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과거사법 제정운동과 과거청산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10-25 23:14
조회
2399
과거사법_제정운동과_과거청산.hwp

** 이 글은 한일 교회협의회에서 주관한 제12차 외등법 문제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2006년 10월10-12일)


과거사법 제정운동과 과거청산

김 동 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1. 머리말

제국주의, 독재의 억압, 반민주 반인권 정책에 부역했던 인자들을 처벌, 혹은 공직에서 추방하거나 사회적으로 그 죄과를 들추어내는 것은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파시즘 혹은 군부독재에서 민주 정부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언제나 이 ‘과거청산’(historical rectification)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그것은 과거청산이 일차적으로는 독재, 권위주의 시대의 주역을 정치무대에서 몰아내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국가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사회정의를 세움으로써 법의 지배와 대중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촉진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 운동, 특히 5.18 특별법 제정운동은 대표적 과거청산운동이었고, 더 확대하면 2000년 총선연대의 낙천. 낙선운동도 일종의 과거청산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과거 전쟁범죄, 국가폭력, 혹은 반인륜적 범죄의 주역을 처벌하거나 그 죄악상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고, 이들이 활보하는 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은 여전히 도덕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2차 대전 후 전범처벌에서부터 시작된 과거청산 작업은 이들 가해 세력의 저항으로 격렬한 정치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고, 또 과거청산을 주도하는 세력은 그것을 일종의 국민 정치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사례를 보면 여러 형태의 법정, 혹은 정부주도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통한 과거청산이 만족스럽게 추진되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사회통합이 달성된 예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90년대 이후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대만, 아르헨티나의 경우를 보면 구세력의 집요한 저항으로 과거청산이 중도에 좌초되거나 굴절되고, 구세력이 변형된 형태로 집권하거나 국론이 양분되는 일도 있었다. 특히 경제 불안이 지속될 경우 이들 구세력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과거청산 작업 자체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구세력과 여전히 대립중인 아시아, 남미 여러 나라는 아직 민주화 이행(transition)을 아직 만족스럽게 완수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외국인들의 눈에는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는 것만을 들고서 과거청산에 성공한 사례로 보여 지고는 있으나,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2004년 이후 친일진상규명법, 과거사법 입법 과정에서 ‘국가 정통성 수호’ ‘친일청산 무의미’, ‘정치적 음모’론이 줄기차게 제기된 것처럼 구세력의 집요한 방해와 저항은 끈질기다.
통상 과거청산은 혁명 이후, 전쟁 후, 권위주의 붕괴 등의 시점에 수행된다. 과거청산은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 중에서 범죄 발생 시점에서는 정치상황의 한계 때문에 그 범죄사실을 충분하게 밝힐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서 정치권력이 교체되거나 유리한 상황에 조성된 이후 과거 공권력 범죄의 진상을 밝히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즉 과거청산은 미해결 과거사를 사법, 혹은 행정적으로 재론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죄과를 밝히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려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해방 후 한국에서 과거청산의 기회는 해방 후(반민특위), 4.19 이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두 번이 있었으나, 모두 가해세력의 저항으로 좌절되고 말았으며, 결국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본격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민정권의 등장이후 오래된 과거가 아닌 가장 가까운 과거사인 광주 5.18 당시 학살 문제부터 거론되었다. 그런데 문민정권이었다 하더라도 5공 세력 혹은 그들과 협력한 보수세력이 국회의 다수의석을 점한 상황에서 정치권 내에서 정상적인 논의를 거쳐서 과거사 관련 입법이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과거사는 민원처리, 일련의 정치적 타협 등에 의해 편법으로 처리되고 말았으며, 결국 노무현 정권 들어서 친일진상규명 이후 모든 과거사 문제가 제기되어 입법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한국에서 과거청산 건으로 거론된 사건들은 발생 직후의 시점이라면 가해자 혹은 관계자 처벌 및 진상규명 작업으로 돌입할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 접근이 계속 차단되다가 참여정부 들어서 미해결된 이 모든 과거사 관련 사건의 해결이 한꺼번에 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건은 이미 발생이후 너무 오랜 세월이 경과했고, 가해자나 피해자도 대부분 사망했으며 자료도 상당부분 인멸된 상태이다.
따라서 최근의 과거청산 문제는 군사정권 붕괴 이후 등 비상 시기의 과거청산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과거청산 작업은 결국 사회의 여론과 정치적 뒷받침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된다. 물론 국회에서의 입법 작업 역시 단순한 의석수가 아닌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만, 설사 법에 의거하여 정부 차원의 과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다고 하다라도 관련 시민 사회단체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이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청산 작업은 정부와 시민 단체가 협력하여 추진할 수밖에 없고, 정부의 의지, 시민단체의 힘, 국민의 여론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이 논문에서는 과거 민주화 이행기에 제기되었던 이른바 과거청산 잔업의 두 사례를 통해서 과거사 문제해결의 맥락, 그리고 사회운동으로서 과거청산이 실제 어떤 한계와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본 다음 2005년 5월 3일 통과된 과거사법(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 입법과정에서 관련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민주화 이행과 과거청산 운동
- 5.18 특별법과 의문사위원회의 경우

정치적 국면, 과거청산의 주체, 과거사 발생 시점과의 시간적 거리, 대상의 성격, 운동세력의 힘과 여론의 지지 등에 따라 각각의 작업은 상이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과거청산은 전쟁이나 혁명 등 비상 국면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민주화와 정권교체라는 정치국면에서 제기되었으며, 주로 운동단체 주도로 시민 입법의 형태로 제출되었고, 따라서 일부 사안은 발생시점에서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제기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과거사 해결의 요구도 일차적으로는 유족과 사회운동 진영에서 먼저 거론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한국의 과거청산을 처벌이나 보상보다는 진상규명에 더 비중을 두게 만든다. 결국 한국의 과거청산은 사회운동으로 출발해서 법, 정치적 해결로 일단락되어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두 사례를 통해서 그 성과와 한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광주 5.18 청산작업의 경우

5.18 관련 전두환, 노태우 재판, 청문회,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등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는가, 만약 기여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전국적인 차원에서 5.18 과거청산 작업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했는가의 문제와 5.18이 광주 전남 지역의 민주화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좁혀져야 하고, 좀더 구체적으로는 5.18 과거청산 이후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의식, 및 민주화와 인권의 가치에 대한 민감성 제고 여부, 그리고 지역주의의 극복여부, 시민의 정치참여의 활성화 여부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로서 본격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본격적인 조사연구 이전의 예비적 탐색 정도의 언급에 그칠 수밖에 없다.
우선 긍정적인 변화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이른바 ‘5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88년의 5공 청문회와 93년 이후의 전. 노 재판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불과 수년만까지만 하더라도 천하를 호령했던 5공 군부세력이 국회에 출석하여 역사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으며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는 모습을 보여준 극적인 사태였고, 또 사법당국에 의해 수감되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청문회가 제대로 5.18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청문회 석상에서 이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시종 변명하는 모습은 과거 최고 권력자들인 이들의 무책임성을 폭로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국민 앞에 불려나와 시종 비굴한 모습을 취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서 군부권력에 대한 민주화 운동 그리고 문민정권의 도덕적 우위를 웅변해 주는 사건이었다. 이 청문회는 광주 5.18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결국 희극적으로 종결되었지만, 국민들은 이러한 행사를 통해 청문회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도 국민들에 의해 심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고, 5공 군부세력인 신군부의 집권 자체가 정당성을 결여하였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적 자신감과 인식변화는 비록 90년 3당 합당을 저지하는 정도까지 상승하지는 못했지만, 군부의 재등장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든 정치적 조건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군부 집권과정의 불법성과 정당성 결여를 더욱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다음의 작업이 바로 12.12와 5.18 사건 재판이었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은 12.12와 5.18 사건에 대한 1년의 수사 끝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관련자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에 분노한 민주세력은 5.18 특별법 쟁취를 위한 공대위를 구성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벌인 끝에 12월 21일 5.18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법원은 ‘폭동과 학살’의 주역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데 성공했으나, 5.18에 대한 진실보다는 주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불법성에만 치중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래서 법원은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의 12.12 쿠데타와 비상계엄 확대를 “정권 쟁취 야욕에 물들어”, “하극상에 기초한 반란과 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했던 실패한 내란”으로 새롭게 성격 규정하였으나 5.18 당시 학살의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이 갖는 의미는 부당한 정치권력이 아무리 적법한 외관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국민의 심판에 의해 단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반민주 반인륜 범죄는 어떤 이념이나 정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국민적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5공화국을 뿌리로 하는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칭한 것 역시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의 압박을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5.18 관련 구속자들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고 원심을 파기하고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민주화를 향한 투쟁이 국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 역시 청문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한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정권의 권력찬탈의 불법성을 만천하에 확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특히 당시 김영삼 정부가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한 후 이틀 뒤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전격적으로 구속시킨 것은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정략의 산물인 점도 있지만, 과거청산을 거세게 요구해온 사회단체의 요구를 수용하고, 호남지역의 정서를 달램과 동시에 문민정부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포석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사면 복권 조치가 곧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조치는 독재로의 회귀를 저지하는 획기적인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군부독재 하 한국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5.18의 피해자인 김대중이 97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바로 그러한 인식이 국민적으로 확산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결국 5.18 과거청산의 결실은 구체적으로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의 당선은 호남의 소외와 한을 해소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5.18 사건으로 결정적으로 굳어진 호남의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이처럼 광주 5.18 진상규명 활동은 분명히 문민정권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군부 독재세력의 부활을 저지시킨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 국민의 의식을 민주화하거나 광주.전남 지역을 민주주의의 상징적 구심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광주의 전국화’의 실패로 자주 거론되는 점이기도 하다. 즉 광주 ‘5월 운동’이 피해자와 사회단체의 운동으로서 진행되기는 했지만, 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5.18 청산작업이 미봉적으로 파행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결국 과거청산이 5.18의 항쟁의 정신을 민주화의 질적 발전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지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5.18 청산의 경우 그 한계가 이미 초기부터 내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5공 세력의 집요한 반대 때문에, 청문회에서 제대로 진실을 밝혀낼 수 없었고, 둘째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5.18 특별법을 만들고서도 학살, 반인륜적 법죄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국가의 법익’을 보호한다는 법 개정 취지를 내포함으로써 사실상 이들에게 거의 면죄부를 주었고, 셋째 철저한 진상규명 없이 피해자 보상이 집단보상보다는 개인보상을 우선시함으로써 ‘항쟁’의 역사적 성과가 다분히 퇴색하였으며, 넷째 5.18 기념사업에 대해 광주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이 사업이 지역과 전국차원에서의 5월 운동의 힘에 바탕을 두고 추진되지 못했으며, 다섯째 이들 5.18의 주역들이 ‘당사자 주의’의 벽을 넘어서지 못해서 광주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민주화 투쟁가들의 모범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 5.18 진압의 당사자에게 부여된 각종 훈장과 포상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 참가자에 대한 유공자 인정 문제 역시 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다 보니 5.18 항쟁의 정신이 보편화되지도 못하고, 초중등학교 교과서에 제대로 수록되지 못하고, 대다수 비호남 지역 사람들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서보다는 호남의 저항으로만 기억하게 되었다.
결국 5.18 과거청산 작업은 ‘절차적 민주주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상으로 5공과의 철저한 단절, 및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미친 영향을 미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과거청산이 이 정도의 성과와 한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는 우선은 과거청산의 불철저성, 즉 반인륜적인 학살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접근방식에서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즉 이 재판은 김영삼 정부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속과 사면은 다분히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 쇼의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공범과 방조범 등에 대한 수사 역시 포기되었다. 과거청산이 정치적 이해에 종속된 결과 그것이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신장에 미치는 효과 역시 반감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이해관계 보다는 시민의 참여를 통해 과거청산을 추진하고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개인보상보다는 집단보상을 중시했었다면 5.18의 정신은 호남의 벽을 넘어서 영남과 전국으로 더 많이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5공 세력의 다수가 정치권, 정부, 언론진영에 이렇게 남아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2) 의문사 위원회의 활동

김대중 정부 하에서 진행된 가장 대표적인 과거청산 작업은 (대통령직속)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의 활동이었다. 1999년 12월 29일 국회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전자는 그 동안 탄압을 받아온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의 역사적 공헌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의미하며, 후자는 군부독재 하의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 작업을 통해 그러한 죽음의 원인이 된 군부독재 정권의 탈법성과 반민주성을 들추어내고, 민주주의를 공고화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2기 의문사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한상범이 지적한 것처럼 “민주화를 위한 개혁은 민주에 반대한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것이고, 그와 관련된 과거의 불의와 부정을 청산해야 밝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의문사 위원회의 활동은 5.18 진상규명과 더불어 단순히 피해자의 민원 해결을 넘어서서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뒤틀려진 법치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광주 5.18 특별법이 그러하듯이 의문사 위원회역시 거의 전적으로 사회운동의 힘에 의해 조직되었고, 시종 관련 사회운동 단체와의 긴장 속에서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었다. 의문사 유족들과 활동가들은 세계 사회 운동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400일 이상의 천막농성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하였고, 그 결과 의문사 위원회가 구성된 것이다.
2기 의문사 위원회는 2004년 6월 30일까지 정연관 사건 등 11건을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의문사한 사실을 인정했다. 의문사위가 조사한 총 44건의 사건 중에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한 것은 정은복 사건 등 11건(25%), 기각한 사건이 7건,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된 사건이 총 24건(55%)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은폐되었던 진실이 밝혀진 사건이 11건이라도 있다는 것은 큰 의의를 갖는다. 이 진실 중에서는 군부재자 투표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해 기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사망한 사건, 야만적인 사상 공작의 실재, 80년대 대학에서 대학당국이 강제 징집에 직접 가담한 것, 조직적인 노동운동 탄압, 보안사의 사찰, 안기부의 대학 길들이기 작업 등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진상조사를 통해 당시 5공 군사정권이 권력유지를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통원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의문사 위원회는 단순한 사인규명보다는 국가의 전체의 작동 시스템, 사회적 배경과 상황, 그리고 국가폭력의 실체를 밝히려 노력하였다.
이 의문사위원회의 활동으로 과거 군, 경찰, 공안기구 등 억압기구의 은밀한 활동들이 어느 정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이제 초법적인 공안기구가 비판적 사고를 가진 사회 구성원을 사찰하거나 그들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위해 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꾸기도 했다. 한편 과거의 사상전향 거부 행동을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평가하자 보수 언론에서는 “간첩이 민주인사냐”라고 거세게 공격 하였으나, 설사 사회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향거부는 국민의 권리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판정을 내려 사상범이라고 해도 그를 마음대로 살해, 고문할 수 없으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2기 의문사위는 이러한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하여 여러 정부 기관에 대해 권고를 하였는데, 이 권고안이 일부 수용됨으로써 정부기구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기의 경우 ‘피의자 자백의 증거능력 제한’, ‘공안기구 문서 중 인권침해 관련된 문서 국가기록원 보존’, ‘고문 범죄에 대해 별도의 수사기관 조사 담당’, ‘교과서 의문사 관련 내용 수록’ 등은 각 부처가 수용불가하거나 ‘검토 중’이라고 답변해서 공권력의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장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2기의 경우 ‘가해자의 처벌강화와 피해자의 명예회복 조치’, ‘집단학살 및 고문 등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정보공개 특별법 제정’.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멸시효 배제’ ‘보안관찰법 폐지’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제3기 의문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입법안에 일부 반영되었고, 또 그 정신은 과거사법(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에 통합되기도 했다.

의문사 위원회가 이렇듯 4년 동안 활동하여 일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이 과연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문사가 발생했던 그 정치적 제도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의문사위원회의 최종의 임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주로 권고안에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진실위원회도 그 조사활동 후 권고를 통해 사법제도, 군.경의 개혁, 민주제도의 강화, 국민적 화해를 촉진시킬 조치,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을 제안한다. 한국의 경우 의문사 위원회 활동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제안될 사안은 바로 의문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최고의 정치. 법적인 환경인 국가보안법의 폐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17대 국회가 구성된 이후 일종의 제도적 차원에서의 과거청산 작업이자 민주주주의 공고화의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을 한나라당과 5공 세력 등은 완강하게 옹호하였다.
의문사위원회가 법, 제도 차원에서의 민주주의 공고화에 제한적인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선 계속 개정하기는 했으나 의문사위원회 법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의 위법한 공권력의 개입이 의심되는 사건’으로 조사 대상을 제한한 데서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조사권한도 제대로 진상규명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가해자로 의심되는 자가 출석을 거부하거나 진술을 거부해도 달리 강제할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과거 의문사 관련 핵심적인 자료를 소장하고 있을 것으로 지목된 국정원, 기무사 등이 정보공개에 거의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핵심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고, 그 밖에도 예산도 제한적이었으며 관계기관의 비협조도 큰 문제였다. 결국 의문사위원회는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에 접근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기구였다. 일시적으로 구성된 정부기구가 다른 정부기구를 상대로 협조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앞의 광주 5.18 진상규명과 비교해 본다면 의문사위원회는 애초의 법적인 한계 때문에 제대로 된 과거청산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국가기관의 개혁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즉 사실상 과거청산을 원하지 않은 국회의원이 다수를 점하는 15대 국회가 통과시킨 의문사법 자체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5공화국 시절 공안검사, 고문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중 상당수가 국회에 진출하여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적반하장 격으로 과거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2004년 이후 열린우리당이 추진한 과거사법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즉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는 상황이라면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살아나 거꾸로 과거의 피해자를 두 번 죽이고 민주화를 완전히 후퇴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친일세력이 반민특위를 저지시키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활용한 것을 연상케 한다.

3) 90년대 이후 한국 과거청산 운동의 성격과 한계

한국의 민주화는 여타 제3세계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회운동의 동력에 의한 민주화로 볼 수 있고, 87년 군부 독재정권의 종식 역시 민주화 운동의 투쟁의 결과였다. 그런데 당시의 민주화 운동은 군부독재 세력에게 전면적인 항복을 받아 낼 수 있는 힘을 갖지는 못했기 때문에 6.29 선언과 군부의 양보를 통한 타협을 통한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그것이 바로 양김의 분열과 87년 대선에서의 군부세력인 노태우의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민주화 운동은 6.29 선언 이후의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지는 못했고, 이러한 한계가 이후의 과거청산의 굴절과 좌초와도 연관성을 갖고 있다. 즉 90년대의 과거청산은 분명히 사회운동의 지속적인 항의와 문제제기에 의해 가능했지만, 입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청산해야할’ 세력이 여전히 다수를 점하는 국회, 그리고 구세력과 연합한 일부 민주화 세력이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각종 과거청산법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우처럼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의 규명을 거의 할 수 없는 대단히 미흡한 법안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구세력은 처벌을 당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별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살아남게 되고, 이들은 민주주의의 진척을 방해하고 개혁을 저지하였다.
즉 청산되어야 할 세력이 청산을 위한 입법의 주체가 된 이 딜레마는 해방직후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처럼 실제로는 과거청산 작업을 저지하거나, 어쩔 수 없이 진행하더라도 기존의 권력구조의 변동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수위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화해’를 거론하고 실행해야 할 주체는 사실상 피해자이고, 그 전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이 먼저 화해를 언제나 앞세우는 역설이 여기서 나온다. 87년 대선 무렵 당시 후보였던 노태우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설치하여 광주문제를 ‘화합’의 사안으로 접근하였으며, 그것은 이후 노태우와 민자당이 1990년 8월 6일 단독 처리한 ‘광주보상법’의 바탕이 된다. 이러한 화합과 보상의 논리는 국가폭력 행사의 정당성은 그대로 인정하고 가해자의 처벌과 진상규명 등은 포기하거나 묻어둔 채 사태를 봉합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이처럼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없는 ‘위로부터의 과거청산’은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운동진영을 분열시킴과 동시에,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국민 정치교육의 효과도 달성하지 못한다. 5.18 진상규명이 5공 정치세력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하고 5.18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으로 기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청산 작업이 분명히 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가해세력이 주도하는 정치권에 의해 굴절될 경우, 운동 세력의 동력이 분산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그것은 과거청산을 더욱 뒤틀리게 만든다. 제일 심각한 것은 바로 피해 ‘당사자’와 ‘대변자’의 분열, 혹은 ‘당사자’ 내부에서의 분열이다. 과거청산운동은 언제나 피해자와 대변자라는 양 주체에 의해 진행되는데, 피해자의 아픔이 객관화되지 않고서는 운동의 동력이 형성되지 않지만 피해자들의 힘만으로는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파시즘, 군부독재, 반민주 반인권 정치세력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피해자 재발을 방지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 정치의 유제를 청산하고 확실한 민주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피해자들은 대체로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의 해결을 재발방지 장치 마련 즉 정치적 민주화라는 큰 대의와 직접 연결시키지 못하고, 당장의 억울함을 풀거나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이 사실상 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인원수와 관계없이 이들의 목소리는 운동을 지속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 이들을 포섭하려는 구세력, 그리고 이들의 동의하에 정치적 성과만을 과시하려는 정치 세력이 던지는 미끼, 즉 ‘보상 혹은 명예회복을 통한 화합’을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정의의 회복’ 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이 경우 과거청산 작업이 뒤틀리게 된다.
물론 여기서 대변자들의 역할과 도덕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대변자들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를 일반화, 보편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과거청산을 통해 구세력을 청산하고 제도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공고화 작업에 나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피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청산을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위험성이 있고, 또 때로는 과거청산 작업이 제도화되고 그 기구가 정부 관료의 주도로 진행될 경우, 애초의 운동의 목표를 포기하고 관료적 처리 방식에 안주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이들 대변자들은 진상조사 작업, 기념사업 등의 담당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활동이 제도화되는 순간 그들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한 민주화’보다는 ‘사업의 성공적 완수’라는 관료적 목표의 포로가 되기 쉽다. 그 중 일부는 자신의 과거청산 운동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득권 확보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과거청산 작업이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구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사회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변질될 위험성이 크다.
과거청산이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거두지 못한 한계는 과거청산 운동의 담당 단체들이 그것을 주로 법적인 해결로 그 범위를 제한한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즉 과거청산은 과거의 국가폭력의 진상 규명과 당사자 처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법 제도 개혁으로 완수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상규명 작업은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폭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료기구, 언론, 지식인, 그리고 수동적이고 복종적 시민의 무언의 지지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은 하나의 중요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입법이후에는 곧바로 독재 혹은 권위주의 지배의 억압기구의 개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기반의 극복에 나서야 한다. 과거의 국가폭력의 대행자이자 사법 판단을 권력의 의지에 종속시켰던 각종 공안기구, 검찰, 법원 등의 변화가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공고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의문사위 핵심 권고안을 각 정부 부처가 거의 수용하지 않은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90년대 이후 문민정권의 등장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국가기구의 민주화, 국가정보의 공개는 여전히 지난한 과제다. 이러한 제도,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거청산 작업이 보다 철저하게 진행되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며, 동시에 가해자 징벌이라는 인적인 과거 청산에서 그러한 국가폭력과 반인권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의 청산으로 관심의 축을 이동시키지 못한 운동세력 내부의 역량 한계도 지적할 수 있다.
아래의 <표1>은 2005년 현재 통과되었거나 또 논의되고 있는 과거사 관련법들의 목록이다. 각 법의 조문에 나타난 목적들, 제정 일자는 다음과 같다.

<표1> 문민정권 등장이후 과거 청산 관련법
시기이 름목 적과 정진상
규명보상처벌명예
회복예우제안제정종결개정식민지기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40305일제하일본군위안부에대한생활안정지원및기념사업등에관한법률○20021211○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2004032200)▷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20040305태평양전쟁희생자에대한생활안정지원법○○20040621대일민간청구권보상에관한법률○19741221○분단?한국전쟁
전후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00112○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20040618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19960105○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및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20040305특수임수수행자지원에관한법률○20040129박정희
집권

이후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200001150군의문사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20040616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1221○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20000112삼청교육피해자의명예회복및보상에관한법률○○20040129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19900806○5·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20020126

위의 법 중에서 “6.25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운동단체에 의해 통합되어 과거사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으로 단일화되었다.

3. 통합 과거사법 제정운동과 시민운동(NGO)

1) 운동의 배경과 경과

2004년 8월 15일 광복 제59주년 경축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진상규명위원회를 국회 내에 만들 것’을 공식 제의함에 따라 과거청산 문제가 전국적인 의제로 부상하였다. 그 동안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 이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고,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과거사 문제가 대통령과 여당의 주요 정책의제로 부상한데 대해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기남 의원의 부친 친일경력 시비와 여당의장직 사퇴, 그리고 박정희 친일 좌익 경력 시비, 박근혜 대표의 과거청산 조건부 수용 발언 등이 계속되면서 8월 말 정국에는 과거사 문제가 주요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과거청산 문제가 과도하게 정치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관련 단체나 유족, 피해자들은 결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수년 동안 과거 전쟁과 군사 독재 하에서 저질러진 반인권 사태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 운동을 해온 유족이나 사회단체 관련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정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고 정치권의 역사바로잡기의 의지에 따라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추진되어야 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사 진상규명 운동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공개적으로 제안하기 이전에 이미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노무현 정궈이 야당인 한나라당과 보수정치세력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포석을 갖고서 추진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오히려 국민적 지지를 상실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이전인 2004년 8월 3일 관련 단체와 연대기구 대표들이 연대를 통한 과거사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문제 공동대응을 위한 관련 단체들 간의 의사사통과 연대의 필요성은 이미 2004년 상반기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그것이 가시화된 것은 8월 초순이었다. 즉 노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이전에 이미 단체 관련자들은 2004년 정기국회에서 친일관계법 등 이미 통과된 법안의 개정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관련법의 제정, 의문사법의 개정 등 몇 가지 굴직한 사안을 갖고서 국민들의 여론에 호소하고 대 의회 활동에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연합 심포지엄을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게 되었고, 급기야 이들 관련단체 모임은 단순한 심포지엄 개최 이상의 보다 강력한 공동기구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게 되었으며, 과거청산운동을 단순히 관련단체, 피해자 단체의 운동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범시민사회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도달하였다.
가장 일차적으로 요구된 것은 과거청산이 정치권의 논쟁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최소한 쐐기를 박고, 관련단체의 공동 입장을 천명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그래서 우선 관련단체 간에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무엇인지 논의하였는데 이 자리에서는 임시 사회자를 맡은 필자는 과거청산 운동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고 논의를 하였는데, 과거청산 관련법을 공동으로 논의하거나 필요하면 ‘기본’ 법을 제정하자는 의견 정도를 교환하고 어떤 결론을 유도하기 보다는 8월 20일 공동기자 회견을 하기로 하였다. 이 자리에서 필자가 발제 하고 참석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국회의장 자문기구로 ‘범국민과거사청산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 이 기구는 학계, 시민단체, 법조계 대표로 구성하여, 기 제출된 과거사 관련 법안을 조율하고 위원회 구성, 진상규명 작업, 기념사업 방안 등 전체 과거사 정리 방향을 설정하여 기존 법에서 손질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하여 각 당에 제의한다.
? 이 위원회 활동은 3개월 이내의 한시적인 것으로 하고, 올 해 안에 모든 법안이 국회 내에 통과될 수 있도록 한다.
? 이 위원회가 안을 마련하는 동안 기 통과된 법안( 친일법, 강제동원법, 동학)의 시행은 유보하고, 기 제출된 개별 법안의 통과 역시 유보한다.

그리고 향후 과거사 청산 방안에 대해 기 제출되었거나 논의 중인 13개 법안의 모법( 혹은 기본법)으로 ‘과거사 관련 기본법’을 제정하여 기 제출되었거나 이미 통과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는 법안전체의 기조를 정돈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진상규명 작업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이후의 기념사업, 연구 교육 사업을 통일적이고 일관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과거청산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엄격한 진상조사( 관계기관이 최대한 협조할 수 있도록 법안을 개정한다)
-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도록 모든 과정에서 민간의 참여를 높인다.
- 화해와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고 처벌과 보상을 최소화 혹은 피한다
- 가능한 단기간에 마무리하고 추후 재론이 없도록 한다

모법 혹은 개별 과거사법이 모두 통과될 경우 모법에 규정한 대통령 직속의 3개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과거사 관련 진상규명, 명예회복, 보상(배상) 작업은 크게 대통령 직속의 위원회에서 관장하도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모았는데 3개의 위원회란 .
시기에 따라 “일제하 친일, 강제동원 진상조사 위원회”
“6.25전후 민간인 피해 진상조사 위원회”
“군사정권하 공권력 피해 진상조사 위원회”
를 주로 지칭한다.
진상조사 작업후 공권력의 잘못이 인정되는 경우 대통령의 적절한 사과를 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일단 앞의 두 위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배제하되 유족에 대한 의료비, 교육비 지원 정도로 하고 군사정권하 공권력 피해의 경우(예를들면 삼청교육대) 예산 범위에서 적절한 보상을 한다. 그리고 과거 공권력의 잘못 문제, 일본, 미국의 책임 문제 과거 일본, 미국과의 협정, 조약 문제 등 가능한 범위 내에서 공개를 한다. 일본과 미국에게 추가로 진상규명이나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경우 이에 대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공식적으로 제기한다. 가해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관련자 자녀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한다( 연좌제 적용금지) 진상을 정확히 규명한 이후, 단체 명의의 적절한 사과와 재발장치 조치를 마련하도록 한다.

20일 기자회견의 내용은 여당이 주장하는 국회 내에 특위를 두는 안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의사를 표시하되, 대통령의 포괄적 과거청산 의지에 동의를 하면서 과거사 문제 전반을 다루는 독립적인 통합기구를 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기본법의 제정 필요성에 대해서도 참가 단체들이 어느 정도 동의를 표시하였다. 이 기자회견은 그 동안 개개의 법안 입안과 제출을 위해 힘써온 모든 과거사 단체들이 처음으로 공동의 입장을 갖고서 한 자리에서 모인 기회가 되었으며, 국민들에게 이 문제가 단순히 정치권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관련단체들이 추진해 온 것이며, 또 과거청산의 전 과정이 정치권의 주도 하에 진행되어서는 안된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이 기자회견 이후 관련단체는 한편으로 9월 3일 학술 심포지엄을 준비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가칭)과거청산을 위한 민간위원회 구성을 위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그 동안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학계 등에 연대를 제의하였으며 신망있는 인사들을 공동대표단으로 위촉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향후 이 운동이 과거처럼 과거사가 중구난방으로 제기되거나, 정부에서도 그것을 민원처리 차원에서 진행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과거청산 담론을 형성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하였다. 그래서 과거사 문제에 이해와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이 힘을 실어주어서 역사상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결국 9월 3일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준)(이하 과청)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개별법 논의를 계속하다가 일단 내부의 논의를 거쳐 모든 제출된 과거사법을 통괄하는 하나의 법안을 만들자는 쪽으로 의견을 결집하였다.
이후 11월 9일 과청이 정식 발족을 하고 내부에서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과거사 관련 기본법을 준비하고 이를 열린우리당의 정책위원장 등 관련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한 다음, 국회의원들과 수차례의 간담회를 거쳐 정책위원장인 원혜영 의원 안으로 제출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연말 정기국회 통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주로 국회의원 서명 작업, 유족 동원 위령제, 수차례의 기자회견, 피해자 증언대회, 각 선전물 작성 배포, 언론 기고 등을 통한 여론조성 활동, 국회 앞 농성, 일인 시위 등이 내용이었다. 마침 정치권에서는 과거사법이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신문법과 더불어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으로 분류되어 국가적으로도 큰 논란이 되었다. 과청은 이들 각 입법활동을 하는 시민사회 단체 그리고 연대기구와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입법활동을 전개하였다. 과청 차원의 입법 운동의 일지, 경과는 <자료1>과 같다.

2) 법 제정 논란

국회 일정에 따라 2004년 11월 이 법에 대한 국회 행자위 차원의 공청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공청회 자리에 한나라당은 불참하여 반쪽만의 공청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단계인 법사위가 열리기 않았기 때문에 이 법안은 결국 국회의 절차보다는 양당 대표자들의 합의 테이블에 올라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간의 4자 회담, 혹은 8자 회담을 거쳐 타협안이 만들어졌는데, 이 타협안은 애초의 법안의 취지를 심각하게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한 폭력과 반인권 사실에 대한 조사 항목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하였고, 열린우리당은 그것을 수용하였다. 과청은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올바른 과거청산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타협법안마저도 김원기 국회의장이 상정을 거부하고 2월 국회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12월 국회에서 통과를 기대했던 과청은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5년 2월 임시 국회에서는 신행정 수도 문제가 정치권의 쟁점이 되어 집권당과 국회의장은 약속과는 달리 아예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4월 국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지난 4월 입법 운동 과정에서 과청은 제대로 된 과거사법을 제정하자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여야 대표들은 4월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 페지안이나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유보하더라도 과거사법은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여당 지도부에서 다수의 힘으로 표결처리하는 방침을 포기하고 한나라당과의 ‘합의통과’를 계속 강조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요구한 내용을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결국 5월 3일 제출, 통과된 안은 과거청산의 취지를 매우 희석시킨 안이 되었으며, 애초 시민단체와 여당이 합의해서 제출된 안에서 크게 후퇴한 반쪽만의 법안이 되고 말았다.
여야간에 최종적으로 쟁점이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왼쪽의 박기춘 법안은 2004년 12월 여야합의로 통과되기 직전의 안이며, 문병호 안은 2005년 통과되기 직전에 열린우리당 측에서 요구한 내용이다. 진실규명의 범위에서 한나라당은 “이제 동조하는” 문구를 집어넣어 보다 광범위한 반체제 운동을 조사하자고 요구하였으며 한나라등은 이것의 삭제를 요구하여 결국 열린우리당의 안이 관철되기는 했지만, 과거 인권침해 사실을 진상규명한다는 애초의 입법취지는 한나라당이 요구한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이 포함되어 크게 변질되었으며, 과거사 위원회가 또다시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과청은 여당안(문병호안)이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폭력.학살.의문사'의 표현을 수정한 ‘적대시한 세력’ 까지는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고 있어서 이것은 과거청산을 좌우대립의 정쟁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여당 측에 강력한 항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타협할 준비를 하고 있던 여당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표2> 최종 쟁점 사항
박기춘 수정안문병호 수정안진실규명 범위1. 항일독립운동
2. 해외동포사
3. 1945. 8. 15부터 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4. 1945.8.15부터 시행일까지 사망,상해,실종,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혹사건
5.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6.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좌 동



5.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적대적인 세력 또는 이에 동조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폭력?학살?의문사

이에 동조하는 삭제요구(열린우리당)진실규명 범위
(제외범위)진실규명 범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도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한다. 다만, 제3조의 규정에 의한 위원회의 의결로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열린우리당 :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의한 재심사유에 의심되어



한나라당 : 수정불가위원회 구성국회 7명(상임 4) 추천(3:3:1)
상임 : 열린우리당 2, 한나라당 2
- 독립운동사, 해외동포사(한나라)


정부 4명(상임 3)
사법부 3명국회 8명(상임 6명) 추천(4:3:1)
상임 : 열 3, 한 2, 비교섭 1
- 독립운동사, 해외동포사, 대한민국의 정통성부정

정부 3명(상임 1명)
사법부 3명위원 자격1. 역사고증?사료편찬 10년 이상
2. 전임교수 10년 이상
3. 판검사 10년 이상
4. 3급 이상 공무원으로 10년 이상
5. 진실규명 및 화해와 관련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여 위원회의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1-4 좌동



5. 삭제(한나라당)종기규정
진실규명 범위2조 1항 4
1945년 8월 15일부터 이법 시행일까지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까지
군의문사 진상조사 별도의 입법다른 법률과의 관계다른 법률에 의해 진실규명, 피해보상, 손해배상, 명예회복 청구를 하였거나 할 수 있는 경우 이 법에 의한 진실규명 신청을 할 수 없음.다른 법률에 의해 진실규명, 피해보상, 손해배상, 명예회복 청구를 하였거나 할 수 있는 경우 이 법에 의한 진실규명 신청을 할 수 없음. 다만 다른 법률에 의한 진상규명이 어려운 경우는 이 법으로 진실규명에 필요한 조사 등을 할 수 있음.

조사위원 자격요건을 놓고는 한나라당이 변호사, 3급이상 공무원, 대학교수로 제한하자고 주장하였는데 반해 열린우리당은 시민단체, 종교계, 언론계로 문호를 넓히자는 주장을 했다. 과청은 애초부터 이러한 자격조건을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여야 합의로 ‘종교계’를 하나 추가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여야는 법원 확정판결이 난 사건은 진상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되, 조사위원회 가 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하면 조사할 수 있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대해 과청은 재심사유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들어 이미 확정판결이 난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통혁당 사건, 동백림사건 등은 조사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과청은 양당 합의과정에서 삭제된 조사 권한(영장청구의뢰권, 예금조회권, 통신사실조회권, 실지조사에서의 신문)을 위원회가 되가져야 할 것이며, 청문회 제도도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미 보유하였던 통신사실 조회권 뿐만 아니라 고발 및 수사의뢰권 마저 삭제한 것은 위원회의 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어쨌든 최종 통과된 법은 한나라당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형태로 통과되었다.

3) 입법 운동과정에서 제기된 내. 외부의 장벽들

<1> 관련 단체 내부의 입장과 시작의 차이

한국에서 과거사 관련 운동단체가 연대기구를 조직한 것은 2004년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개별 유족들 차원에서는 오랫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운동을 해 왔고, 또 이들을 대변해온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전쟁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 민주화운동 계승연대 등 유족외곽의 시민사회단체 역시 개별적으로 입법 활동을 해 왔으나 여러 과거사 사안이 한꺼번에 제기되면서 공동행동을 취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경험과 시각의 차이가 심대했고, 그리고 자신이 담당해온 개별 과거사 사안과 다른 사안에 대한 이해도와 접근방식의 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여러 내부의 의견 차이를 노정하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 거의 전시기에 발생한 이 모든 과거사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도 거의 없었고, ‘과거사 운동’이라는 운동영역에서 활동해온 시민운동가도 없었으며, 이러한 대립된 의견들을 조정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단체도 없는 상태에서 입법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단 기본법이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은 명시하지 않는 진상규명법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리고 화해를 통한 과거청산이 한국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위령사업 등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대해서도 이견이 없었다.
여러 단체가 관련되기는 했으나 주요 흐름은 의문사 위원회 활동에 관여했던 ‘군사정권과 인권침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 배상) 운동 그룹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 관련 그룹, 그리고 친일 및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운동 그룹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이 각각의 과거사는 성격에서도 크게 차별적이었지만, 접근방식 해결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사안이 하나의 테이블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단체 내부에서 여러 이견이 제출되었다. 특히 친일. 강제동원관련법은 이미 입법화되어 있었으며, 개정운동을 준비 중이었고, 의문사의 경우는 2기 의문사를 종료한 다음 3기 의문사 위원회 구성 입법안을 마련하던 중 합류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의 경우는 16대 국회에서 입법안이 부결된 이후 새로 입법 활동을 추진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기본법’을 보는 시각이 차별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운동과정, 법안 마련 과정에서 충돌한 점을 하나 들자면 의문사 활동가들의 경우는 1.2 기 의문사 위원회의 경험을 통해 보다 정치적으로 힘이 있고 강력한 조사권한을 갖는 위원회가 구성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갖고서 연대기구에 들어왔다. 이들 시간적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생한 사건인 군사정권 하의 의문사, 의문사건 등을 주로 과거사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공소시효 정지, 조사권한 확대, 조사 비협조자 처벌 조항 삽입 등 보다 이상적이고 원칙론적인 입장을 강하게 표명하였다. 의문사 위원회가 관계기관의 비협조로 좌초된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은 법적 강제력 없이 진상조사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관련 활동가들의 군사정권 하의 인권침해와 전쟁기의 학살은 매우 성격이 다르고, 한국전 학살 문제를 군사정권 하의 인권침해 사안과 같이 다루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가해자 불처벌, 피해자 명예회복(보. 배상 유보 혹은 금지) 등의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일제 하 강제동원과 친일진상규명 관련 활동가들의 경우는 진실의 규명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최근의 인권침해 사안과 씨름해온 단체, 관련자들은 외국의 과거청산에서 나타난바 ‘정의 모델’(justice model)에 입각해서 한국의 과거사를 청산하자는 입장이었으며, 한국전, 일제하 관련자들은 ‘진실모델’(truth commission model)이 입각해서 접근하자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리고 학살과 인권침해라는 각각 사안의 성격이 대단히 차별적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주장은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었다.

<2> ‘과거사’의 범위 문제

‘기본법’에 포함될 과거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내부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일차적으로 논의된 것은 이미 통과되어 개정을 준비 중인 친일진상규명, 일제하 강제동원 관련 입법 활동을 아예 중지시키고 이 모두를 장차 입안할 기본법에 통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과청은 일단 모든 사안을 다 포함시키자는 입장이었는데, 친일진상규명법의 경우 개정안이 이미 마련되어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과청의 ‘기본법’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이 개정운동의 발목을 잡을 위험이 있다고 해서 일단 별도의 법으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일제 하 강제동원 관련법이었는데, 이 경우 16대 국회에서 통과된 법이 기구, 위원구성, 조사권한 등에서 대단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개정하지 못한다면 과거사법에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부 태평양 전쟁 유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결국 과거사법에서 빠지게 되었다. 다른 여타 과거사의 경우 유족과 대변자 시민단체가 병존하면서 후자가 입법운동을 주도해 왔다면 일제하 강제동원의 경우 대변자 단체나 지식인들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유족들의 요구가 곧바로 수용된 셈이 되었으나, 위원회가 구성된 지금 주변 사람들의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되어 그 결과는 현재의 강제동원 위원회의 문제점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둘째, 군사정권 이후 발생한 군의문사를 과거사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 역시 과청에서는 모든 군 의문사를 과거사법의 진상조사 대상에 포함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역시 사안이 단순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군사정권 하의 군 의문사는 인권침해의 성격이 강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지만, 92년 문민등장 이후의 군 의문사는 정치적 의미는 없는 단순 사고사의 경우도 많고 더 이상 진상규명이 어려운 사안도 많았을 뿐더러, 대체로 일차 조사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과거사법의 조사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반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까지의 비정치적 이유로 발생한 군의문사를 모두 포함할 경우, 기본법이 지향하는 과거청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해 질뿐더러, 법률적으로도 법안의 종기 규정이 없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유족들 역시 분열되어 92년 이후 사망 유족들은 자신들의 사안을 과거사에 포함시키지 말아달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2005년 6월 군의문사 진상조사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앞의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의 경우처럼 운동과 시민사회의 관심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위원회는 유족의 민원처리 기관화 되거나, 철저한 외부 감시가 불가능하게 되어 진상조사 작업도 국방부 등 관련 정부기구의 비협조와 반대로 유야무야될 위험성이 대단히 높아지게 되었다.

<3> 유족과 대변자들 간의 긴장 - 피해자의 고통, 기억이 갖는 한계들

시민단체는 공익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유족들은 우선 개인과 가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둔다. 당사자인 유족들은 대체로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하거나 운동을 시작해 온 사람들이고, 이들의 아픔을 자원으로 하지 않고서는 과거청산 운동을 시작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유족들의 요구만으로 운동이 진행되기는 어렵다. 즉 유족의 요구는 운동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것은 사실이나 그 자원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시민사회의 공감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고, 과거청산 운동이 피해자의 한풀이로 끝날 위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시기 학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절실하게 요청해온 당사자는 바로 유족이다. 극우 냉전체제 하의 한국에서 그들이 당해온 고초는 다른 어떤 정치적 반대세력이나 민중들이 겪어온 고통을 훨씬 능가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지위가 중세의 농노나 천민, 근대 유럽에서의 유대인, 일본사회 내의 천민과 유사하게 사실상 시민권을 갖지 못한 ‘2등 국민’으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상규명 운동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요구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과 ‘억압된 기억’만을 무기로 해서 문제해결에 나설 수는 없다. 피해자가 아닌 동시대의 한국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곧 학살, 국가폭력이라는 최대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한 가해자 처벌 문제이자 재발방지를 위한 인권 문제였기 때문이다.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인간성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 집단학살 죄(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을 구성하여 국제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행위에는 개인책임 뿐만 아니라 국가책임도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사실을 우선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실이 확인 되는대로 국가는 국민 대통합의 차원에서 이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며, 학살의 책임자에 대해서는 응분의 처벌 혹은 용서 작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유족들은 우선 자신, 가족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만 주로 관심을 갖고 있고, 자신의 고통을 특권화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지만, 외곽의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들은 한국전쟁, 군사정권 하의 인권침해라는 역사적 사건, 전쟁과정에서의 좌우대립, 국군과 미군이 ‘적’인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과정, 군사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개별사건별로 접근하기 어렵다. 즉 외부자의 관점에서 보면 개별사건은 전체의 일부이고, 전체를 구성하는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족들로서는 명예회복이나 경제적 보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외곽의 시민단체는 보다 철저한 진상규명, 사건의 총체적 진실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명예회복이나 보상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예를들어 유족들이 주도해서 입법화된 ‘거창사건 등 명예회복법’의 경우 “특별법은 유족들에게 가해진 불명예에 대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붐으로써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제 1조의 목적에 명시되어 있듯이 진상규명과는 거리가 먼 ‘명예회복’에 치우쳐 있다. 즉 전쟁시기 군의 공비토벌 작전은 정당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제 위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 법의 정신을 그대로 따른다면 유족들이 진정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결과가 된다. 실제 거창사건 피해자나 유족들은 다른 지역의 유족들과 연대를 기피하였으며 전국단위 진상규명 운동에도 극히 소극적이었다. 노근리 유족의 경우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유족들의 이러한 태도가 공익성을 지향하는 시민단체의 입장과는 충돌하였다. 이러한 충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과거사 관련 운동에 내재해 있다.

<4>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긴장

정치가 그리고 정당은 우선 정치적 이해관계, 개별 정치가들은 차기 선거에서의 당선 가능성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이들은 ‘표’가 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선 과거사 관련자들은 그들의 당락을 좌우할 정도의 세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이유가 아닌 이상 이것이 정치가들의 의정활동의 가장 중심적 과제가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국처럼 냉전의식이 널리 퍼져있는 사회에서 잘못하면 이데올로기 공격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 정치권 일반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편 개별 정치가들의 평소의 식견과 경험, 문제의식, 역사의식과 민중 및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애정 여하에 따라 정치가와 국회의 활동은 좌우된다. 17대 국회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는 등 개혁세력의 큰 기대를 안고 출발했지만, 이들은 제대로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일관된 개혁 청사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우선 17대 여당 국회의원 중에서 이 사안관련 운동을 했던 의원은 1명이었으며,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의원은 5명 이내였고, 과거청산 작업이 진행될 경우 자신의 과거가 들추어지거나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의원은 야당인 한나라당에 수십 명이 존재했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과거사법 제정을 원천적으로 반대하였고, 반대를 노골적으로 내세우기 어려운 분위기를 의식하여 ‘친북. 좌익 활동 조사’로 계속 맞불을 놓았다. 더 나아가 과거 5.18 특별법 혹은 의문사 위원회의 경험을 나름대로 정리하고서 한국에서 이후 과거청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치적 식견을 갖고 있는 의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한 대통령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당시 오히려 소극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법안의 내용과 성격은 입법부 구성원인 의원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 정도만큼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반대세력의 목소리만큼 그것은 변질되거나 좌절될 위험을 갖고 있었다. 만약 청와대에서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표시되지 않았다면 여당은 이 사안에 대해 애초부터 포기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 불리한 상황에서 입법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와 유족회가 의원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집권당이 개혁입법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사회나 국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충분한 토론과 쟁점 정리 작업과 국민 여론화 작업을 거쳐서 입법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의 변호사나 전문가들이 입안한 시민입법을 여당의 전문가들이 수용하는 방식으로 일이 추진되었다. 결국 여당의 과거사법은 시민단체가 일차적으로 작성한 법안을 약간 수정한 것이었으나 야당의 반대를 의식하여 조사권한 등의 내용을 약화시켰고, 조사 대상 등도 크게 수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련 활동가들과 정치가들 사이에는 긴장이 발생하였으며, 이 정도의 법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의원들을 압박하기 위해 계속되는 전화, 방문 등을 통해서 법 통과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을 촉구하였으며, 보다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 민노당 의원들의 발언들을 통해 여당과 국회의장을 비판적지지, 혹은 압박하였다.

4. 향후의 과제

통상 시민단체에서 의제를 제기하여 개혁법안이 입안, 통과되는 경우 법안통과보다 더욱 어럽고 중요한 과제가 시행령 작업이다. 법이 불충분하더라도 시행령으로 보완되는 경우가 있고, 법이 훌륭하더라도 시행령에서 입법취지가 크게 퇴색하는 경우도 있다. 시행령 작업은 행정부와 시민단체의 싸움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행정부에서는 일단 예산 확보 가능성, 인력 확보 가능성, 그리고 절차적 합리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법의 목적과 이상을 중시하는 시민단체의 입장에서는, 행정부의 실천의지를 의심하게 되고 양자 간에는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는 수도 있다. 특히 행정부 일부 관료들은 새로운 기구가 만들어질 경우 자신의 승진, 출세의 징검다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정부기구에서 사무처 구성과정에서 관료출신들과 민간 출신들과의 긴장은 거의 볼가피하다. 따라서 과거사법의 경우에도 2005년 12월 1일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어 있어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과거 의문사위원회의 경우처럼 일단 위원회가 구성되면 이 위원회의 성격은 형식적으로는 국가이구이나 실제로는 민관 합동기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우선 조사요원의 과반수 정도가 민간에서 충원되며, 조직의 목적역시 시민적 요구를 국가의 이름으로 완료한다는 특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조직 내부에서는 조직의 운영과 성과를 관료적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경향과 사회운동적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경향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이 관료적 해결의 경향은 문제의 출발점이었던 유족의 요구를 단순한 민원 진정인 정도로 간주하고, 혹은 시민사회의 애초의 요구와 방향을 배반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시민단체와 새 기구와의 갈등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시민단체는 이제 정부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밖에서 이 기구가 관료화되거나 활동이 변질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다. 그리고 시민단체의 감시활동의 일부는 이 조직의 구성원이 된 과거 시민단체 관련자들과의 협조 속에서 진행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과거의 동료였던 사람들 내부의 충돌의 양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새 정부기구가 된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은 철저하게 법적인 근거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활동과정에서 새로운 입법화의 요구가 제기될 수도 있고, 관련 정부부처의 비협조로 활동이 좌초될 수도 있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공소시효 배제, 보.배상 시효 문제 등에 대한 기존법의 개정이 객관적으로 요청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보상 작업이 과거의 법적인 판결과 배치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법과 과거사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기구나 조치도 필요하다. 과거사 위원회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그 권한과 활동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계속될 것이다. 지난 의문사 위원회의 경우처럼 조사관의 자격을 둘러싸고 보수세력과 언론에서 공격을 가한 적도 있다. 따라서 과거사 위원회는 정치권, 행정부, 시민사회와 끊임없는 소통과정에 놓이게 되고, 그것은 정치권의 의지, 입법부 내에서의 지지 세력의 힘, 시민단체의 감시 능력과 관심 등에 따라 좌우된다. 한편 광주 5.18 특별법, 민주화 보상법의 경우처럼 보상문제가 개입될 경우 보상의 형평성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발생할 수도 있고, 민주화운동이 경제적 보상으로 계량화될 위험성도 있다. 이 경우 과거청산 운동의 정당성은 크게 훼손을 입을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곧 민주화운동 혹은 현재의 시민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시민단체는 정부와 유족들 간의 협약이 우리사회의 국민적 공감대를 흔들지 않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따라서 입법, 위원회 결성 후에도 시민단체의 활동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어떤 점에서 입법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질 수도 있다. 과거사 위원회의 성과는 결국 시민사회에 환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인 마무리는 시민사회에서 담당할 수밖에 없다.

5. 맺음말

한국의 과거청산 운동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는지 분석, 평가하는 작업도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과거청산 운동 과정에서 유족, NGO, 그리고 정치권의 역학과정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서 NGO의 위상, 시민입법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정부와 NGO의 관계와 역할 배분 문제 등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사안이다. 90년대 이후 한국 과거청산의 풍부한 경험은 아직 이러한 운동이 제대로 추진되거나 시작조차 되지 않은 나라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이런 작업을 완수해온 세계 여러나라의 과거청산 운동과의 비교연구를 통해서도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입법을 통한 과거청산은 그 출발점에서는 대단히 건강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아직 입법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국의 실정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장차는 이런 과제의 중심이 입법부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시민단체는 의제제기, 여론동원, 피해자 조직화, 감시 등의 역할에 보다 치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국가기구를 통한 과거청산 작업은 과거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가해자인 국가가 문제해결의 주체로 나선다는 데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즉 아무리 정치권력이 교체되어 신 권력이 과거청산의 주체가 된다고 하더라도, 과거 국가범죄와의 철저한 단죄와 처벌은 기존 제도 질서 전반을 문제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입법을 통한 과거청산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과거청산은 국가를 국민의 것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 주는데 기여할 수 있지만, 사실상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국가가 완벽하게 국민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는 국가가 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국가기구를 통한 과거청산 작업은 민주주의 확립에 오직 출발점 정도의 역할에 머문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이것은 과거청산 작업이 국기기구에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시민사회의 힘에 의해 완수되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즉 민주주의가 강한 시민사회없이 달성될 수 없는 것처럼 과거청산 역시 시민사회의 감시와 참여를 전제할 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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