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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7-30 21:35
조회
1436
남북의 평화를 찾아서
- 후안 미셜-

아프카니스탄 인질문제로 한국의 기도교인들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동안,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차원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 주간에 인지되었다.

최근 남한 교회들은 굉장한 교회 성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성장률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 으뜸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교회들의 분단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주간과 내주에 열리는 두개의 회의에서, 한국 교회는 1907년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계속적인 역할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두 모임에서 WCC 총무 사무엘 코비아 목사가 주제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의 역사

한국국제투명성기구 의장이요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인 김거성 씨에 의하면, 이 나라의 통일에 가장 큰 장애는 “우리 마음속에 뒤엉켜 있는 앙금들”이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일제지배로부터의 해방 후, 한국은 소련 지배의 북쪽과 미국지배의 남쪽의 두 군사점령지역으로 분단되었다. 이 분단은 단지 이 나라를 정치적, 이념적으로 분열시킨 것만이 아니고, 수백 만 가족들을 생이별시키고 교회를 분열시켰다.

1950년에서 1953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북한( 조선민주인민공화국)과 자본주의 남한(대한민국)이 된 양자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 전쟁은 전투는 끝났지만 두 나라는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에 있다는 의미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끝났다.

오늘 날까지 이 휴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91년 두 개의 한국은 불가침조약을 맺고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분단 초기부터, 남한의 교회들은 평화 만들기 노력에 앞장서 왔으며, 그들의 나라에서 이주제가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통일의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CCA 전 총무였던 안재웅 목사가 규정한 바 “남북 양측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두 한국은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전쟁 중이지만, 1000만 가족이 떨어져 있고, 남북의 분단 때문에 거대한 인간적 희생을 지불했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역사 상 획기적인 사건은 1984년 일본 도잔소에서 개최된 “동북 아시아 정의와 평화” 회의였다. WCC가 주최한 이 행사는 2년 후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첫 대면을 하는 무대를 마련하였다.

고도의 긴장과 양편이 “다른 한편”을 악마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던 상황에서 열린 이 협의회들은 나중에 도산소 프로세스(Tozanso process)라고 불리는 과정에 첫발을 내밀었으며, 후일 많은 사람은 이 모임들을 남북 화해를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동시에 이 만남들은 단지 두 코리아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 장으로 보여질 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증언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들로서 봉사하였다.

보다 광범위한 에큐메니칼 가족이 “원수 이미지들”과 “이념의 벽들”을 깨부수고, 동시에 무기경쟁과 한반도의 비핵화와 모든 코리안들의 민주적 참여를 기반을 둔 평화적 수단으로 한
통일을 지지함으로써, 이 도잔소 프로세스를 지원하였다.

오늘날 아직도 한국교회는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남북 코리아 양쪽에서 상황은 의미심장하게 변하여 왔다.

남한은 민주화를 이루었다-이점에 대해 이 나라의 교회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그리고 많은 요인들이 남북을 보다 가깝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2000년의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을 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90년대의 “햇볕정책“이었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사건은 한반도에서의 긍정적인 발전에 좌절을 가져왔다. 2002년 2002년 “악의 축”의 연설을 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말려들어, 북한은 2003년 반핵확산조약에서 탈퇴하였다.

2007년 2월에서야, 6자회담-남·북한,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으로 이루어져 2003년에 시작된-의 재개 하에서, 북한은 에너지와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핵폐기에의 몇 단계에 참여하였다.

이 주간, 남한의 관리들은 남·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들에 관한 논의들에 도움을 주기 위해 8월 29-30일에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우리는 통일논의가 처벌받던 시기로부터 긴 여정을 걸어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원칙적인 자세가 예연자적이었음을 증명되었다.” 라고 사무엘 코비아 WCC 총무는 오늘 서울에서 열린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역할 국제회의>의 주제강연에서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화·통일운동은 훨씬 더 복잡한 지정학적인 전망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24개 교회들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가 후원한 이 협의회는 1907년 한국대부흥회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이었다.

한국전쟁 그리고 사회와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반공주의의 상흔은 북에 대한 “적대적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흡수통일”과 “공격적 선교사업”을 조장하게 하였다, 라고 김거성 목사는 말했다.

통일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양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07년의 부흥회는-조금 역사적으로 아이러니하게-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집중되었었다.

한신대 선교학 교수이며 WCC 국제위원회 위원인 채수일 목사의 말에 의하면,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도전들 가운데는 일본, 중국, 미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들이 중요하다. “한국의 분단상황이 길어질수록, 초강대국들의 전략적 경제적 목적들에는 더 유리하다.”고 그는 말한다.

김목사나 채목사나 통일을 이루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고 믿는다. 두 사람은 모두 통일은 북한에서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게끔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상호 신뢰와 평화의 문화를 세워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의 결과로 이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제 에큐메니칼 지원에는 북한이 고립을 벗어나 국제 사회로 보다 긴밀히 융합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고 채 목사는 말한다. 그는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의 지위가 향상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지원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남한의 교회들-그리고 보다 광범위한 에큐메니칼 가족-은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것처럼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계속할 것을 맹세하여 왔다.


* WCC 미디어 관계 직원인 후안 미셀은 아르젠티나 부에이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리버프레이트 복음교회 신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