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한반도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11-22 23:16
조회
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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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1. 시작하는 말
오늘의 국제심포지엄은 단순한 한일교류 차원을 넘어서는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참가하는 한인(조선인)만 해도 한반도(조선반도)의 남북으로 국적을 달리하는 이들이 포함되었는가 하면 재일조선인들도 민단, 총련, 한통련 소속과 그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 인사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일본인 참가자도 일본 공론계(公論界)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모임에서 기조발표를 맡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구나 존경하는 정경모(鄭敬謨) 선생과 나란히 발표하는 것은 큰 영광이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그러고서도 남한의 상당수 민주화운동가들이 영달의 길에 오르고 해외 통일운동가들 대다수가 남북을 드나들며 예우를 즐기게 된 오늘까지 여전히 일본 땅에서 외롭게 당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계신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도록 빨리 바뀌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지만, 그의 완강한 고독이 불의와 굴종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믿는다.
정경모 선생의 업적 가운데 1989년 문익환(文益煥) 목사와 함께 방북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문안작성에 직접 참여한 문목사와 북측 허담(許錟)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4?2남북공동성명’은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흐려진 것 같다. 나는 이 문건이 ‘한반도식 통일’의 과정에 중요한 이정표를 하나 세운 것이라고 믿어 뒤에 다시 언급할 터인데, 정선생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럴 기회를 갖게 되어 더욱이나 기쁘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해서건 다른 문제에 관해서건 6?15공동선언 남측위원회 대표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발언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2. 6?15남북공동선언과 시민참여형 통일
6?15공동선언은 한반도가 베트남식 무력통일이나 독일식 병합, 또는 국가
연합 같은 중간단계를 생략했던 예멘식 통일 그 어느것과도 다른 한반도 고
유의 방식으로 통일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한반도식 통일’은
결과적으로 ‘시민참여형’ 내지 ‘민중주도형’으로 갈 확률이 높으며 당연히 그
리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시민참여라고 하건 민중주도라고 하건 그 뜻은 ‘참된 민주’와 다르지 않을 터이며 4?2성명에 담긴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라는 문익환 목사의 그리스도교적 표현과도 통한다. 다만 시민참여 내지 민중주도 통일이 현실적인 노선으로 설득력을 지니려면 그것이 통일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응당 내려야 할조치들마저 일반시민이나 시민단체가 떠맡겠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이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주어진 조건 아래 민중의 능동적 참여가 극대화되고 제반 정치적 결정에서 의미있는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뜻이지, ‘민중주도’를 절대화할 일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한쪽의 기득권세력만을 강화한 독일의 통일과정에서나 쌍방 기득권세력들의 담합(談合) 성격이 짙었던 남북 예멘의 통일합의에서는 상대적 의미의 민중주도성마저 발휘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베트남 민중의 대대적인 참여의 경우는 그것이 무력통일을 위한 전시동원(戰時動員)이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식 통일이 요구하는 시민참여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평화통일의 원칙 자체는 6?15공동선언 전에 이미 1972년의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바 있다. 그리고 1991년에 체결되어 이듬해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가 한동안 지속될 것을 전제로 교류협력에 관해 매우 상세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2000년 이전에는 그러한 합의의 실행이 극히 한정되었던 것은, 국내외의 환경에 따른 제약도 물론 많았지만, 예의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구체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제쳐둔 상태에서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극도로 불리한 정세를 맞은 북의 입장에서는 흡수통일을 자초하는 길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라는 6?15공동선언 제2항은 이 근본문제에 대한 명료한 답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국가연합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중간단계를 통일과정의 1차목표로 설정한 것만은 분명하다. 동시에 그 이상의 명쾌한 규정을 안한 것 자체가 한반도의 통일과정이 시민참여의 양과 질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여지를 남겨놓은 결과가 되었다. 실제로 민중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근본문제들이 당국자끼리의 만남에서 단숨에 해결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호성은 논란의 소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연합제와 ‘낮은 단계’라는 수식어를 붙인 연방제의 개념상의 차이가 - 더구나 ‘고려연방민주공화국’의 북측 공식 번역에 Confederal이라는 단어가 쓰여온 상황에서 - 절대적이어서라기보다, 시민참여형 통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제4항의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한다는 합의는 제2항에 힘입어 남북기본합의서의 한결 상세한 조항들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남쪽 당국이나 일부 민간운동은 제2항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기보다 제4항에만 치중하여 그들이 애초부터 선호해온 기능주의적 접근에 몰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북측은 당연히 이를 경계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북의 우려에 공감하는 남측 통일운동가들이 ‘연합제와 연방제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강’을 다시금 강조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대신에 이들이 주로 의존하는 것은 공동선언 제1항, 즉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이며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절이다. 물론 민족자주는 통일의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문제에서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 문맥을 벗어나 ‘우리 민족끼리’가 지나치게 일반화될 경우 국제적인 고립과 세계인식의 단순화를 자초함으로써 시민참여형 통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제1항과 제4항 중 어느 것을 더 부각시킬지를 두고 다투는 가운데 6?15공동선언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내용이자 그 핵심이랄 수 있는 제2항이 소홀히된 느낌이 없지 않다. 제2항을 외면한 채 교류?협력의 확대만을 강조하는 것은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방 체제에 대해 국가연합이라는 최소한의 보장마저 안 주겠다는 노선으로 후퇴한 결과이기 십상이며,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향한 실질적인 준비를 게을리하면서 제1항에 배타적 의의를 부여하려 한다면 이 또한 남북 모두 상대방이 받을 수 없는 명분을 고집함으로써 통일과정의 진행을 지연시키던 6?15 이전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꼴이 될 것이다.
남북의 정상이 제2항의 합의를 이루기까지는 북에서의 ‘고난의 행군’과 남에서의 IMF위기 등 수많은 민중의 고통이 있었고, 북측은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그리고 남측은 흡수통일 노선을 포기하는 결단이 수반되었다. 그런데 좀 다른 차원에서 문익환?허담의 4?2공동성명도 중요한 준비작업을 수행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의 방북은 권위주의 정권이 ‘창구단일화’의 명분으로 민간교류를 가로막던 장벽을 돌파한 ‘투사적’ 면모가 당시에는 주로 부각되었다. 4?2성명의 내용을 두고도 그때까지 남쪽에서 금기이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한 점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남쪽의 금령(禁令)을 어긴 두 분은 북에 가서도 북측의 공식 입장과 다른 의견을 당당히 주장했음을 잊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주체성의 과시를 통해 북측 구상의 변화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연방제에 대한 그들의 동조도 당시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1989년 4월은 노태우 대통령이 9월의 국회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남북연합을 제안하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연방제를 배제한 채 완전한 통일로 직행한다는 남측 당국의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지며 통일의지가 박약하다는 혐의가 짙었다. 이에 맞서 문익환 목사 등이 “연방국가의 단계적 창설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는 적절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4?2공동성명은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라는 제4항의 합의를 도출했다. 이후의 진행을 보면 6?15공동선언에서 쌍방 정상은 ‘단꺼번에’ 하는 방식 대신에 ‘점차적으로’ 한다는 문목사측 주장을 수용한 셈이다.
한반도의 현실을 살피건대 남북이 실제로 추구함직한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은 어느 면에서 - 가령 화폐의 통합이나 주민이동의 자유가 아직은 시기상조일 거라는 점에서 - 유럽연합보다도 낮은 수준의 연합이 될 공산(公算)이 크다. 그러나 영연방(英聯邦, British Commonwealth)도 ‘연방’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수준의 남북연합을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 못 부를 이유도 없으려니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느슨한 연합이야말로 평화공존을 최우선시하는 쌍방 당국 및 대다수 주민들의 입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비록 ‘1단계’라는 토를 달더라도 도대체 통일이라 부르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유럽 통합과 전혀 다른 한반도 재통합의 과정에서는 그 정도의 국가연합만 달성해도 더 높은 수준의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불퇴전(不退轉)의 단계에 안착하며 통일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관리할 요긴한 장치가 마련된다는 점이 바로 한반도식 통일의 특징인 것이다.
이처럼 ‘어물어물’ 진행되는 한반도식 통일이 일종의 말장난이라는 비판과 별도로, 그런 식으로 어물어물 나가다가 문득 통일된다면 그것은 곧 적화통일(赤化統一)이 아닐까라고 우려하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러한 걱정은 내가 말하는 통일이 기존의 통일개념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을 뜻함을 간과한 탓도 있지만, ‘근본문제’를 (자본주의로 통일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 출발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흡수되고 만다는 논리가 북측이 때로 강경하게 나올 때의 논리와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다. 북의 경우는 적어도 남북간 경제력 격차가 엄청난 데다 미국의 압박이 지속되는 상태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기우(杞憂)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시민참여형 통일론에 대해 한국 내에서 흔히 제기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북녘에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시민참여는 기껏해야 반쪽에 불과하며, 더구나 분단체제에 맞서는 남북 민중의 연대를 주장하는 분단체제론은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북측 민중의 생활양태나 행동방식에 대해 나의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내가 이 문제를 토론하기에 가장 편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반론에 답하여 크게 두 가지 원론적인 지적만 한다면, 첫째로 북의 민간사회에 대해 남쪽의 시민운동 내지 민중운동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한 접근법이 아니며, 둘째로 ‘시민참여’ 또는 ‘민중주도’는 앞서 말했듯이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식 통일의 과정에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 주도력이 증대하는 것이지 남과 북에서의 참여양상이 대칭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 한반도 통일과정의 현 국면에 관하여
이러한 이론적 비판보다 요즘은 도대체 한반도의 통일과정이 진행중이기나 하냐라는 현실적인 의문이 더 흔하다. 그만큼 한반도에는 다시 긴장이 높아 있는 것이다. 베이징 9?19공동성명이 나온 지 1년이 넘도록 그 이행에 아무런 진전이 없으며 6자회담이 언제 재개될지도 모르는 상태다. 미국은 북이 회담에 안 나올 경우 금융제재에 이은 추가제재를 내비치고 있는가 하면, 북은 북대로 금융제재를 먼저 풀지 않으면 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다.
6?15공동선언 및 9?19공동성명의 실천에 대한 장애요인은 물론 한반도 내부에도 있다. 남쪽의 경우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승한 이후, 특히 7월초 북에서 미사일 실험발사를 강행한 이후, 6?15선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기세를 더하고 있다. 그런저런 요인들을 감안하고도 나는 당면한 가장 큰 장애요인은 미 행정부의 완강한 대북봉쇄정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나는 남북관계의 일시적 후퇴 내지 답보사태가 시민참여?민중주도형 통일을 위해 전적인 불행은 아니라는 신념을 되풀이하고 싶다. 물론 지금은 미사일발사 사태로 당국간의 대화가 단절됐을 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 민간통일운동의 입지도 좁아진 상황이다. 그러나 남쪽의 민간운동조차 아직은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에서 종속변수의 수준을 못 넘어선 실정이라면, “북미관계 및 남북의 당국자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일면 안타깝기는 하나 ‘타격을 가장한 선물’인 면도 없지 않다. 민간통일운동이 아직껏 한반도식 통일과정의 한 주역으로서의 자기 위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주역으로 행동할 준비도 부실한 마당에 더욱 단련되고 성장할 시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면관심사는 지난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공동의 포괄적인 공동조치’가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 것인가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눈을 돌려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을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미국 정부 스스로가 제시하는 대북압박의 일차적 명분은 북측 정권에 적절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6자회담 복귀를 유도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 내지 체제변화를 촉진하여 북측주민의 인권과 생활수준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 재개가 언제 어떤 경위로 실현될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미국의 압박과 봉쇄가 북의 정권을 오히려 굳혀주고 체제의 진화(進化)를 늦추어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봉쇄 하에서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란 더욱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의 진짜 속셈은 무력침공 또는 군사적 압박에 의한 정권전복이 아니냐는 의심이 생길 법하다. 북측은 일단 이것을 미국 정책의 일차적 목표로 간주하여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다. 또한 핵무기를 포함한 ‘억지력’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미국의 이런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네오콘’들이 무력공격과 강압적 정권교체를 공공연하게 주장한 바 있고 부시 대통령 자신이 때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만큼 북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의 정책 옵션의 하나이며 부시 개인에게 특히 흡족한 길일지는 몰라도, 미국 같은 나라의 정책수립자들이 그것을 유일한 목표로 설정해놓고 좌절과 실패를 거듭해왔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했듯이 북의 정권전복에까지 안 간 채 한반도의 긴장이 유지되기만 하는 상태도 미국의 입장에서 달콤한 면이 적지 않다. 미사일방어(MD) 등 미국의 국방예산 확대에 유리하고 일본의 우경화와 미일동맹 강화에 직효약으로 작용하며 남한이 미국과 좀더 대등한 동맹관계를 달성하려는 노력에 제동을 거는 구실로도 안성맞춤이다. 미국으로서는 굳이 북의 정권전복 또는 체제변화만을 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특히 시민참여형 통일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나는 미국의 이런 정책이 남한을 향한 ‘북한 카드’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원래 ‘북한 카드’는 남북대결의 국면에서 북을 도울 뜻을 비침으로써 남을 압박하는 것이었지만,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북을 압박함으로써 남을 묶어두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북 정권의 전복보다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대국 남한을 예속적인 위치로 잡아두는 일이 훨씬 더 절실한 문제이며, 이를 위해 남측 당국 및 민간의 운신 폭을 좁히고 ‘남북화해 대 한미동맹’ 따위의 이분법을 조장하여 남한 내 숭미세력을 북돋우고자 할 때,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서 북의 강경대응을 유발하며 북녘 주민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지연시키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드물 터이다.
만약에 이런 해석이 옳다면 미국의 대북압박 정책은 장기적 안목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만큼 현명한 것은 못 될지라도 ‘대남정책’으로서 미국의 단기적 국익을 챙기는 데는 상당히 성공해온 정책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또한 그에 상응하는 고차원의 사려(思慮)를 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북에 대한 전쟁위협은 단호히 규탄해야 하지만, 미국의 의도에 대한 단선적 해석에 근거하여 북을 엄호하는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미국비판은 남한 당국 및 민간운동의 자주화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더 큰 목표에 이바지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 종속변수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시민참여 통일운동의 주체적 관점에서 미국정책에 반대하는 복합적인 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해외와의 연대도 그런 차원에서 추구할 일이다. 여기서 한민족 네트워크 문제를 논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일본의 우경화와 대미의존 강화는 대북압박을 통해 미국이 거둔 수확의 일부이고 한반도나 동북아 평화에 결코 유리한 사태가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의 대북 및 대남 정책을 대칭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예컨대 일본은 한국에 대해 미국의 대북압박과 같은 의미의 ‘북한 카드’를 사용할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한국과의 마찰은 일본 국내의 독자적인 사정에 따른 교과서문제나 독도문제, 야스꾸니 참배 등을 통해 직접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및 조선인)을 더욱 분개하게 만들지만 이는 미국의 고도화된 세계전략보다는 낮은 차원의 자해행위(自害行爲)에 가까우며, 미국의 ‘북한 카드’ 행사가 없다면 한반도 민중의 공동노력으로 상당정도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이다.
일본정부가 북일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꼽는 납치문제도 미국의 북한인권문제 제기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도 아니고 유독 자국민에 대한 피해만을 - 그것도 식민지시대에 대대적인 조선인 납치를 자행했던 나라가 - 그처럼 외쳐대는 데 대해 한국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와는 달리 자기 나라의 무고한 양민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데 대해 가족들과 여타 국민이 분노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 점을 헤아리지 못하는 도덕적 감수성이라면 ‘선진사회’ 수준에 미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한국사회가 - 특히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 - 요구할 것은, 우리가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측 피해자들의 마음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하듯이 일본인 또한 한국인(및 조선인)들의 아픈 역사와 분노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요, 동시에 대북관계에서 납치문제의 해결을 마땅히 추구하기는 하되 어디까지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자세로 접근할 일이며 국내정치용으로 악용하거나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阿部)내각의 출범이 한일관계 및 북일관계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나의 예측능력을 넘어선다. 다만 한반도에서 우리가 하기에 따라 일본사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미국사회에 대해서보다 훨씬 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4.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에 대한 기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는 종전에 내가 한민족의 ‘다국적 민족공동체’(multinational ethnic community)라는 이름으로 제기했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국가연합 등 새로운 국가형태의 창안 구상과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구상으로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민족공동체의 존재가 바람직하다는 나의 주장에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 전역에 퍼져 사는 한민족 성원 중 압도적인 다수는 각자의 거주지에서 흡족하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한민족으로서의 일정한 정체성과 상호연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본다. 다만 이들은 거주지뿐 아니라 국적도 다양하여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함은 물론, 경제적 또는 문화적으로도 느슨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공동체’보다 ‘네트워크’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유지하며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성원들이 각자 소속한 국가에서의 다양한 위치와 어떤 조화를 이룰지, 나아가 한민족 네트워크 성원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 등 수많은 난제가 널려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하나의 정치 및 경제 공동체를 지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간략히 논함으로써 마무리를 대신할까 한다.
남북대결 구도가 유지되고 민간통일운동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었던 2000년 이전의 시기에는 남측 당국과 민간이 각기 자신의 한반도 내 당면목표를 위주로 해외동포를 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당국은 북과의 체제경쟁 차원에서 그들을 관리하고자 했고 재야운동은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연대운동에 치중했다. 어느 경우든 ‘한반도중심주의’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한반도중심주의가 반드시 달가운 것이 아닐 게다. 물론 초기 이주자들은 고국의 상황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고 지금도 통일문제 등 한반도의 과제에 헌신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디아스포라 성원들에게는 현지(現地)의 생활상의 과제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 과제와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절실한 문제가 되며, 이때 한반도중심주의는 많은 성원들,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해 설득력이 미약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문제 해결에 그들이 계속 동참하게 하려면 첫째 한반도의 문제가 민족의 문제이자 인류의 문제라는 명분이 뚜렷해야 하고, 둘째 해외의 삶에서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부딪치며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과도 구체적으로 연결된다는 실감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한민족 네트워크는 당연히 민족을 중시하고 그중에서도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성질이지만, 각자가 사는 나라와 고장에서 민족주의, 특히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럴 때 ‘우리 민족끼리’라는 자주적인 자세와 ‘세계와 함께’ 나눌 가치들을 지혜롭게 결합하는 한반도 통일운동의 존재야말로 한결 편안하게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한반도의 관점에서는 - 적어도 남한 민간운동의 관점에서는 - 한민족 네트워크가 지구촌 곳곳에 뿌리내려서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직접적으로 도와줄뿐더러 전세계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기여해주기를 소망하기 마련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여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시민참여형 통일의 필수조건이자 6?15공동선언의 핵심적 합의사항인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 연방’의 성취를 우선적인 목표로 공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일차적 주체는 당연히 남과 북의 정부와 시민(공민)일 터이므로 해외동포들에게는 써포터(應援團)의 역할이나 맡기는 또 하나의 한반도중심주의가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국가가 애초부터 민중주도와 범세계적 시민연대를 원리로 하여 건설된 새로운 형태의 정치공동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 제기되는 요구가 어디까지나 그들의 현지생활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무작정 민족통일의 대의에 동참하며 희생하라는 다그침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 과정에서 재일동포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강조하고자 한다. ‘재일(在日)’은 수적으로도 중국과 미국의 한민족 인구에 버금가는 큰 규모지만, 친북과 친남 및 중립적 성향의 인사들이 모두 상당수를 차지하는 특이한 디아스포라 집단이기도 하다. 여기에 일본이 한반도의 가까운 이웃나라이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는 점까지 덧붙인다면 ‘재일’ 사회의 향방이 한반도 통일과정의 궁극적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소지는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4월 민단과 총련 사이의 화해협약이 일단 힘을 잃고 있는 사태는 매우 유감스럽다. 그러나 남북의 교류?협력과 점진적 통합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의 발전 또한 한반도 안팎 민족성원들 대다수의 염원인 이상, 두 단체의 화해가 조만간 다시 진행되는 것은 불가피하리라 본다. 그리고 이에 따른 재일사회의 쇄신은 한반도의 시민참여형 통일에 대한 해외참여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할 뿐 아니라, ‘한반도 중심’과 ‘재일 중심’ 사이의 창조적 균형을 찾는 데 기여함으로써 세계 곳곳의 동포들에게 모범이 되고 희망을 줄 것이다. 오늘의 심포지엄이 그러한 발전에 뜻있는 보탬이 되기 바란다.
한반도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1. 시작하는 말
오늘의 국제심포지엄은 단순한 한일교류 차원을 넘어서는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참가하는 한인(조선인)만 해도 한반도(조선반도)의 남북으로 국적을 달리하는 이들이 포함되었는가 하면 재일조선인들도 민단, 총련, 한통련 소속과 그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 인사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일본인 참가자도 일본 공론계(公論界)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것으로 안다.
이러한 모임에서 기조발표를 맡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구나 존경하는 정경모(鄭敬謨) 선생과 나란히 발표하는 것은 큰 영광이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그러고서도 남한의 상당수 민주화운동가들이 영달의 길에 오르고 해외 통일운동가들 대다수가 남북을 드나들며 예우를 즐기게 된 오늘까지 여전히 일본 땅에서 외롭게 당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계신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도록 빨리 바뀌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지만, 그의 완강한 고독이 불의와 굴종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믿는다.
정경모 선생의 업적 가운데 1989년 문익환(文益煥) 목사와 함께 방북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문안작성에 직접 참여한 문목사와 북측 허담(許錟)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4?2남북공동성명’은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흐려진 것 같다. 나는 이 문건이 ‘한반도식 통일’의 과정에 중요한 이정표를 하나 세운 것이라고 믿어 뒤에 다시 언급할 터인데, 정선생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럴 기회를 갖게 되어 더욱이나 기쁘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해서건 다른 문제에 관해서건 6?15공동선언 남측위원회 대표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발언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2. 6?15남북공동선언과 시민참여형 통일
6?15공동선언은 한반도가 베트남식 무력통일이나 독일식 병합, 또는 국가
연합 같은 중간단계를 생략했던 예멘식 통일 그 어느것과도 다른 한반도 고
유의 방식으로 통일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한반도식 통일’은
결과적으로 ‘시민참여형’ 내지 ‘민중주도형’으로 갈 확률이 높으며 당연히 그
리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시민참여라고 하건 민중주도라고 하건 그 뜻은 ‘참된 민주’와 다르지 않을 터이며 4?2성명에 담긴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라는 문익환 목사의 그리스도교적 표현과도 통한다. 다만 시민참여 내지 민중주도 통일이 현실적인 노선으로 설득력을 지니려면 그것이 통일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응당 내려야 할조치들마저 일반시민이나 시민단체가 떠맡겠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이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주어진 조건 아래 민중의 능동적 참여가 극대화되고 제반 정치적 결정에서 의미있는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뜻이지, ‘민중주도’를 절대화할 일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한쪽의 기득권세력만을 강화한 독일의 통일과정에서나 쌍방 기득권세력들의 담합(談合) 성격이 짙었던 남북 예멘의 통일합의에서는 상대적 의미의 민중주도성마저 발휘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베트남 민중의 대대적인 참여의 경우는 그것이 무력통일을 위한 전시동원(戰時動員)이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식 통일이 요구하는 시민참여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평화통일의 원칙 자체는 6?15공동선언 전에 이미 1972년의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바 있다. 그리고 1991년에 체결되어 이듬해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가 한동안 지속될 것을 전제로 교류협력에 관해 매우 상세한 합의를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2000년 이전에는 그러한 합의의 실행이 극히 한정되었던 것은, 국내외의 환경에 따른 제약도 물론 많았지만, 예의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구체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제쳐둔 상태에서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극도로 불리한 정세를 맞은 북의 입장에서는 흡수통일을 자초하는 길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라는 6?15공동선언 제2항은 이 근본문제에 대한 명료한 답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국가연합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중간단계를 통일과정의 1차목표로 설정한 것만은 분명하다. 동시에 그 이상의 명쾌한 규정을 안한 것 자체가 한반도의 통일과정이 시민참여의 양과 질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여지를 남겨놓은 결과가 되었다. 실제로 민중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근본문제들이 당국자끼리의 만남에서 단숨에 해결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호성은 논란의 소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는 연합제와 ‘낮은 단계’라는 수식어를 붙인 연방제의 개념상의 차이가 - 더구나 ‘고려연방민주공화국’의 북측 공식 번역에 Confederal이라는 단어가 쓰여온 상황에서 - 절대적이어서라기보다, 시민참여형 통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제4항의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한다는 합의는 제2항에 힘입어 남북기본합의서의 한결 상세한 조항들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남쪽 당국이나 일부 민간운동은 제2항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기보다 제4항에만 치중하여 그들이 애초부터 선호해온 기능주의적 접근에 몰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북측은 당연히 이를 경계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북의 우려에 공감하는 남측 통일운동가들이 ‘연합제와 연방제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강’을 다시금 강조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대신에 이들이 주로 의존하는 것은 공동선언 제1항, 즉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조항이며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절이다. 물론 민족자주는 통일의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문제에서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 문맥을 벗어나 ‘우리 민족끼리’가 지나치게 일반화될 경우 국제적인 고립과 세계인식의 단순화를 자초함으로써 시민참여형 통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제1항과 제4항 중 어느 것을 더 부각시킬지를 두고 다투는 가운데 6?15공동선언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내용이자 그 핵심이랄 수 있는 제2항이 소홀히된 느낌이 없지 않다. 제2항을 외면한 채 교류?협력의 확대만을 강조하는 것은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방 체제에 대해 국가연합이라는 최소한의 보장마저 안 주겠다는 노선으로 후퇴한 결과이기 십상이며,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향한 실질적인 준비를 게을리하면서 제1항에 배타적 의의를 부여하려 한다면 이 또한 남북 모두 상대방이 받을 수 없는 명분을 고집함으로써 통일과정의 진행을 지연시키던 6?15 이전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꼴이 될 것이다.
남북의 정상이 제2항의 합의를 이루기까지는 북에서의 ‘고난의 행군’과 남에서의 IMF위기 등 수많은 민중의 고통이 있었고, 북측은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그리고 남측은 흡수통일 노선을 포기하는 결단이 수반되었다. 그런데 좀 다른 차원에서 문익환?허담의 4?2공동성명도 중요한 준비작업을 수행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의 방북은 권위주의 정권이 ‘창구단일화’의 명분으로 민간교류를 가로막던 장벽을 돌파한 ‘투사적’ 면모가 당시에는 주로 부각되었다. 4?2성명의 내용을 두고도 그때까지 남쪽에서 금기이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한 점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남쪽의 금령(禁令)을 어긴 두 분은 북에 가서도 북측의 공식 입장과 다른 의견을 당당히 주장했음을 잊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주체성의 과시를 통해 북측 구상의 변화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연방제에 대한 그들의 동조도 당시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1989년 4월은 노태우 대통령이 9월의 국회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고 남북연합을 제안하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연방제를 배제한 채 완전한 통일로 직행한다는 남측 당국의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지며 통일의지가 박약하다는 혐의가 짙었다. 이에 맞서 문익환 목사 등이 “연방국가의 단계적 창설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는 적절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4?2공동성명은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라는 제4항의 합의를 도출했다. 이후의 진행을 보면 6?15공동선언에서 쌍방 정상은 ‘단꺼번에’ 하는 방식 대신에 ‘점차적으로’ 한다는 문목사측 주장을 수용한 셈이다.
한반도의 현실을 살피건대 남북이 실제로 추구함직한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은 어느 면에서 - 가령 화폐의 통합이나 주민이동의 자유가 아직은 시기상조일 거라는 점에서 - 유럽연합보다도 낮은 수준의 연합이 될 공산(公算)이 크다. 그러나 영연방(英聯邦, British Commonwealth)도 ‘연방’이라고 부른다면 이런 수준의 남북연합을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 못 부를 이유도 없으려니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느슨한 연합이야말로 평화공존을 최우선시하는 쌍방 당국 및 대다수 주민들의 입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비록 ‘1단계’라는 토를 달더라도 도대체 통일이라 부르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유럽 통합과 전혀 다른 한반도 재통합의 과정에서는 그 정도의 국가연합만 달성해도 더 높은 수준의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불퇴전(不退轉)의 단계에 안착하며 통일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관리할 요긴한 장치가 마련된다는 점이 바로 한반도식 통일의 특징인 것이다.
이처럼 ‘어물어물’ 진행되는 한반도식 통일이 일종의 말장난이라는 비판과 별도로, 그런 식으로 어물어물 나가다가 문득 통일된다면 그것은 곧 적화통일(赤化統一)이 아닐까라고 우려하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이러한 걱정은 내가 말하는 통일이 기존의 통일개념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을 뜻함을 간과한 탓도 있지만, ‘근본문제’를 (자본주의로 통일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 출발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흡수되고 만다는 논리가 북측이 때로 강경하게 나올 때의 논리와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모르겠다. 북의 경우는 적어도 남북간 경제력 격차가 엄청난 데다 미국의 압박이 지속되는 상태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기우(杞憂)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시민참여형 통일론에 대해 한국 내에서 흔히 제기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북녘에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시민참여는 기껏해야 반쪽에 불과하며, 더구나 분단체제에 맞서는 남북 민중의 연대를 주장하는 분단체제론은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북측 민중의 생활양태나 행동방식에 대해 나의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내가 이 문제를 토론하기에 가장 편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반론에 답하여 크게 두 가지 원론적인 지적만 한다면, 첫째로 북의 민간사회에 대해 남쪽의 시민운동 내지 민중운동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한 접근법이 아니며, 둘째로 ‘시민참여’ 또는 ‘민중주도’는 앞서 말했듯이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남북을 막론하고 한반도식 통일의 과정에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 주도력이 증대하는 것이지 남과 북에서의 참여양상이 대칭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3. 한반도 통일과정의 현 국면에 관하여
이러한 이론적 비판보다 요즘은 도대체 한반도의 통일과정이 진행중이기나 하냐라는 현실적인 의문이 더 흔하다. 그만큼 한반도에는 다시 긴장이 높아 있는 것이다. 베이징 9?19공동성명이 나온 지 1년이 넘도록 그 이행에 아무런 진전이 없으며 6자회담이 언제 재개될지도 모르는 상태다. 미국은 북이 회담에 안 나올 경우 금융제재에 이은 추가제재를 내비치고 있는가 하면, 북은 북대로 금융제재를 먼저 풀지 않으면 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다.
6?15공동선언 및 9?19공동성명의 실천에 대한 장애요인은 물론 한반도 내부에도 있다. 남쪽의 경우 지난 5?31지방선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승한 이후, 특히 7월초 북에서 미사일 실험발사를 강행한 이후, 6?15선언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기세를 더하고 있다. 그런저런 요인들을 감안하고도 나는 당면한 가장 큰 장애요인은 미 행정부의 완강한 대북봉쇄정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나는 남북관계의 일시적 후퇴 내지 답보사태가 시민참여?민중주도형 통일을 위해 전적인 불행은 아니라는 신념을 되풀이하고 싶다. 물론 지금은 미사일발사 사태로 당국간의 대화가 단절됐을 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 민간통일운동의 입지도 좁아진 상황이다. 그러나 남쪽의 민간운동조차 아직은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에서 종속변수의 수준을 못 넘어선 실정이라면, “북미관계 및 남북의 당국자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일면 안타깝기는 하나 ‘타격을 가장한 선물’인 면도 없지 않다. 민간통일운동이 아직껏 한반도식 통일과정의 한 주역으로서의 자기 위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주역으로 행동할 준비도 부실한 마당에 더욱 단련되고 성장할 시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면관심사는 지난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공동의 포괄적인 공동조치’가 어떤 형태로 구체화될 것인가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눈을 돌려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을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미국 정부 스스로가 제시하는 대북압박의 일차적 명분은 북측 정권에 적절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6자회담 복귀를 유도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 내지 체제변화를 촉진하여 북측주민의 인권과 생활수준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 재개가 언제 어떤 경위로 실현될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미국의 압박과 봉쇄가 북의 정권을 오히려 굳혀주고 체제의 진화(進化)를 늦추어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봉쇄 하에서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란 더욱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의 진짜 속셈은 무력침공 또는 군사적 압박에 의한 정권전복이 아니냐는 의심이 생길 법하다. 북측은 일단 이것을 미국 정책의 일차적 목표로 간주하여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다. 또한 핵무기를 포함한 ‘억지력’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결과 미국의 이런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네오콘’들이 무력공격과 강압적 정권교체를 공공연하게 주장한 바 있고 부시 대통령 자신이 때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태도를 보인만큼 북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의 정책 옵션의 하나이며 부시 개인에게 특히 흡족한 길일지는 몰라도, 미국 같은 나라의 정책수립자들이 그것을 유일한 목표로 설정해놓고 좌절과 실패를 거듭해왔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했듯이 북의 정권전복에까지 안 간 채 한반도의 긴장이 유지되기만 하는 상태도 미국의 입장에서 달콤한 면이 적지 않다. 미사일방어(MD) 등 미국의 국방예산 확대에 유리하고 일본의 우경화와 미일동맹 강화에 직효약으로 작용하며 남한이 미국과 좀더 대등한 동맹관계를 달성하려는 노력에 제동을 거는 구실로도 안성맞춤이다. 미국으로서는 굳이 북의 정권전복 또는 체제변화만을 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특히 시민참여형 통일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나는 미국의 이런 정책이 남한을 향한 ‘북한 카드’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원래 ‘북한 카드’는 남북대결의 국면에서 북을 도울 뜻을 비침으로써 남을 압박하는 것이었지만, 남북이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북을 압박함으로써 남을 묶어두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북 정권의 전복보다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한 경제대국 남한을 예속적인 위치로 잡아두는 일이 훨씬 더 절실한 문제이며, 이를 위해 남측 당국 및 민간의 운신 폭을 좁히고 ‘남북화해 대 한미동맹’ 따위의 이분법을 조장하여 남한 내 숭미세력을 북돋우고자 할 때,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서 북의 강경대응을 유발하며 북녘 주민들의 생활조건 개선을 지연시키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드물 터이다.
만약에 이런 해석이 옳다면 미국의 대북압박 정책은 장기적 안목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만큼 현명한 것은 못 될지라도 ‘대남정책’으로서 미국의 단기적 국익을 챙기는 데는 상당히 성공해온 정책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 또한 그에 상응하는 고차원의 사려(思慮)를 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북에 대한 전쟁위협은 단호히 규탄해야 하지만, 미국의 의도에 대한 단선적 해석에 근거하여 북을 엄호하는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미국비판은 남한 당국 및 민간운동의 자주화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더 큰 목표에 이바지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 종속변수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시민참여 통일운동의 주체적 관점에서 미국정책에 반대하는 복합적인 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해외와의 연대도 그런 차원에서 추구할 일이다. 여기서 한민족 네트워크 문제를 논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일본의 우경화와 대미의존 강화는 대북압박을 통해 미국이 거둔 수확의 일부이고 한반도나 동북아 평화에 결코 유리한 사태가 아니지만, 미국과 일본의 대북 및 대남 정책을 대칭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예컨대 일본은 한국에 대해 미국의 대북압박과 같은 의미의 ‘북한 카드’를 사용할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한국과의 마찰은 일본 국내의 독자적인 사정에 따른 교과서문제나 독도문제, 야스꾸니 참배 등을 통해 직접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및 조선인)을 더욱 분개하게 만들지만 이는 미국의 고도화된 세계전략보다는 낮은 차원의 자해행위(自害行爲)에 가까우며, 미국의 ‘북한 카드’ 행사가 없다면 한반도 민중의 공동노력으로 상당정도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이다.
일본정부가 북일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꼽는 납치문제도 미국의 북한인권문제 제기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도 아니고 유독 자국민에 대한 피해만을 - 그것도 식민지시대에 대대적인 조선인 납치를 자행했던 나라가 - 그처럼 외쳐대는 데 대해 한국인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와는 달리 자기 나라의 무고한 양민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데 대해 가족들과 여타 국민이 분노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 점을 헤아리지 못하는 도덕적 감수성이라면 ‘선진사회’ 수준에 미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한국사회가 - 특히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 - 요구할 것은, 우리가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측 피해자들의 마음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하듯이 일본인 또한 한국인(및 조선인)들의 아픈 역사와 분노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요, 동시에 대북관계에서 납치문제의 해결을 마땅히 추구하기는 하되 어디까지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자세로 접근할 일이며 국내정치용으로 악용하거나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阿部)내각의 출범이 한일관계 및 북일관계에 어떤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는 나의 예측능력을 넘어선다. 다만 한반도에서 우리가 하기에 따라 일본사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미국사회에 대해서보다 훨씬 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4.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에 대한 기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는 종전에 내가 한민족의 ‘다국적 민족공동체’(multinational ethnic community)라는 이름으로 제기했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국가연합 등 새로운 국가형태의 창안 구상과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구상으로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민족공동체의 존재가 바람직하다는 나의 주장에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 전역에 퍼져 사는 한민족 성원 중 압도적인 다수는 각자의 거주지에서 흡족하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한민족으로서의 일정한 정체성과 상호연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본다. 다만 이들은 거주지뿐 아니라 국적도 다양하여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함은 물론, 경제적 또는 문화적으로도 느슨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을 터이므로 ‘공동체’보다 ‘네트워크’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유지하며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성원들이 각자 소속한 국가에서의 다양한 위치와 어떤 조화를 이룰지, 나아가 한민족 네트워크 성원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 등 수많은 난제가 널려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하나의 정치 및 경제 공동체를 지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한반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간략히 논함으로써 마무리를 대신할까 한다.
남북대결 구도가 유지되고 민간통일운동의 자유가 크게 제약되었던 2000년 이전의 시기에는 남측 당국과 민간이 각기 자신의 한반도 내 당면목표를 위주로 해외동포를 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당국은 북과의 체제경쟁 차원에서 그들을 관리하고자 했고 재야운동은 독재정권과의 싸움에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연대운동에 치중했다. 어느 경우든 ‘한반도중심주의’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한반도중심주의가 반드시 달가운 것이 아닐 게다. 물론 초기 이주자들은 고국의 상황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고 지금도 통일문제 등 한반도의 과제에 헌신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디아스포라 성원들에게는 현지(現地)의 생활상의 과제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 과제와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절실한 문제가 되며, 이때 한반도중심주의는 많은 성원들,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해 설득력이 미약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문제 해결에 그들이 계속 동참하게 하려면 첫째 한반도의 문제가 민족의 문제이자 인류의 문제라는 명분이 뚜렷해야 하고, 둘째 해외의 삶에서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부딪치며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과도 구체적으로 연결된다는 실감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한민족 네트워크는 당연히 민족을 중시하고 그중에서도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성질이지만, 각자가 사는 나라와 고장에서 민족주의, 특히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럴 때 ‘우리 민족끼리’라는 자주적인 자세와 ‘세계와 함께’ 나눌 가치들을 지혜롭게 결합하는 한반도 통일운동의 존재야말로 한결 편안하게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한반도의 관점에서는 - 적어도 남한 민간운동의 관점에서는 - 한민족 네트워크가 지구촌 곳곳에 뿌리내려서 한반도의 통일과정을 직접적으로 도와줄뿐더러 전세계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기여해주기를 소망하기 마련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여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시민참여형 통일의 필수조건이자 6?15공동선언의 핵심적 합의사항인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 연방’의 성취를 우선적인 목표로 공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일차적 주체는 당연히 남과 북의 정부와 시민(공민)일 터이므로 해외동포들에게는 써포터(應援團)의 역할이나 맡기는 또 하나의 한반도중심주의가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국가가 애초부터 민중주도와 범세계적 시민연대를 원리로 하여 건설된 새로운 형태의 정치공동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 제기되는 요구가 어디까지나 그들의 현지생활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무작정 민족통일의 대의에 동참하며 희생하라는 다그침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 과정에서 재일동포가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강조하고자 한다. ‘재일(在日)’은 수적으로도 중국과 미국의 한민족 인구에 버금가는 큰 규모지만, 친북과 친남 및 중립적 성향의 인사들이 모두 상당수를 차지하는 특이한 디아스포라 집단이기도 하다. 여기에 일본이 한반도의 가까운 이웃나라이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는 점까지 덧붙인다면 ‘재일’ 사회의 향방이 한반도 통일과정의 궁극적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칠 소지는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4월 민단과 총련 사이의 화해협약이 일단 힘을 잃고 있는 사태는 매우 유감스럽다. 그러나 남북의 교류?협력과 점진적 통합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전지구적 한민족 네트워크의 발전 또한 한반도 안팎 민족성원들 대다수의 염원인 이상, 두 단체의 화해가 조만간 다시 진행되는 것은 불가피하리라 본다. 그리고 이에 따른 재일사회의 쇄신은 한반도의 시민참여형 통일에 대한 해외참여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할 뿐 아니라, ‘한반도 중심’과 ‘재일 중심’ 사이의 창조적 균형을 찾는 데 기여함으로써 세계 곳곳의 동포들에게 모범이 되고 희망을 줄 것이다. 오늘의 심포지엄이 그러한 발전에 뜻있는 보탬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