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필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한겨레, 3/25)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2:59
조회
436
**[필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한겨레, 3/25)

며칠 전 교수님으로부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라는 주제로 수필을 작성하는 과제를 받았다. 가만히 슬픈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내 속에 슬픈 기억은 많다. 몇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슬프고, 아직도 나만 바라보시는 어머니 생각에 슬프다. 군대 가서 헤어진 그녀 생각에 슬프고, 아주 어릴 적 같이 뭉쳐 놀던 동무에 대한 그리움에 슬프다.

울고 있는 어린 아이만 봐도 슬프고, 밑창이 다 닳고 헤진 신발을 봐도 이상하게 슬프다. 하물며 커피자판기가 커피는 뱉지 아니하고, 동전만 꿀꺽 했을 경우도 여간 슬픈 게 아니다.

살면서 슬프게 기억되는 장면을 떠올리면 수도 없어 뵌다. 이처럼 슬플 것이 많은 세상일진데 요즘 들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매일 아침, 조간 신문이나 포털사이트 뉴스들을 살펴보면 이 조그마한 땅 덩어리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남을 느낀다.

물론 그 중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도 더러 있고, 가끔은 분노케 하는 일 또한 있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니…

성추행 용의자 국회의원이 끝내 의원직을 고수하려고 동정을 호소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슬프고, 노동자들이 파업현장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한 그 날 하필 골프접대를 받고 마는 눈치 없는 전직 총리 양반의 모습이 슬프다.

한술 더 떠 국민의 혈세로 모아진 수십억의 예산을 들여 학교용지에 자신의 여가생활을 위한 테니스장을 지어대며 권력남용을 일삼는 누군가의 모습에 괜시리 슬퍼진다.

며칠 전, 최초로 부산항을 통해 수입되는 미국산 쌀을 온몸으로 저지하고자 최후의 몸부림을 보이는 농민들의 모습이 슬프고, 가진 자들이 탈세를 일삼으며 떵떵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분노할 봉급쟁이들을 생각하면 또 슬퍼진다.

가엾은 개구리 소년들과 연쇄살인에 의해 무고하게 죽어간 영혼들은 잘난 공소시효 때문에 끝내 한을 못 풀게 생겼으니 그의 가족들과 함께 우리는 슬퍼진다.

이 세상 슬프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삶 속에 슬픔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아름다운 봄 햇살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오늘 내가 슬퍼하였듯 그런 찬란한 슬픔만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