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버마 백성의 고난(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3:39
조회
464
버마 백성의 고난(Ⅰ)

역사적 배경

버마 사람들은 정치, 종족, 지역 등을 상관치 않고 내전과 군사정권의 억압으로 30년 이상을 고난당하고 있다. 잔혹한 군사정권치하 수십년이 지난 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은 1988년 미얀마전국에서 수천명의 시위군중을 학살한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군사독재는 강력한 국민적 압력에 무릎을 꿇고 1990년에 총선을 실시하였다. 전국민주동맹당(THhe National Lague of Democracy Party:NLD)이 전 투표자의 80%이상을 획득하였으나 군사정권은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많은 시민을 투옥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1989년부터 NLD 지도자 아웅산 수키(AungSan Sun Kyi)는 가택 연금된 후 6년 동안 연금상태에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선출된 국회의원들이나 그 외 다른 민주인사들은 망명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국내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은 체포되고 고문받고 살해되었다. 그때부터 군부독재는 정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자의적인 구금, 재판없는 처형, 강간, 강제노역, 강제징집, 고문, 그리고 소수인종과 민주인사들을 음해하는 지속적인 캠페인 등을 포함한, 미얀마민중에 대한 조직적 억압을 지속하여 왔다.
군, 정보기구에 의한 감시는 일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동안 독재와의 공조하에 세계의 헤로인 대부분이 버마에서 수출되고 있다. 또한 미얀마민중들은 점점 빈곤의 늪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동안 국가예산의 50%가 무기구입에 사용되고 있다. 아시아 최부국 가운데 한 나라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하나가 되었으며 20세기 최악의 인권기록 중 하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버마교회는 1500년대에 시작되었고, 1800년에는 계속성장을 했으며 지금도 성장중이다. 어떤 통계에는 전 국민 중의 기독교인의 비율이 7%이상이라고 하며 대부분이 소수종족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이든지 자치와 자유를 위해 수 십년간 투쟁해오고 있다. 그들을 분산 통치하려는 정책의 일부로 독재정권은 종교적 차이들을 이용하여 내부 분열과 증오를 유발시키고 있다. 박해는 미얀마인 뿐만 아니라 소수인종들 사이에 포함되어 널리 퍼져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미얀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언을 계속하며 성장하고 있다.

1
버마의 복잡한 투쟁의 역사는 이 나라의 최근 사건들에 계속 영향을 주어왔다. 최소한 67개로 나뉘어진 원주민 종족집단들이 미얀마 내에서 확인되어 왔고, 후에 영국 식민지 시대때 발표된 통계조사에 따르면 대체로 242개 언어와 방언들을 사용하는 다양한 종족집단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세기동안 근대 버마의 다양한 사람들은 넓고 비옥한 중앙평원과 이 나라의 변방지역인 산악지역에서 살고 있다. 몇몇 종족집단은 아시아 여러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며 의상에서 가치관까지 여러 부분에 영향을 주는 다른 전통과 문화특징들을 보유하고 있다.
불신과 대립과 잦은 전쟁이 전국토로 번져 종족집단들이 다른 종족집단들을 지배하려고 싸웠고 또 다른 종족집단들은 단순히 독특한 종족으로 생존해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게 될 때까지는, 현재 미얀마라고 알려진 이 나라는 한 지배자에 의해 지배되는 통일된 나라는 아니었다. 식민정부는 현재의 미얀마국경을, 그리고 모든 종족집단이 한 민족으로 살도록 정했지만, 각 종족집단원 그들 자체의 독특한 전통과 문화적 가치들을 보존할 수 있는 땅을 원했다. 종족집단들간에 미해결된 갈등과 오해가 자주 표면에 부상되었고, 때로는 폭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폭력은 종족집단들간의 불신과 혐오감을 심화시켰다.

1948년 버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그 헌법은 이 나라를 주로 버마인이 점유한 7개구역으로 나누고 친(Chins), 카친(Kachins), 샨(Shans),카렌(Karens),카야(Kayahs),아라칸(Arakanese),몬(Mons) 등 이나라 7개 주요 종족집단들을 위한 7개주로 나누었다.
독립직후 내전이 발발했다. 버마 공산당이 최초로 무기를 들었다. 정권을 잡은 버마인 정부가 결코 자신들에게 독립적인 원주민으로서 살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카렌족이 1949년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곧 다른 종족들도 이 폭력사례를 답습했으며 무장투쟁은 점점 확대되어 사실상 이 나라의 구석구석을 쇠진시켰다.

현재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공포, 증오, 불신이 수세기 전부터 존재해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현재의 미얀마의 갈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버마내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그 어떤 과정도 공개적이고 솔직해야 하며 아울러 이 나라 역사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2.
종족집단간의 지속되는 긴장들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풍요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근대적 공항들 가운데 하나를 보유한 국제무역중심지로서 번성한, 경기 좋고 붐비는 랭군은 수개의 국제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석유와 쌀을 상당량 수출하는 많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미얀마는 또한 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정치적 민주주의와 동남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언론을 구가했었다.

네윈 장군이 1962년 쿠데타를 통하여 권력을 잡자 그의 군대는 갑자기 미얀마의 개방과 잠시나마의 풍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새로운 국가정부는 산업부문간의 생산과 분배, 상품의 수입, 수출을 포함하여 경제를 철저히 규제하였다. 군대가 통치하는 미얀마 특유의 사회주의는 전통적인 미얀마 이상주의, 불교철학, 마르크스주의적 수사학의 뒤범벅이라고 묘사되었다
그러한 현실적으로 네윈 장군이 자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라 부른 ‘버마식 사회주의’는 포악한 군사독재를 덮는 위장술 그 이상이 아니었다. 이 정권은 모든 정치활동을 억압했으며 모든 가시적인 영리기업을 국유화하였다. 수 년후, 미얀마는 전체주의국가로 변형되었다. 1987년 국제연합은 미얀마를 최후진국가 수준의 하나로 지정하였으며 엘살바도르와 에디오피아와 같은 수치스러운 국가범주에 넣었다.
점점 악화되는 미얀마의 정치, 경제적 위기는 결국 1988년에 전국적인 반 군사정권 봉기를 불러일으켰다. 군사정권은 유례없는 잔혹한 수단으로 대응하였다. 군대가 민주화 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수 천명이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버마군대는 1988년 9월18일 권력 재 장악을 결정하고 새로운 군사위원회인 「국가법과 질서회복위원회」(The 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SLORC)를 결성하였다. 외화보유고가 미화 1천만내지 1천2백만 달러에 머물렀다. 외채가 50억불로 GNP의 70%에 육박했다.
SLORC로서 더욱 좋지 못한 일은 국제사회가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짓밟은 것에 대한 대응으로 모든 국제원조를 유보한 것이었다. 이는 버마를 더욱더 심각한 경제적 파멸로 몰아넣었다.

3.
반정부 봉기가 일어난 초기에서부터 「타트마다우」(Tatmadaw) 라고 알려진 미얀마군대는 정기적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버마종족지역에서는 별로 없었고 주로 삼각지 지역에서 카렌족을 대상으로 1950년대초에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는 동북 미얀마지역의 카친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들은 그런 공격작전을 계획하고 수행해 나가는데는 종족문제가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 중반에, 군사위원회와 봉기집단들 사이의 평화협정이 실패로 끝난 후, 네윈은 도시주변에 보안경계선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군대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다. 「타트마다우」는 봉기시민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지방마을 사람들 사이에 네 가지 주요 연결고리(식량, 기금, 정보, 보충병)를 차지하려는 노력으로 「피야 레이 파」(Pya Ley Pha :네가지 단절) 이라고 알려진 반봉기 작전을 구상하였다. 최근 몇 년 동안 「타트마다우」대변인은 증가되는 국제적 비판을 의식하고 「피야 레이 파」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피야 레이 파」에 대한 문서는 잘 정리되어 왔고, 실제로 네윈의 오랜 부관인 산 유 육군준장, 전 국방장관 틴 우 장군 등의 군지도부들이 공개연설들을 통해 이 작전을 적극 찬양하곤 했다. 이 전략은 특수한 것이 아니고 영국군대가 로버트 톰슨경의 지휘하에 말레지아에서 CPM봉기를 섬멸하는데 사용한 ‘새마을’전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피야 레이 파」는 또한 톰슨의 충고에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이 채용한 ‘전략적 촌락’ 작전과 개념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두 전략은 모두 인권에 대한 총체적 유린이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타트마다우」는 미얀마의 지도를 6개(후에 9개)지역군 사령부로 나누고 지도를 3개색으로 칠하였다.: 흑색은 완전한 봉기대 통제구역, 갈색은 갈등지역, 백색은 “자유”지역.「타트마다우」는 미얀마지도를 전부 백색으로 칠할때까지 봉기지역을 차례차례 청소할 계획을 세웠다.
흑색 ‘중핵(中核)’지역, 갈색의 ‘게릴라지역’에 대해 「타트마다우」는 일련의 표준전술을 개발했다. 이 전술은 조금 고친 후 사실상 오늘날까지 변동 없이 존재하고 있다. 이론상, 「타트마다우」는 농촌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시도로 그 지도 작전을 위장하였다.

군사령관들은 이 작전을 시민전쟁의 일환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의 이 작전은 원래적으로 군사적이며 빈농들, 농촌주민, 그리고 베트남과 라오스 산악지대 사람들 수백만을 강제 이주시키는 ‘전략적 촌락’과 동일한 기본적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타트마다우」는 40-50평방 마일 정도의 반란지역을 선택하여 집중적 군사작전을 위해 이 지역을 차단함으로써 이 작전을 실시하였다. 군부대들은 그 후 그 지역 밖 들판이나 숲에 사는 주민들을 찾아가 평원이나 둔덕의 주요둔지에 위치한 「타트마다우」중 이주하지 않고, 남아있는 마을사람들은 반란군으로 취급받을 것이며, 현장에서 사살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처음 방문한 후 군대는 정규적으로 식량을 징발하고 곡식과 나락을 못 먹게 만들었고, 주민들 말로는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의혹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총살되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전략적 촌락화’를 자신들을 강제이주 시키기 위한 계산된 테러작전으로 간주하였다.(마틴 스미스 저<버마:봉기와 인종정치>중에서 인용.

군이 청소하고자 하는 지역들에서는 ‘네 가지 단절’작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제 2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유-전투지역’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 ‘자유-전투지역’은 군이 심문없이 누구나 현장사살할 수 있는 명백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미얀마 내 많은 고립지역에서 테러정치를 자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1백5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민간 빈농들이 강제적으로 집,가정,안전,고향땅을 빼앗기고 많은 경우 자신들의 목숨자체까지도 빼앗긴 채 미얀마 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 만명의 이주민들이 현재 정글 깊이 숨겨진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숲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메며 연명해가고, 마침내는 발각되어 군대에 의해 약식재판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끊임없는 공포속에 살고 있다.

4.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실제 싸우기보다는 군이 자행하는 인권유린을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 도주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인권침해는 군이 임금지급도 없이 흔히 음식도 없고 의료적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부락의 남성, 여성, 아동들을 강제 노동시키는 일종의 노예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러 인권단체들이 체록한 인터뷰에서 주민들은 공통적으로 이 ‘노예제’의 두가지 형태를 보고하고 있다.

▶짐운반
정글 속에 차도가 없기 때문에 「타트마다우」(버마군)는 민간인들에게 산악을 넘어 전쟁지대까지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전형적인 짐들은 약 40파운드 가량 되며 민간인들을 죽이는데 사용될 레이숀, 중무기, 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트마다우」는 수십만의 주민들을 짐 운반에 강제동원하고 있으며, 많은 부분의 짐꾼들은 학대, 질병 때문에 공방전투장에서 사로잡혀 죽었다. 많은 경우「타트마다우」는 짐꾼들을 전투에서 자신들을 방어해주는 인간방패로 혹은 지뢰소거에까지 사용하고 있다.
「타트마다우」는 때로 어떤 주민들을 수개월이 넘는 장기짐꾼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군대는 짐꾼들을 전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모아오는데 그 까닭은 짐꾼들이 낯선 지역에서 길을 잘 몰라 도망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장기짐꾼, 단기짐꾼 어느편이나 등, 목, 어깨, 팔 등에 로프가 파고들고, 찰과상을 주기 쉬운 짐이 계속 짓이겨 피부찰과상, 전염병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타트마다우」가 여성을 짐꾼으로 모집할 때, 인권유린은 배중된다. 군인들의 무거운 짐들을 견디어내는 끝없는 나나들을 보내는 중에 밤에는 군인들에게 일상적으로 성적 유린을 당하고 있다.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강간당하는 것에 저항할 경우, 그들은 흔히 잔혹하게 구타당하고 손발을 절단당하고 때로는 살해당한다.

▶강제노역
혹사당하는 것은 똑같지만 강제노역 노동자들은 짐꾼들이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노인에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은 군 방어부대, 도로, 철도, 대농장 등등의 건설장과 같은 노역장에서 자신들의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오늘날 어떤 프로젝트들은 미얀마변경에 살고 있는 부락민들의 삶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군부 ‘변경개발계획’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노역 노동자들은 관광에 관련된 부흥 및 건설계획 등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사업에 전국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강제노역을 피하기 위해 변경지역으로 도주한 난민들은 자주 군인들이 노역장에서 마을 주민들을 구타, 강간, 살해하는 광경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체인과 족쇄들만 배급받았으며 임금, 식량지급은 받지 못했고 치료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버마정부는 미얀마에 강제노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부인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장시간 노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불교의 적선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장군들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의 불교도들이 흔히 선행을 하고 적선을 하기 위해 사회봉사를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기간사업에 노동력을 ‘기부’한다는 것이다.

5.난민문제
45년에 걸친 버마 내전에서 많은 종류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난민집단은 군사정권하에서의 지독한 인권유린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서 이웃나라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는 주민들이다. 버마에서 망명한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태국의 난민수용소에서 살고 있다. 일부 난민들은 이미 20년 이상을 태국 난민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른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지에서 살고 있다. 이들 난민들 중에서 거의 전부가 수용정부로부터 공식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UN으로부터 지원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부락민들 대다수는 실제 전쟁을 피해서라기보다는 군사정권하에서 인권유린을 피해 고향땅을 등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쟁 당사자들 간의 정권협정이 자신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오긴 전에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또다시 강제노역, 강간, 자의적인 처형, 종교적 핍박 혹은 이주 등을 강요당하지 않을 보장을 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식들을 건강하고 행복한 분위기에서 키울 수 있고, 집과 전답을 재건하여 생산물을 향유할 수 있을 보장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만이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웃나라로 도주하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국경지대의 정글 깊은 곳에 망명처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은 제2의난민 집단이다. 이와 같은 국내 이주민들은 근처의 군사작전을 피하고, 때로는 부주의한 가운데 자유-전투지역으로 숨어 들어가는 등 험악한 정글지대를 배회하기 때문에 그들의 확실한 통계숫자는 알 수 없다. 어떤 추산통계로는 1백50만 가량 된다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고난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수많은 어려운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국내이주를 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얀마군은 산악지대에서 사는 카렌족, 혹은 이주지역에서 산악지역으로 돌아온 카렌족을 모두 카렌족 게릴라의 부역자들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버마군은 이런 지역을 ‘흑색지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는 죄 없는 민간인들은 미얀마군인들에게 반인도적인 상태에서 굴욕당하고, 처형당하고, 고문당하거나 강간당하고 있다. ‘흑색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미얀마군인들만 보아도 두려워하며 그들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계속 옮겨 다닌다.
영구적이고 안전한 집을 갖지 못한 국내 난민들은 영구적인 공포와 탈출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태국의 난민수용소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수세대를 걸쳐 살아 온 자기들의 고향땅에 머무르려는 우둔한 것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6. 국민들의 삶
버마국은 수풀, 광물, 석유 등과 같은 천연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다. 전체 땅덩어리의 30%가 상업용 삼림이고 20%이상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이다. 이런 광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는 오늘날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다. 버마는 아시아 많은 지역을 먹여 살릴 수 있을만한 쌀 생산력을 지니고 있지만 미얀마 국민 대다수가 현재 심각한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다.

오늘날 외국 회사들은 이 천연자원을 채취하여 빠른 이익을 얻으려고 미얀마에 달려들어 오고 있다. 이러한 투자가 도대체 일반국민들을 이롭게 하는지에 대한 입증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사실 쌀 수출은 농촌, 도시 양쪽의 주민들이 먹을 쌀을 더욱더 부족하게 하고 있다. 영양실조는 쌀이 풍부한 이 나라에서 점점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통계들은 전 국민의 문자 해독률을 81%로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문자 해독 인구는 이보다 훨씬 적은데 그 까닭은 아주 소수의 부락아동들만이 초등교육 수준 이후 교육을 계속하고 있으며 대다수 농촌주민들은 읽을거리가 없어 읽기를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나 독서실은 농촌지역에 실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비참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 군인들, 학생들 그리고 모든 남녀 국민들은 모든 종류의 ‘파괴분자들’로부터 잘 보호해주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군사정부에 충성하고 복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미얀마 인구의 약 7% 가량 된다. 하지만 정부는 종교를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간주하여서, 종교조직이 언급하는 어떤 사회적 관심도 정치에 개입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군은 또한 종교적 교훈을 군부의 지배를 합법화하는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정부는 계속해서 교회가 사회, 정치적인 일에 관련하여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로마서 13장을 이용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을 말로써 선포할 자유를 경험하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의 복음의 가치가 나날의 사회의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도록 하려고 할 때에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