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언론의 상호감시’라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10
조회
437
‘언론의 상호감시’라고?

김일성이 사망했을 적 이야기다. 뉴욕에 있는 한 한인 라디오방송이 이에 대한 기획방송을 하면서 배경음악으로 북한 음악을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 메이저 신문의 뉴욕판 신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다. 어떤 신문은 방송사의 경영진을 직접 겨냥해 공격을 퍼부었다.    

김일성 사망 사건을 보도하면서 바닥에 북한 음악을 깐 것을 사법당국에서 문제 삼는다면 언론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런 위협에 맞서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신문은 사법당국에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도 색깔 론으로 동업자를 몰아세웠다. 평소 좁은 시장에서 라디오의 속보성에 눌려온 신문들이 분풀이도 할 겸 방송사의 신뢰도도 떨어트릴 겸 그 사건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경쟁 언론사에 대한 공격성 보도, 정파성 발로 아닌지

몇 년 전에 어떤 종교집단 사람들이 한 방송사에 난입한 일이 있다. 방송에서 그 집단의 비정상적인 종교 활동에 대해 카메라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보도 내용에 불만이 있다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항의하면 된다. 떼거리를 지어 언론사에 난입해 아무에게나 폭언을 퍼붓고 위협하는 일은 불법이며 묵과할 수 없는 언론탄압이다. 그러나 다음날 대부분의 언론은 그 종교집단의 주장을 중심으로 차분하고도 객관적으로(?) 그 사건을 보도했다.

작년에 어느 메이저 신문의 유능한 기자가 만취한 상태에서 택시를 타려다 시비가 붙었다. 이 기자는 취한 김에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말을 한 것이다. 경쟁관계에 있는 신문은 이 사건을 크게 썼다. 서로 잘 아는 기자의 하찮은 실언을 이른바 네거티브 판촉에 최대한 활용한 셈이다.  

작년에 한 메이저 신문은 기관원의 도청 내용을 특종 보도한 바 있다. 김대중 정권 때도 도청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죽이고 도청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내용을 살려 기사를 썼다. 도청 당한 사람이 경쟁지의 발행인이 아니었다 해도 같은 각도에서 기사를 썼을까?    

최근 지방의 한 방송사 사장이 골프장에서 캐디의 어깨를 채로 밀쳤다가 낭패를 당했다. 그 사장이 사과하고 캐디가 그걸 받아들여 일이 마무리되었다는데도 그 방송사와 티격태격 해 온 메이저 신문들은 이 해프닝을 인터넷 판에 큼지막하게 올렸다.

타사 아닌 자사 보도에 대한 진지한 성찰 있어야

이런 유의 보도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신문사, 방송사, 거기다 인터넷신문까지 가세해 물고 물리는 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군소 인터넷매체가 대형 언론사를 공격하면 허허, 웃고 말아도 될 법 한데 팔을 걷어붙이고 반격한다. 오늘 웃는 매체는 그래서 내일은 운다.    

다른 언론사에 관한 보도에 왜 우리 언론은 이렇듯이 각박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가? 어느 언론사 관계자는 한 세미나에서 이런 일련의 행위를 ‘언론의 상호감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이런 경우 아는 것이 병이다. 천박한 상업주의, 또는 그 역겨운 정파성에다 ‘언론의 상호감시’라는 거룩한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앎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 언론은 이제 독자나 시청자 앞에 언론 전체의 품격 수준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접어야 한다. 자나 깨나 제 얼굴에 침을 뱉어 뭐 하자는 건가? 언론은 타사가 아닌 자사의 보도가 객관성 균형성 공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객관적이고 균형 있고 공정하다 하더라도 혹시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그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요즘은 우파도 뉴 라이트를 표방하고 좌파도 뉴 레프트를 지향하는 세상인데 언론도 좀 새로워져야 한다.

글쓴이 / 김민환
· 고려대 교수 (1992-현재)
· 전남대 교수 (1981-1992)
· 고려대 언론대학원 원장
· 한국언론학회 회장 역임
· 저서 :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역)>
           <미군정기 신문의 사회사상><한국언론사> 등

출처:<다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