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기적의 떡으로 다시 쓰는 ‘약쟁이’ 인생 (한겨레, 6/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4 23:40
조회
1287
**기적의 떡으로 다시 쓰는 ‘약쟁이’ 인생 (한겨레, 6/6)

마약사범 재활공동체 ‘보리떡다섯개’ /

우리 회사 이름은 보리떡다섯개입니다. 떡을 만들어 팝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뤄보자는 뜻을 담고 있지요.

식구들 대부분은 ‘빵잽이’예요. 9년을 ‘빵’에서 보낸 친구도 있고, 일곱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린 이도 있답니다. 마약 탓이에요. 10년 이상 마약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식구들이 감옥에서 보낸 날을 모두 합하면 100년도 넘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해요.

지금은 모두 교회에 다니며 새 삶을 찾았어요. 교회 이름은 ‘소망을 이루는 사람들’. 특이하죠? 마약을 끊고 새 삶을 살고픈 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보리떡다섯개는 치료와 재활을 위한 공동체입니다. 떡 공장과 치료가 무슨 관계가 있냐고요? 이른바 ‘약쟁이’의 처지를 알게 되면 이해하실 겁니다.

우리는 대부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알코올중독인 부모 아래서 방치되거나, 가난 때문에 집 밖으로 나돌면서 마약을 알게 됐어요. 상류층 사람들의 성적 쾌락을 위한 투약과는 달라요. 출구 하나 보이지 않는 절망스런 삶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고자 마약이라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감옥에 다녀온 뒤에 다시 마약에 손을 대는 까닭도 그래요. 모두들 약을 끊고 싶어하지만 하는 일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면 다시 마약의 유혹에 넘어가지요. 11번 정도 투약할 수 있는 40만원짜리 약 1사키(1cc짜리 주사기 안에 넣어 파는 필로폰을 가리키는 말)를 구하기 위해 죄를 짓는 이들도 가끔 있어요.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우리 교회 목사님은 그 자신이 마약중독자였기 때문에 우리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지요. 그래서 2002년 인천 남동구 모래내 시장에 ‘소망을 나누는 떡집’을 차렸습니다. 20여 명의 식구들이 먹고 살 만큼 장사도 잘됐어요. 하지만 식구들이 늘어나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했고, 업종을 ‘고추장에 빠진 순대’로 바꿨어요. 1호 체인점까지 생겼으나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방송도 탔지만 마약사범들이 운영하는 집으로 알려지자 손님이 뚝 끊어져 빚만 잔뜩 지고 말았지요. 지난해 1월 남동구 논현동으로 옮겨와 다시 떡집을 시작했습니다.

장사요? 아직은 힘들어요. 가톨릭 교정 사목 단체의 도움으로 설날과 추석 때 교도소에 납품해 버는 3천만원이 수입의 대부분입니다. 20명 가까이 됐던 식구들도 살 길을 찾아 흩어지고 지금은 7명만 남았습니다. 이곳을 나간 뒤 다시 마약에 손을 대 감옥에 간 친구가 있어요. 장사가 잘됐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텐데….

한달 전 작은 희망의 빛줄기가 비쳐왔습니다. 경기도 양주시의 한 마트에서 판매대를 내줘서 하루에 20만~30만원어치씩 떡을 팔고 있어요. 우리 떡은 정말 맛있거든요. 흑미찰떡, 호박찰떡, 인절미 등이 잘 나가요. 우리 쌀을 쓰고 정성껏 만들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본 분들은 단골이 됩니다. 판매대 서너 개만 더 있으면 공동체는 안정이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요. 목사님의 꿈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 쉼터를 많이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닐까요. (032)815-2554~5.

(이 글은 보리떡다섯개 식구들의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공동체 이끄는 신용원 목사

마약 중독자에서 목사님으로…영화 같은 삶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신용원(42) 목사의 삶은 영화 같다. 아홉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가난하게 자랐지만 그는 고교 1학년 때까지 판검사를 꿈꾸던 우등생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애비 없는 애와 놀지 말라”는 부잣집 친구 어머니의 말을 우연히 들은 뒤 잘사는 아이들만 골라 주먹질을 해대는 문제 학생이 됐다. 가출도 밥먹듯 하고 주먹패들과 어울려 다녔다. 본드에서 시작해, 감기약, 대마초, 필로폰으로 이어지는 “마약 엘리트 코스”도 밟았다.

깡패로도 유명해졌다. 1980년대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조계종 폭력 사태 때 방송에 얼굴이 나오는 수배자가 됐고, 원주시에서 4년간 숨어 지낸 뒤 다시 부천으로 올라와서는 “약이 너무 좋아 깡패생활조차 접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부동산 경매와 사채업에 이어 사설 도박장인 ‘하우스’를 운영하며 30억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사업을 하다 돈도 사람도 잃었다.

약 때문에 몸도 망가졌다. 이빨과 머리칼이 다 빠졌고, 78㎏이던 몸무게는 48㎏까지 줄었다. 수배를 피해 기도원에서 숨어지냈으나 삶의 희망이 없어 죽고 싶었다. 어느날 철물점에서 빨랫줄을 샀고 그날 밤 소나무에 목을 매기로 했다.

죽으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맑은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밝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한때 판검사를 꿈꾸던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탓인지 그냥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그때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필로폰보다 10배나 좋은 황홀한 체험”을 한 뒤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약사범을 돕는 일까지 하게 됐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공동체를 거쳐간 사람들 수만 300~400명이다. 세 명이 이곳에서 가정을 이뤘고, 그처럼 살겠다며 신학대학에 다니는 이도 4명이나 된다.

“마약에 손댄 사람들 대부분은 순하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환경이 그들을 마약사범으로까지 몰고간 것이지요. 일자리가 생기고 가정까지 이루게 되면 마약을 끊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