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이광훈 칼럼] ‘미움의 세력화’시대는 가고 (경향, 5/4)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2 23:33
조회
561
**[이광훈 칼럼] ‘미움의 세력화’시대는 가고 (경향, 5/4)


1980년대에 발표한 이병주(李炳注)의 소설 ‘그해 5월’은 5·16 군사쿠데타에서 1979년 10·26에 이르기까지의 박정희시대 18년 역사를 압축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이사마가 혁신정당 가입을 권유하러 온 감옥동지와 ‘미움의 세력화’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미워하려면 미워하는 것처럼 미워해야 하며 그러자면 어떤 정당이나 단체에 들어가서 그 미움을 세력화해야 한다”는 것이 입당을 권유하는 감옥동지 김달중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사마는 김달중과 미움은 공유하면서도 그것의 세력화에는 부정적이다. “이 나라에는 혁신세력이 뿌리 내릴 토양이 없고 뿌리 내릴 곳은 기껏 인텔리들의 머릿속이다. 그 머릿속이란 시험관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재배한 식물의 운명은 뻔하다. 결코 세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사마는 군사 쿠데타 주체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혁신정당의 세력화나 정치권력화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달중을 보내고 난 뒤 이사마는 미움을 가지면서도 그 미움의 세력화에 동조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놓고 서글픈 감회에 젖어든다. “미움을 가지면서도 그 미움을 세력화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것은 무기력하거나 비굴한 탓이다. …자기에게 여권(旅券)을 거부한 정권에게 미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미움을 세력화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사마천이 될 수 없으면서도 사마천의 슬픔만을 간직한 서글픈 군상이 얼마나 많은가.”

-지자체 선거 민생공약 봇물-

보수다 진보다, 우파다 좌파다 해서 전 국민이 이념의 노예가 되어 미움의 세력화투쟁을 벌이던 시대가 있었다. 제주 4·3사건으로 상징되는 해방 후 좌·우익간의 학살극이나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6·25 동족상잔 등은 이념에 묶인 미움의 세력화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구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좌·우 이데올로기간 미움의 세력화나 권력화를 위한 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 이념적 미움이 물러간 자리에는 환경이나 삶의 질 문제 등이 세력화의 새로운 핵심으로 등장했다.

그러다보니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후보자들의 공약도 상대당을 공격하는 미움보다는 삶의 질과 관련된 환경, 복지, 문화, 교육분야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고 있다. 이같은 민생이나 생활공약은 기초단체쪽으로 내려갈수록 세부적이고 구체적이다. 집 근처에 마을 도서관을 짓겠다, 마을버스의 배차간격을 당기겠다, 마음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이 집을 짓겠다 등등. 비단 기초 자치단체뿐만 아니다. 광역 자치단체장 후보들도 저마다 유권자들의 표심(票心)을 움직일 수 있는 민생공약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각급 단체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이 다투어 민생공약을 내놓는 것은 환경이나 삶의 질 등을 추구하는 시민단체나 주부들이 급속하게 세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 동안 25~34세 여성들의 투표율이 같은 세대 남성들을 앞질렀다는 통계는 이같은 변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 젊은 여성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이념적 성향이나 소속 정당보다는 보육시설이나 학교급식 문제와 관련한 공약들을 적극적으로 따지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권리 눈뜬 주부들 세력화 뚜렷-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변화는 인터넷망으로 짜인 네티즌들의 세력화 현상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의 대세를 뒤집고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일등공신들은 바로 세력화한 누리꾼들이었다. 그 누리꾼들에 이어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의 권리에 눈뜬 주부들의 세력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한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고 합리적인 소비성향을 가졌으며 정치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이들 젊은 주부들중 일부는 기초의회 선거에 직접 출마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들 참여형 주부들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정치권력의 일선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말해주는 현상이다. 미움을 앞세우고 유권들 앞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던 시대가 가면서 유권자들이 민생공약의 이해 득실을 저울질하고 자신의 소중한 한표를 값비싸게 행사하는 주부의 세력화 시대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