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줄기세포와 기다림의 미덕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2:53
조회
491
   <줄기세포’와 기다림의 미덕>

우리나라 사람이 한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한계가 2주일이라고 하는 지적이 있다. 한국인은 쉽게 흥분하는 만큼 쉽게 잊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치욕적인 일이 터져도 2주일만 버틸 수 있으면 어물어물 넘어간다는 이야기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이야기다. 2주를 못 넘기고 반드시 새로운 사건이 꼭 터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터지지 않으면 누군가 사건을 터뜨리게 마련이다. 한국의 언론은 모두가 특호활자로 도배한 스포츠 신문에 흡사하다. 보도 내용도 선정, 과장, 왜곡이 항다반사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표정과 어투도 마치 나라가 위태롭다는 듯, 초긴장을 강요한다.  

                  윤리와 절차 결여, 우리 모두의 조급함이 빚은 재앙

‘2주 단위’로 대형뉴스가 교체되는 그런 나라가 2개월도 넘어 단 한 가지 사건에 매달렸다. 아마도 “IMF\" 이래 최초의 일일 것이다. ‘황우석과 줄기세포,’ 순발력 강한 신세대 작가가 이미 작품에 착수했다는 풍문이다. ‘줄기세포’에서 곁가지 친 무수한 사건은 꼬리에 꼬리가 물려 있고 끝도 내다보이지 않는다. 실험용 ‘난자 채취 과정의 윤리문제로 출발한 이 사건은 외국잡지의 표지제목처럼 ‘한 영웅 과학자의 부상과 추락’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마디로 나라 전체의 축소판으로 비쳐진다. 정치와 정책, 대학과 학문, 질시와 모략, 생경한 디지털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그 어느 곳에서도 윤리적 질서가 뿌리내지지 못하고 있다. 일분, 일초를 쪼개듯 바쁘게 앞만 내다보고 달려온 우리들이다.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의 DNA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한때는 우리의 조급함이 곧바로 결연한 의지와 집중도와 생산성이 높은 역동성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동성이 크나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인문학과 예술 등등 인간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많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유형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힘은 과학 기술에서 나온다. 자주 쓰는 말이지만 되풀이 하고 싶다. 이 지구상에서 노예제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존엄에 대한 자각인가, 아니면 피압박자의 투쟁이었던가? 둘 다 옳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기계의 발명으로 인간의 육체노동력의 가치가 절하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처럼 과학, 기술은 인류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온 나라가 그토록 오래 줄기세포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학의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끈질기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이번 사태를 부추기고 키운 주범은 과학적 성과를 정치적 성과로 내세우려는 성급함 때문이었다. 과학정책이야말로 나라가 받쳐주어야 할 것이지만 정책이 정치의 세계로 넘어가면 윤리적 기초가 무너지기 십상이다. 대중정서도 마찬가지다. 불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전쟁, 의사와 수의자의 싸움, 미국의 음모, 서울대의 내부갈등, 말 같지도 않은 갖가지 루머가 흉흉한 세상이다. 실제로 이러한 루머를 퍼뜨리고 부추기는 집단도 있다. 방향도 모르고 최소한의 절차와 윤리마저 결여된, 오도된 역동성이 나라를 유린하고 있다. 서울대와 서울대 총장에 대한 공격도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특정교수, 특정학교, 특정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전체가 합동으로 만들어낸 대재앙이다.  

                           도약을 꿈꾸기 전에 조급한 마음부터 다스려야

아직 사건의 전모와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찬찬히 숨을 가다듬고 지켜볼 일이다. 다만 ‘2주’, ‘2개월’이 아니라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교훈은 이미 얻었다. 윤리가 통째로 빠진 과학은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적정한 절차가 생략된 성과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것을.  
어려운 여건 아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성취도 만만치 않다. 다음 단계로 도약을 꿈꾸기 전에 우리의 조급한 마음부터 먼저 다스려야만 한다. “욕심이 천리 앞을 내달을 때면 제 자리에서 올라서 내려다보라(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새삼 옛말을 되새겨야 할 세태다.


글쓴이 / 안경환
· 서울대 법대 교수
· 한국 헌법학회장
· 前 서울대 법대 학장
· 저서 :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
           <그래도 희망은 버릴 수 없다>
           <반대의 자유> <양심적 병역거부> 등

출처:<다산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