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세계화 시대 교회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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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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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제6차 기획위원회 세미나 : “대안적 교회공동체 운동의 역사와 흐름”

세계화 시대 교회론 단상

장윤재 박사(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사적 조건과 맥락 속에서 교회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사적 조건이란 세계화(globalization)이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경제적 보편주의’와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분권적 지역주의’ 사이의 모순이다. 그것은 ‘시장 제국주의’ 대 ‘자급자족적 지역 공동체’ 사이의 모순이다. 전자가 주류담론이라면 후자는 저항담론이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그의 베스트셀러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세계화의 경제통합의 힘을 ‘렉서스’로 상징하고 민족주의적 힘을 ‘올리브나무’로 상징하며 그 둘 사이의 긴장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화는 일순간의 추세나 유행이 아니라 미?소의 냉전체제를 교체하고 들어선 새로운 국제체제이다. 물론 세계화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렉서스’를 추구하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단단히 자신의 ‘올리브나무’에 매달리도록 할 것이다. 그는 올리브나무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인종 청소와 같은 극단적인 파멸의 길로 간다고 경고하면서, 대신 자유시장과 민주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된다면 결국 모든 민족적 경계들까지도 사라지는 ‘평평한(flat)’ 세상이 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계 미국인인 예일대 법대의 추아(Amy Chua)는 그의 책『불타는 세계 (World On Fire)』에서, 프리드먼의 주장과 정반대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이야말로 비 서방국가들에서의 집단적 증오심과 민족적 폭력을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며 세계화가 바로 이런 온갖 재해들의 원인이라고 반박하였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가? 우리는 여기서 세계화에 대한 대표적인 대중적 오해들을 하나씩 규명하면서,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민족과 민족주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먼저 세계화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오해는 그것이 하나의 지구촌 ‘자유’ 경제체제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코르텐(David C. Korten)이 상세히 밝혔다시피 지금의 세계화 과정에서 실제로 창조되고 있는 것은 지구촌 ‘자유(free)’ 시장경제가 아니라, 놀랍게도, 금융자본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초국적 기업들(TNCs)에 의해 중앙집권적으로 기획되고 통제되는 지구촌 ‘독점(monopoly)’ 경제체제다. 예를 들어 1993년에 이루어진 모든 국제무역 가운데 오직 15%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 시장에서 이뤄진 거래였고, 나머지는 모두 초국적 기업 자사들 간의 ‘내부 거래(intra-firm trade)’였다.
(2) 세계화에 대한 두 번째 대중적인 오해는 그것이 자연적인 역사 진화의 산물이며 비정치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결코 정치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 실체가 아니다. ‘자유’ 시장 역시 국가 권력의 부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권력의 적극적인 공학적 설계물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자유’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필연적인 역사적 대세라는 신화가 만들어졌으나, 세계화는 이 세상을 금융과 기업의 이익이라는 렌즈로만 보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선택’에 의해 추진되어 온 것이다.
(3) 세계화에 대한 세 번째 대중적인 오해는 그것이 순수한 경제적 과정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성실히 경제개방과 교류를 추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류의 평화가 찾아온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맥도날드 햄버거가 들어간 나라끼리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프리드먼이 지적했듯이, “맥도날드(햄버거 회사)는 맥도넬 더글라스(전투기 회사) 없이는 번창할 수 없다.” 즉,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보이지 않는 주먹(hidden fist)’, 군사력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코쉬(Ninan Koshy)가 지적하듯이, 세계화와 군사화는 한 동전의 양면관계다.
(4) 세계화에 대한 또 다른 대중적 오해는 그것이 “모든 배를 물 위에 띄워” 모두를 경제적 승자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미국 CIA의 보고서가 기술하고 있듯이, “세계경제에 차오르는 밀물은 많은 경제적 승자들을 만들어낼 것이지만, 모든 배를 물 위에 띄우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국내외에서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정치적 ? 인종적 ? 이념적 ? 종교적 극단주의를 조장할 것”이다.
(5) 세계화는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대중적 기대와 달리 약소민족과 소수종족의 자결권과 다양성을 파괴한다. 한 예로,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가 상세히 증언하듯이, 과거에 자신들을 위한 다양한 작물을 기르던 티벳의 라다크 농민들은 이제 세계경제에 편입된 이후 그들의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한 가지 현금작물만 재배하게 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거대한 통신, 석유, 국제 금융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전 세계적 경제 통합의 과정에서 이 세상의 다양한 종족들은 더 이상 자신의 땅에서 주인이 아니게 되었다.
(6) 현재의 세계화는 각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다원적 세계화가 아니라 특정국가의 문화와 가치가 우선되는 획일적 세계화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여러 면에서 ‘미국화’와 동의어다. 1970년대 이후 10여 차례 지구촌을 강타한 금융 위기들은 결과적으로 각 국의 경제체제 특히 금융체제를 미국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로 유명해진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역시, “세계화는 강력한 정부 권력, 특히 미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임을 인정한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특히 자유무역, 유연한 노동시장, 그리고 국제 금융시장의 힘에 대한 존중이라는 미국식 독트린을 의미한다.
(7) 세계화에 대한 또 다른 대중적 오해는 그것이 곧 국가와 민족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그들의 책 『제국 (Empire)』에서, 이제 새로운 형태의 전 지구적 통치권, 즉 ‘제국’이 탄생했는데, 이 권력은 어떤 국민 국가가 제국주의적 정복을 수행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 밖’ 혹은 ‘역사 끝’에 존재하는 권력이라 주장하였다. 분명 오늘날 국가 단위의 결정이 점점 더 다른 국가나 초국적인 기구의 결정에 좌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국가와 민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도 국민 국가는 여전히 필수적 경제단위이며, 세계화는 국민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그것들의 역할의 재편을 의미한다.
(8) 사람들은 세계화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식민주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계 헤게모니(world hegemony)’의 상속사로 본 아리기(Giovanni Arrighi)에 의하면 우리는 현재 세계 헤게모니 상속의 네 번째 단계를 살고 있다. 사실 세계화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이후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오늘의 세계화가 지정학적으로 지구의 거의 모든 부분까지 확산되었으며 또한 인류의 삶 전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세계화는 지난 5백년 간 서구 사회가 자신이 이해하는 ‘진보’의 개념 아래 인류를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식민주의 역사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9) 하지만 민족 국가의 재건과 강화가 지금의 획일적인 세계화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세계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함에 따라 오늘날 많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횡을 통제하기 위한 국가의 시장 개입을 강조하며 케인스주의 경제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분명, 세계화 과정에서 ‘전능자’로 부상한 시장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하고, 제3세계 시민운동이 민족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주의로의 복귀가 모든 대안은 아니며, 국가가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우리는 빈부 격차와 환경 파괴를 대가로 했던 과거의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경제가 우리의 대안은 아니다.
(10) 오늘날의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장벽을 다시금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지역화(localization)’에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획일적이고 팽창 지향적이며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지금의 단일 지구촌 경제모델을 포기하고 세계경제를 ‘작은 규모(small scale)’의 지역 경제로 다원화하여 그들 간의 평등하고 호혜적인 상호협력관계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규모 시장경제는 언제나 자원 집약적이며, 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에 덜 유해한 작은 규모의 경제로 재편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가 걸린 사활적인 과제라고 일찍이 슈마허(E.F. Schumacher)가 역설한 바 있다. 한국의 농사꾼 천규석이 지적하는 것처럼 지금의 세계화는 제3세계 자급적 지역 공동체의 해체와 희생을 전제로 한 ‘임시적 풍요’요, 따라서 ‘종말이 예정된 풍요’일 뿐이다. 21세기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 자치 공동체’다. 요점은 자연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경제활동 규모도 반드시 그 한계 안에 제한되어야 하며, 친환경적인 작은 규모의 지역 경제들이 거대한 국제시장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덜 짜여지고 더 다원적인 세계(a less structured, and more pluralistic world)”가 약소국가와 친환경적 소규모 지역 경제들에게 보다 더 높은 생존과 번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형태의 지역주의다. 새로운 지역주의란 한편으로는 각 지역 경제의 온전성을 보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한 국제적 협력과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 ‘열린 지역주의’를 의미한다. 때문에 열린 지역주의는 모든 종류의 교역을 즉각적으로 중단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커피나 목화 등의 국제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에게 하루아침에 모든 교역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요지는 인간의 기초적인 필요(need)가 가능한 한 지역경제의 차원에서 충족되어야 하며 교역은 불가피할 때에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인류는 전통적으로 자기 지역에서 난 산물로 의식주를 해결해 왔다. 커피나 목화, 차 등 단작농업이 시작된 것은 노예제의 유산이다. 그러니까 ‘세계경제’의 시작은 노예제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열린 지역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기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하지 않은 원거리 무역이다. 지금의 세계화는 “지구적 종속에서 지역적 상호의존으로(from global dependence to local interdependence)” 근본적인 방향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라이더(William Greider)는 세계화의 가장 심오한 사회문화적 의미가 이제 인류가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준비됐든 안 됐든(ready or not),” 전 인류는 교역과 자본의 힘에 의해 하나의 거대시장으로 통합되고 있고 때문에, “좋든 싫든(like it or not),” 이제 과거 식민주의 시대로부터 물려 받은 낡은 사상적 패러다임을 벗어버리고 세계화라고 하는 ‘지구적 혁명’이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든 긍정적 가능성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모두가 신뢰할 수 있고 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진정한 ‘하나의 세계(One World)’는 지금과 같이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지지도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사실 ‘하나의 세계’ 혹은 ‘세계시민(global citizen)’이 되고픈 열망은 인류 역사에서, 특히 서양의 역사에서 강하게 이어져 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의 세계화는 진정한 인류 평화와 세계 시민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국제 질서에서 불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종속 국가들을 더욱 심각한 정치 ? 경제 ? 문화적 종속 상태에 빠뜨릴 뿐이다. 진정한 세계화는 획일적인 지구촌 경제가 아니라, 각 지역의 다양한 생태환경의 건강과 활력에 인류의 행복(well-being)이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의 민주적인 참여와 권리에 기초한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획일적 세계화는 ‘제1세계 패권적 민족주의’의 한 형태다. 그래서 지금의 세계화가 민족주의의 조용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떠들썩한 부활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획일적인 세계화’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같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세계주의가 결코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다원적 세계화’와 ‘열린 민족주의’도 함께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는 늘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인간에 의해 지구 생명의 역사상 여섯 번째 대 멸종이 시작되고 있다는 21세기에 우리는 ‘세계’와 ‘민족’이 ‘지역’에서 합류하는 것을 본다.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자치 공동체의 비전 안에 세계주의와 민족주의가 합류하는 것을 본다. 거대한 국제시장의 폭력으로부터 가난한 자와 생태계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노력들 속에서 우리는 침략적 세계주의를 극복하려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단면을 본다. 동시에 다양성에 기초한 지역 공동체들이 평등하고 호혜적인 상호협력 관계를 이루어 나아가려는 노력들 속에서, 우리는 과거 배타적 민족주의의 장벽을 넘으려는 세계주의의 정신을 본다. 자신의 자리에 서서 세계주의자가 되려 했던 함석헌의 이상을 본다. 이제 세계와 민족은 지역에서 만난다. 지역이 민중과 땅이 만나 생명을 나누는 삶의 자리이다. 지역이 초월적 하늘과 내재적 하늘 그리고 활동하는 생명이 만나는 새로운 ‘씨?’인 것이다. 그 곳은 문명사적으로 인류의 미래가 지속가능한지 판가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시험장이 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의 본질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지적대로, 오늘날 교회는 과거 독일 기독교의 ‘문화 개신교주의(Culture Protestantism)’처럼 ‘문화의 포로’가 되어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의 능력’을 상실하였다.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스스로를 정통주의로 간주한다. 그런데 정통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프로테스탄트 원리(protestant principle)’, 즉 “상대적인 실재에 대해 이루어진 그 어떠한 절대적인 주장에 대한 저항의 원리”다. 바로 이러한 원리를 잃었기에 교회는 이 세계와 문화에 대한 비판의 힘을 잃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위기는 진보가 퇴조해서 온 위기가 아니다. 정통이 정통이 아니고 보수가 보수가 아닌 데서 온 위기다. 머리로는 정통이라 생각하지만 몸으로는 이 세상이 주는 달콤한 혜택을 즐기는 ‘두 얼굴의 이중생활’로 스스로 불러온 위기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시대에 순응하지 않으며 (롬 12:2) 오늘의 파국적 인류 문명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과, 갱신과, 희망의 원리를 민족과 세계 앞에 제시하지 못해서 자초한 위기다. ‘이미 주어진 것’이 반드시 절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종말론적 신앙의 상실이 지금 한국 교회의 신학적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늦기 전에 ‘교회 성장’의 환상에서 벗어나, 성장 이후의 역사를 대비해야 한다. 교회는 사도 계승권에 근거한 유기체의 교회만도 아니고, 영성을 독점한 신비적 교제의 교회만도 아니며, 말씀 선포에 의한 신앙의 사건화만도 아닌,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이 세계의 구조 안에서 증언하는 종말론적 선교 공동체다. 이러한 교회는 ‘선포(kerygma)’와 ‘친교(koinonia)’와 ‘봉사(diakonia)’를 통하여 이 땅에 샬롬의 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대안적 공동체(alternative society)’이다. 이제 21세기 새로운 조건 속에서 ‘지역(the local)’이 세계주의와 민족주의가 합류하는 새로운 지평이라면,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새로운 인류의 문명을 잉태하는 ‘종말론적 씨?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거기서 진정한 ‘지역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여기서 ‘지역 교회’란 교회론적이고 생태적인 의미로 동시에 사용된 단어다. 교회론적으로 지역교회는 보편교회의 구체적 구현이자 표현이다. 보편교회의 파편이나 행정단위가 아닌 것이다. 보편교회는 지역교회 안에 존재하고 지역교회가 기원상 실제의 교회이다. 보편교회란 지역교회의 친교(communion)인 것이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역은 생산과 소비가 통일된 ‘자급자족 지역’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 시장이 세계체제가 된 오늘날, 지속불가능한 세계 시장체제의 극복을 위한 대안은 자급자족적 지역 공동체이다. 여기서 핵심은 생산과 소비가 통일된 자급자족의 지역이다. 이런 지역은 자동차 아닌 자전거로나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옛마을 정도의 도도록 작은 지역이다. ‘지역 교회’란 바로 이 교회론적이고 동시에 생태적인 의미의 지역교회를 의미한다.
이런 지역 교회가 ‘깊은 에큐메니칼 정신(deep ecumenism)’을 실천해야 한다.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1961년 뉴델리 총회 이후 교회 중심적, 인간 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에 깊이 관심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이를 우주적(cosmic) 혹은 심층(deep) 에큐메니즘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그 폭에 있어서 전 지구적 관점과 그 깊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에 관심한다. 이 운동은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화해와 정의와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운동이다. 이미 한국의 농어촌 지역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에큐메니칼 정신과 대안적 삶이 실천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폭넓은 선교 활동과 경험에서 겸허히 배우고 그것을 신학화해야 한다.
만약 경제 지역화의 핵심이 ‘안전한 먹을거리 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라면, 지속가능한 생태소농 공동체를 꾸려내기 위한 지역 간 도농연대가 이러한 지역 교회의 한 가지 구체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귀농운동은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운동이다.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못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천규석은 농가의 쌀 생산량과 소비자의 쌀 소비량을 비교적 정확히 예측하면서 60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라면 한두 젊은이를 귀농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그것을 책임지고 소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제시한다. 그러니까 만약 6백 명의 회원을 둔 단체나 교회라면 10명의 젊은이들을 귀농시켜 쌀농사 6백 가마를 지키는 새로운 지역 도농공동체를 충분히 꾸려낼 수 있다.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은 이제 더 이상 모든 민족을 거대한 기독교 제국주의 안으로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의미할 수 없으며, 또한 억압당하는 민중이 해방에 헌신하는 것과 같은 매우 특수하고 종종 당파적인 헌신으로부터 교회가 도피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보편성(universality)이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 이후 로마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라는 개념으로서의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a)’가 아닌 미래에 있을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이제 세계와 민족이 합류하는 우리의 지역에서 온 생명의 보편적 구원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