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2000년은 세계화에 대항하는 범세계적 저항의 해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1-02-23 23:27
조회
1375
2000: 세계화에 대항하는 범세계적 저항의 해

Walden Bello*


작년은 세계경제사에서 1929년과 같은 맥락에서 규정될 만큼 경기침체를 경험한 시기로 기록될 지 모른다. 물론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는 여전히 견고한 것으로 보이고 워싱톤, 유럽, 아시아의 많은 엘리트들은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이만큼이나마 진정시킨 것을 자축하며 WTO 체제하에 새로운 무역협상 테이블인 뉴라운드 개막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목격한 것은 "그토록 견고한 모든 것들이 한줌 연기로 변화되었구나"라는 싯귀가 읊어질 그날을 도래시킬 만큼 드라마틱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2천년을 한달 남진 앞둔 1999년 11월 30일부터 12월 1일 시애틀에서 열리려 했으나 무산된 WTO 제3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근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6차 당사국회의에서도 똑같이 중대한 문제로 귀결되었다.


시애틀: 전환점

시애틀 사건의 역사적 규정작업은 여전히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시애틀 컨벤션 센타 안에 있던 개도국 대표들의 반란과 약 5만명의 시위자들이 거리에서 벌인 싸움과 엄청난 저항 가운데 형성된 폭발적인 상호작용을 빼놓고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거리의 저항가들은 저마다 다른 동기를 가지고 참여했고 그 의견차이는 꽤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제3세계의 대표자들과 시위군중 안의 차이는 그들 스스로가 느낄 정도였다. 분명한 것은 WTO 내에 노동 기준을 결합하는 것은 모순적이라 사실이 핵심적인 이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단 한가지에만 합치했다. 정의, 공동체, 국가주권, 문화적 다양성,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같은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업에 이끌리는 세계화 확장을 그들이 반대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시애틀의 붕괴는 세계농업시장에서 그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행사하기 위해 무능력한 유럽연합과 미국이 핵심 이슈들에 대한 그들의 이견을 연결시키고자 한, 발전 전략과 무관하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시애틀의 결과물은 시애틀 경찰의 야만적인 행위가 아니라 좀 더 쌈박한 것이어야 했다. 유니폼을 착용하고 평화로운 대규모 시위대를 급습한 정형화된 모습이 TV 카메라에 담겨지면서 당시 시애틀의 중심거리는 세계화의 위기를 대변하는 커다란 상징으로 비춰졌다.

1995년 설립된 WTO는 세계화시대에 자본주의라는 왕관에 박혀 빛나는 보석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그러나 시애틀의 붕괴로 인해, 그토록 힘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그들의 구조가 무시되거나 약화된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에 직면했고, 이제까지 가졌던 그 뻔뻔스러운 확신마저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세계화의 우두머리격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구가 사실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라는 것이고, 시애틀 이전까지만 해도 그 체제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로 자처하던 몇몇 대표자들마저도 WTO 체제의 투명하지 못한 과정에 대해 지적하였다. 예를 들면, 영국의 무역산업부 장관인 Stephen Byers가 "WTO는 현재의 형태로 지속될 수 없다. 134개 회원국 모두의 필요와 열망이 만날 수 있도록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해야만 한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현재는 확신과 관련한 세계 엘리트들의 위기가 분명하다.

시애틀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다. 작년 2월 방콕에서 개최되었던 무역과 개발에 대한 유엔 10차 회의(UNCTAD X)에서도 WTO와 브레튼 우즈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이나 의견 정도가 아니었다. 실제로 별로 뚜렷한 사건이 없는 국제 모임이었던 이 회의에서 반 IMF 활동가인 Robert Naiman가 당시 사임 직전의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의 얼굴에 파이세례를 퍼부은 사건은 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워싱톤에서 멜버른까지

네이먼의 행동은 앞으로 세계화와 반세계화 운동 사이에 커다란 대결 국면을 정초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진정 시애틀과의 연속성을 가진 새로운 운동들을 잇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4월 중순 워싱톤에서 있었던 IMF와 WB의 춘계회의에는 약 3만명의 시위대가 미국의 수도에 몰려들었고 약 1만명의 경찰이 그 도시의 북서쪽 가장 넓은 지역을 둘러쌌다. 4일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위대는 회의장이 있는 뉴올리언즈 주 19번가 거리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미리 진을 치고 있었던 경찰대열을 돌파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고 수백명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경찰은 자신들의 승리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워싱톤의 경우, 시위대가 작은 싸움에는 실패했다 하더라도, 결코 전체 싸움에서 진 것은 아니다. 이 투쟁을 조직했던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전의 저항에서 단 한사람이 동원될 수 있었다면 이제 수백명의 사람들이 동원된 것을 언급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와 쌍둥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국제금융기구에 대항하는데 3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승리라고 했다. 더욱이 워싱톤에 맞춰졌던 미디어의 초점은, 세계 전역의 수많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세계은행과 IMF가 세계곳곳에 빈곤과 고통을 강요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논쟁의 여지가 많은 기구라는 사실로 남게 되었다.

워싱톤의 투쟁은 곧바로 태국 북부 고지대인 치앙마이(Chiang Mai)로 옮겨졌다. 5월초 공동체들을 파괴하고 환경을 황폐화시킨 엄청난 프로젝트를 재정지원한 것으로 악명 높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이 33차 연례회의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회의 후 바로 마을을 떠날 것을 요청한 약 2000명의 눈에 ADB 지도부는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ADB 총재인 Tadao Chino는 시민사회 문제를 다루는 부총재급의 "NGO Task Force"를 즉시 설립했다. 2001년에는 더 큰 저항을 있으리라는 두려움으로 ADB는 2001년 연례회의 장소를 시애틀이 아닌 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호놀룰루로 옮겼다.

그러나 치앙마이는 ADB를 넘어선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이 태국의 가난한 농부였던 시위자들은 선진국의 중상층 젊은이들이나 노도조합들보다 더 응집된 반세계화 인식에 기초대규모 저항을 치앙마이 시위에서 보여주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치앙마이 행동의 핵심 조직가인 Bamrung Kayotha ("the Forum of the Poor"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네트워크 조직의 지도자 중의 한사람)와 같은 이들이, 시애틀 시위 등에 참석하면서, 치앙마이가 세계와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세계화에 대항하는 국제적인 저항의 고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전선은 9월초 오스트리아, 멜버른 남쪽에서 펼쳐졌다. 세계화에 더 자유분방한 색조를 가미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맬버른 부자들에게 "눈부신 제왕의 카지노"로 통하는 해변가를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회의)의 아시아태평양 정상회의 장소로 선택하도록 이끌었다. 많은 활동가들에게 "카지노"는 현재의 금융 세계화에 꼭 알맞는 상징으로 느껴졌다. 약 5천명의 시위자들이 거의 3일간 거리에서 저항하는 행동을 했다. 이들은 때때로 카지노의 입구를 봉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몇몇 대표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들어오고 나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 장면은 다시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시애틀에서와 같이 말을 탄 많은 경찰들이 시위자들을 거칠게 다루는 장면은, 이 사건을 전지구적 논의로 확대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프라하의 투쟁

얼마 후 이러한 투쟁의 기회가 유럽에게도 그 차례가 돌아갔다. 각 대륙으로부터 프라하에 온 약 1만명의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동부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에서 추계회의 연 브레튼우즈의 기구들과 계시록에나 나옴직 할 일전(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프라하는 이미 예고한 것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했다. 시위와 거리싸움은 회의장소에서 들어가려는 대표자들을 막거나 프라하의 옛 시가지로 이름난 곳에 있는 그들의 숙소로 대표자들이 돌아 갈려고 할 때 갖가지 혼란을 안겨주었다. 또한 반세계화 저항자들은 세계은행이 공식적으로 내놓은 회의 의제를 "효과적으로 포착했다". 그 다음 이틀동안에도 많은 수의 대표자들이 회의장소로 들어가는 것이 저지되자, 회의는 예정보다 하루 빨리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

프라하의 저항에서 중요한 것은 9월 23일 Vaclav Havel 체코 대통령의 주선으로 유명한 프라하의 성에서 시민사회의 대표들과 세계은행, IMF 지도부 사이에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양자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기는커녕, 더 넓혀졌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요구에 대한 답변에서 세계은행의 James Wolfenson 총재와 IMF의 Horst Koehler 총재는 상투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들의 주인인 G-7 정상들의 움켜지고 있는 입장을 벗어나는 것을 걱정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세계은행과 IMF의 옹호자인 George Soros 조차도 이 토론에서 Wolfenson과 Koehler가 "지독하게 잘못했다"고 시인하면서, 시민사회와의 가장 중요한 만남을 이들이 망쳐놓았다고 했다.

시애틀 이후, Bill Gates, Bill Clinton, Tony Blair, Kofi Annan, 그리고 나이키의 최고 경영자인 Phil Knight 같은 사람들이 주도했던 세계화가 "뒤로 밀쳐낸" 사람들을 다시 이끌어낼 수 있도록 세계경제시스템을 개혁하자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실제로 다보스 포럼은 개혁에 대한 질문을 전세계 엘리트들을 위한 회의에 가장 비중 있는 의제로 잡았었다.

그러나 시애틀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개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거의 없다.

가장 두드러진 개혁 선결과제인, 과중채무빈국(HIPC) 41개국의 외채상환을 경감시키기 위한 G7의 계획은 1996년 이 계획을 시작한 이래 실제로 경감한 액수는 단지 10억불에 지난 지 않는다. 이것은 지난 4년 6개월 동안 약속한 액수의 3 퍼센트에 불과한 것이다.

시애틀 회의 무산이후 1년이 지났고, WTO 총재인 Mike Moor가 사실상 시애틀에서 개도국의 저항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구실한 불투명하고 비민주적인 "콘센서스/Green Room"체제가 "비협상적"이라고 시인하기도 했지만, WTO내 의사결정과정을 개혁하자는 논의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국제금융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때면, 토빈세와 같이 투기자본규제에 대한 심각한 토론은 회피되고 있다. 개혁되지 않은 IMF는 자신이 현 체제 내 "소방시스템"의 중심을 계속해서 자임할 것이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먼저 신용상태를 선제적으로 검토하는 신용 라인(사실 이용하려고 하는 나라가 없다)과 몇몇 개도국이 참여하고 있는 아무런 내실이 없는 금융안정성 포럼은 지난 3년간 금융위기를 겪은 아시아, 러시아, 브라질에만 "혁신"적인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IMF와 세계은행은, 마치 봉건세습처럼 유럽인은 IMF의 총재가 되고 미국인은 세계은행을 이끄는 관행을 다소나마 벗기 위해 제3세계에게도 선거권이 좀 더 확대되도록 미국과 유럽연합의 선거독식을 자제해야 한다는 언급을 더 이상하지 않는다 점에서도 비슷하다.

준비에서부터 선진국 정부들이 자랑하는 자문과정의 실상은 부채문제와 관련한 "빈곤감소전략안"(PRSP)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이 이미 여기저기 안전망을 쳐 놓고 규제철폐를 통한 성장과 무역의 세계화에 대한 이전과 동일한 강조점을 가진 개발전략을 양산하는 상투적인 관료적 경영과정에 대중을 양념으로 참가시키는 얄팍한 노력 외에는 새로운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세계은행에서 사회개혁에 우선순위를 두는 혁신에 대한 강한 저항은 두 명의 개혁가를 사임토록 만들었다. 한 사람은 세계은행 내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Joseph Stiglitz이고 또 한사람은 세계개발리포트를 총괄하는 부서의 책임자인 Ravi Kanbur이다.


헤이그에서의 붕괴

1년에 걸친 저항은 강력한 초국적기업(TNC) 반대 흐름을 낳았다. 사실 세계은행, IMF, 그리고 WTO 역시 초국적 기업들의 장학생격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초국적기업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표출되고 있다. 미국내 조사대상자의 70%가 이러한 기업들이 자신들의 삶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응답했다.
온실 가스의 방출을 강력하게 방지하자는 데 대해 미국의 산업은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초국적기업에 대한 불신과 반대 운동은 2000년 12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6차 당사국 회의의 와해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지표는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경제의 엘리트들은 세계화의 모든 이익을 자신들이 챙기려는 한편, 지구가 원기를 회복하는데 드는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 뒤에서 이들을 동조하는 워싱톤의 움직임은 반 세계화 운동의 확신을 보증해주고 있다.

시애틀 이후의 상황을 평가해보면서,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선전하는 C. Fred Bergsten은 지난 4월 도쿄에서 열린 3자 위원회에서 "반세계화의 힘이 그 어느때보다 우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묘사는 이전보다 정확하게 표현된 것이다. 세계의 엘리트들이 그들 스스로 확신을 갖지 못하면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기관들 내에 정통성의 위기가 만연하고 있다. 만약 정통성이 다시금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 구조가 너무나 견고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구조적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왜냐하면 정통성은 구조가 갖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한번 그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비합법화의 과정은 다시 돌리기가 쉽지 않다. 참으로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초국적기업을 포함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핵심기관들과 실행방식들에 퍼져있을 법한 것들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Gramsci의 표현을 따르자면, "동의한 것들에 대해 물리는 작업"(withdrawal of consent)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방콕에 있는 Focus on the Global South의 대표. 필리핀 대학 교수.

- 이 글은 세계사회포럼에서 월든벨로가 강연원고 대신 나누어준 페이퍼를 이에 참석했던 황순찬 간사(천추교대안경제연대)가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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