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필진] 서울대 넘어서기, 죽음의 트라이앵글(3) (한겨레, 4/1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14
조회
479
**[필진] 서울대 넘어서기, 죽음의 트라이앵글(3) (한겨레, 4/13)

밝고 착하고 건강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노라면 흐뭇하다. 선한 심성과 근면이 몸에 배고, 나를 넘어서 타인을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현재의 나도 행복해지고 다가올 앞날마저 즐거운 추억처럼 기대된다. 아름답다. 성장과 성숙의 미학!
가르치고 배우는 이 아름다운 과정, 다시 말해 한 인간의 깊고 넓은 성장의 의미를 편벽한 지식 축적으로 몰고갈 때, 배움은 타인과 배타적 경쟁의 의미로 전락되고 유력한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교육은 살벌한 전장이 되어버림을 우리 대한민국에서 확인하고 있다. 서울대에 미안하나, 그 최고의 격전지가 서울대다.

근대 이전 교육은 지배계급이 배타적 독점권을 행사했다. 전문적 기능을 지닌 민중들은 전문 엔지니어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식한 장이로 취급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의 노동자 공급, 제국주의적 침략과 통치를 위해 현재와 같은 학교라는 제도가 소위 서구 선진국에서 정착되고, 우리는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다. 국가 권력이 교육을 장악하고,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통해 대량의 노동자 인력을 양산한다.

또 성취도가 뛰어난 이들은 관료로 편입되면서, 단박에 신분상승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근대교육은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인정되었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존재 이전을 하는 통로를 제공했기에, 교육에 대한 집착과 투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그 경쟁이 국경을 넘어 세계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교육에 투자하는 재정은 막대한 수준에 이르고, 국민들 역시 재정지출의 0순위가 교육이다. 선진국에 비해 아직 국가 수준의 투자는 아쉬운 면이 있지만, 그 아쉬운 면을 민간에서 넘어선다. 교육에 대한 열의는 세계적 수준이고, 그만큼 열병도 세계적이다. 서울대에 거듭 미안하나, 그 열병의 상징이 서울대다.

적절한 경쟁은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다 유리하다. 현재보다 더 나은 수준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도 필요한 일이고 그런 노력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발전하는 동력이 된다.

문제는 과하다는 것이다. 학력/입시/명문대/학벌/출세, 이것들의 경쟁은 선의라기보다 배타적이다. 강박적 위협적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아이들을 몰고 간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라는 교실의 급훈을 보는 것은 고통이다. 그렇게 많은 공부와 교육을 시키는 학교에서 그리 수준 낮은 구호를 서슴없이 내걸 수 있을까. 사유와 성찰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서울대 합격자와 고시 합격자의 족보가 면 사거리에 훈장처럼 나부끼는 풍경을 확인하는 씁쓸함은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교실과 교실 밖 풍경이 주는 교육에 대한 인식은 F학점이다. 학교는 전장 터이고 공부는 전투다. 전투와 전투 속에서 성적을 올리고 승자는 승승장구하고 패자는 끝없는 열패감을 혼자만 감당하는 게 아니라 온 집안사람들이 감당해야 한다. 이게 정상일까.

비정상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처지와 형편을 토로한다. 가진 게 없는데 그나마 인생 역전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은 교육뿐이다. 그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이 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현역 시절을 마감했으니, 기대할 것 없고 이제 감독으로서 자식을 잘 조련시켜 대박을 터뜨리면 된다. 그러기에 혼신을 다해 조련하고 투자한다. 희생과 헌신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독한 대리만족과 보상심리의 출처가 여기다. 자식의 볼멘소리는 부모의 절절한 체험 속에 나약함으로 간주되고, 알고 있는 기적과 신화를 총동원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들 볶지 말고, 당장 수능 원서 접수해라. 하면 될까.

우리가 인생을 정직하게 살았다면, 아이들에게 거듭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것들이 참 많더라. 내 맘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고, 또 내 맘대로 살아서는 아니 되더라. 뭔가를 많이 얻기 위해서는 타인의 결핍에 눈 감고, 타인의 실패를 기꺼워하게 되고, 이상하게 그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고 더 높은 곳에 마음이 가더라. 따지고 보면 다 과욕이더라. 내가 자리한 곳에서 열심히 땀 흘리고 선한 마음으로 살고 최선을 다하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더라. 혼자만 욕심 부리지 말고 나누고 살면, 마음부터 흡족하더라. 욕심 부리는 사람들 말로가 좋지 않다는 점도 유념해라. 최선을 다하되, 선의를 잃지 말거라.

이런 말 들으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서울대 합격할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훌륭한 사람 될 가능성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