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세계교회협의회(WCC) 성탄메시지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2-11-29 21:00
조회
1368
세계교회협의회(WCC) 성탄메시지
우리는 또다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년은 유독 전세계의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고투하고있습니다. 이에는 중동지역의 전쟁 가능성과 이 지역에 미칠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최근 발리와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테러공격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처럼 생계유실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에이즈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의 오랜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지역의 아프리카가 겪고있는 고통은 처참합니다. 인도처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소수집단 가운데 발생하는 편협과 증오 및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허리케인과 홍수, 지진이나 용암유출 및 기후변화의 결과 발생하는 여러 천재재앙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존재하고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반적인 불안감과 무력함을 보여주는 공포와 불안에 대한 사례를 수없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최초의 크리스마스날 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두려워 말라!"(누가 2:10)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듣게 됩니다. 당시 목자들은 베들레헴부근의 들녘에서 거룩하고 압도적인 권능에 사로잡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무력함을 깨달았으며, 그들을 멸하게 하거나 구원할 수도 있는 자신들의 통제권 밖인 권능의 세력과 맞부딪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두려움이란 숨겨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떠는 감정 속에서 잠재적인 위험이나 위협상황을 예감하고 가능한 방어의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목자들은 우리가 인간피조물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방어와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며 보다 긴밀하게 서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대한 하나됨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으로 뭉치게 만듭니다. 이는 또한 안전을 보장하는 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두려움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우리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자들로부터 과연 우리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두려움을 볼모로 유지시키면서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안보 자체가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근원이 되고있으며, 안보를 위한 조치들이 그들의 목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이 부도덕한 악순환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거룩한 타자의 모습이나 근접할 수 없는 분으로 남아있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놓기를 초청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두려움을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천사의 말을 통해 목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해결하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전 그 자체를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아기를 통해 아주 순전한 사랑을 부여하십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으며(요한1서 4:18) 안보의 우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또한 폭력극복을 위한 에큐메니컬운동 10년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즉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통치자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권세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롬 8:38-39)라고 증언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2002년 11월 22일
세계교회협의회, 콘라드 라이저 총무
우리는 또다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년은 유독 전세계의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고투하고있습니다. 이에는 중동지역의 전쟁 가능성과 이 지역에 미칠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최근 발리와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테러공격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처럼 생계유실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에이즈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의 오랜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특히 사하라사막 이남지역의 아프리카가 겪고있는 고통은 처참합니다. 인도처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소수집단 가운데 발생하는 편협과 증오 및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허리케인과 홍수, 지진이나 용암유출 및 기후변화의 결과 발생하는 여러 천재재앙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존재하고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반적인 불안감과 무력함을 보여주는 공포와 불안에 대한 사례를 수없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최초의 크리스마스날 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두려워 말라!"(누가 2:10)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듣게 됩니다. 당시 목자들은 베들레헴부근의 들녘에서 거룩하고 압도적인 권능에 사로잡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무력함을 깨달았으며, 그들을 멸하게 하거나 구원할 수도 있는 자신들의 통제권 밖인 권능의 세력과 맞부딪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두려움이란 숨겨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떠는 감정 속에서 잠재적인 위험이나 위협상황을 예감하고 가능한 방어의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목자들은 우리가 인간피조물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방어와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며 보다 긴밀하게 서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대한 하나됨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으로 뭉치게 만듭니다. 이는 또한 안전을 보장하는 자들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두려움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우리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자들로부터 과연 우리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두려움을 볼모로 유지시키면서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안보 자체가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근원이 되고있으며, 안보를 위한 조치들이 그들의 목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이 부도덕한 악순환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거룩한 타자의 모습이나 근접할 수 없는 분으로 남아있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내어놓기를 초청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두려움을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천사의 말을 통해 목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심으로써 해결하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전 그 자체를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아기를 통해 아주 순전한 사랑을 부여하십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으며(요한1서 4:18) 안보의 우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는 또한 폭력극복을 위한 에큐메니컬운동 10년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즉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통치자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권세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롬 8:38-39)라고 증언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2002년 11월 22일
세계교회협의회, 콘라드 라이저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