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느티 선생님 (한겨레, 5/1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3 23:36
조회
724
**느티 선생님 (한겨레, 5/16)

막내딸 담임선생님은 총각 시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름도 한 느티 이다. 처음에 나는 딸아이로부터 “우리 선생님 짱 좋아. 웃는 모습이 참 해맑아. 조회시간에 뭐라 하는지 알아? 여러분 바람 향기 맡아보셨나요? 글쎄 이러시잖아.”

바람향기라니! 얼마나 눈물나게 감성적인 어휘인가. 빡빡하게 돌아가는 ‘외고’ 라는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싱그러운 말이었다. 순간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대답을 재촉 했더니 “아이들이 모두 생뚱맞은 표정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다들 선생님 분위기에 익숙해졌어.” 말을 전하는 아이의 표정에 생기가 흘러 넘쳤다.

처음에 나는 걱정이 많았다. 어느새 입시 문턱인 2학년인데 딸아이를 맡을 담임선생님은 입시라는 바둑판을 앞에 놓고 치밀한 전략을 세워서 적당한 긴장과 함께 아이들을 강하게 끌고 나가기를 진정으로 바랬다. 그런데 감정이 넘쳐 아이들에게 휘둘릴 것만 같았다. 내 예감대로 학부모 총회에서 만난 느티 선생님은 “제 이름이 특이하죠? 그런데 제 친한 친구이름도 버들 이거든요.”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어서 학부모들을 웃게 만들었다.
느티 선생님은 정말 딸아이 표현대로 자상함이 봄바람 같은 선생님이다. 쫑알쫑알 딸아이의 말을 간추려보면 ‘가정통신문 늦게 주고 늦게 걷어서 맨날 꼴찌 반을 도맡아 하기, 종례시간에 돌아가면서 앞에 나가 3초 동안 말하기, 황사바람 몹시 부는 노는 토요일에 아이들 나오라 하여 운동장에서 펄펄 뛰며 서로 친해지는 놀이하기, 크게 화냈다가도 마음이 여려서 금방 웃으며 안아주기, 핸드폰 진동 소리만 들려도 뺏는 다른 선생님과 달리 야, 하지 마. 하며 살짝 눈 감아주기. 딸아이가 감기로 호되게 아팠을 때 어떻게 하니 하며 양호실 까지 데려다 주고 불 켜주기, 반 아이들에게 너희들 날 아빠라고 생각 하고 다 털어 놓으렴 하고 씩 웃기, 너희들 주말에 왜 공부하니 푹 쉬다 와, 그런데 시험은 잘 보고, 하며 아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새학기부터 터져 나온 아이의 토막말을 이어붙인 느티 선생님의 특징이었다.

언제나 피곤에 젖어 말도 안하고 쓰러지던 아이가 요 며칠 조잘조잘 수다쟁이가 되었다. 한 달 동안 느티 선생님을 도와 부 담임을 맡았던 예쁜 여자 교생 선생님의 송별회를 정말 잊지 못할 깜짝 파티로 만들자고 반 아이들이 힘을 합쳤다는 것이다. 아이는 교생 선생님을 위해 반 전체가 운동장에서 요즘 유행하는 꼭지점 춤을 추기로 했다며 순서를 익힌다며 밤 열두시가 꼴깍 넘은 시간에 나를 앞에 앉혀놓고 이리 저리 돌면서 춤 연습을 했다. 아이의 들뜬 얼굴에 나도 덩달아 흔들거리면서 정말 너희 반은 못 말리는 반이구나 하고 장단을 맞췄다.

아이들이 느티 선생님을 닮아 말랑말랑 해졌나 보다. 느티 선생님 제자답게 드디어 일을 터트리고 말았다. 교생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일, 종례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은 준비한대로 1층 교무실 문 앞에서 4층에 있는 6반 교실 문턱을 넘어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앞 까지, 발자국 크기로 색 색깔의 스티커를 붙였다. 발자국 하나하나에는 “전지현 보다 예쁘고 송혜교 보다 사랑스러운 변지혜 선생님 사랑해요” 라는 글자가 저마다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속력을 내어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창문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십 명이 힘을 합쳐 삐뚤빼뚤 ‘지혜’ 라는 글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창문에서 바라보는 교생 선생님을 향해 모두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 사랑해요”를 외치고는 공부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를 합창을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하트모양으로 변했다.

이윽고 공기를 가르는 호르라기 소리가 울리며 아이들은 박자에 맞추어 신들린 듯이 꼭지점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로지 한 달 동안 듬뿍 정이 들었던 교생 선생님을 위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춤이었다. 느티 선생님이 뿌려놓은 정(情) 이라는 홀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건듯 불어오던 바람도 구경하는 벚꽃나무들을 흔들어 연분홍 꽃잎들이 화르르 흩날리던 그런 저녁나절 이었다. 이때, 무슨 일인가 하여 각 교실 마다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지나가던 학생들도 전부 멈춰선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춤을 끝낸 아이들은 숨을 헐떡이며 다시 4층 교실로 뛰어 올라갔다. 눈물을 글썽이며 기다리고 있는 교생 선생님과 케잌에 사랑의 촛불을 켜기 위해서 였다. 역시 느티 선생님의 제자들 이었다.

오월을 닮은 느티 선생님에게 내 아이를 맡겨서 행복하다. 느티나무가 이끄는 대로 느티나무의 그늘아래서 푸른 잎을 매달고 제법 굵은 가지로 자라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아이들이 지성과 덕성을 함께 갖춘 또 하나의 느티나무로 잘 자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홍재숙/서울 강서구 방화3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