 만민이 그 사람 때문에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도 복 있는 사람, 영육 간에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