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필진] 역사로 인권을 말하다 (한겨레, 3/10)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14
조회
1010
**[필진] 역사로 인권을 말하다 (한겨레, 3/10)

미셸린 이샤이의 “세계인권사상사”(The History of Human Rights)를 읽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누려야 할 천부적 권리인 인권! 그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인류는 역사적으로 지난한 투쟁을 감행하였다. 그런 오랜 투쟁의 결과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한 프랑스대혁명을 정점으로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전 세계적 가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의 천부적 권리, 즉 인권에 대한 사상은 이미 고대 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역사 연구의 방법에 따라 세계 인권의 통사(痛史)를 시도한 미셸린 이샤이에 의해서 그 일관된 역사적 실체들이 드러났다.

미국에서 학제간 인권 연구로 명성이 높은 덴버대학교의 국제대학원 인권학 프로그램의 주임교수인 이샤이는 인권학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들을 역사적 연구로 접목시켜 “세계인권사상사”(The History of Human Rights)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인권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부각시킨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그 동안 인권 전문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었지만 이처럼 방대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통사로서의 인권역사서가 발행된 예가 없었기에 그녀의 작업은 21세기 초에 이룩한 최고의 학문적 업적 중 하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 가지 중요한 학문적 내용을 다룬다. 그 첫 번째가 본 저작의 기본 의도인 인권의 역사에 대한 통사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의 가치는 중세 봉건주의를 허물고 인간 이성의 가치를 높인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 그 후 산업혁명과 더불어 근대적 가치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인권은 근대정신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은 이미 고대 사회의 정신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저자는 그 사실을 함무라비 법전과 유대법,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 그리스 로마 사상, 그리스도교 사상, 이슬람 사상 등에서 확인해 준다. 이 고대 사상들 속에 들어 있는 자유와, 평등, 정의구현, 박애의 정신은 근대의 인권 사상의 보편적 기반이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말로 고대 사회의 종교 윤리정신은 인권 사상의 토대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역사적 근거들을 통해서 이샤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의 보편성인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편만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권이 보편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은 고대 종교의 일관성 속에 있음을 그녀는 스스로의 지적 노력을 통해서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인권과 산업혁명 시대의 인권, 그리고 20세기 초 중반 세계 대전과 그에 따른 보편적 인권, 나아가 오늘날 지구화와 그에 따른 인권 등, 근대적 인권의 개념이 시작된 계몽주의 사회 이후의 현대 지구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 인권의 문제와 그 투쟁의 역사를 다루고, 그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인권사와 인권사상의 진보를 세밀하게 다룸으로써 이샤이의 인권사상 통사는 완성된다. 정말 대단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인권의 역사를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지구화의 시대까지 4 시대로 나눈 것은 이샤이의 저작 기획의 역사학적 가치를 높여준다. 그녀는 계몽주의 시대의 인권을 1세대 인권으로 규정하고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사상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제2세대 인권인 경제적-사회적 권리, 제3세대 인권인 문화적 권리가 규정되는 등 인권사상의 역사적 발전이 단계적으로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통사 이후 두 번째 내용으로 이샤이가 이 책에서 제공하는 것은 인권에 관한 역사 이론이다. 인권사상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후 저자는 그 역사적 연구를 토대로 그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인권의 역사적 법칙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여기에 이샤이의 연구서의 핵심이 들어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권과 관련해 새로운 중세성의 현실로 전락하는 현실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에 답한다. 그녀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부재하던 중세 이후 계명주의와 산업혁명을 경험하면서 시민사회가 출현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시민의 인권이 강조되었으나, 21세기 들어서서는 다시 인권투쟁의 장이 사라지면서 중세화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를 막고 진정한 인권 운동의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녀가 제시한 해법은 무엇인가? 그녀는 “지방 시민사회의 차원과 전 지구적 시민사회 차원에서 각종 주체들 간의 연대를 구축하고, 서로 다르게 전개되고 있는 인권 활동들을 한데 모을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단일의제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가일층 배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존 산본마쓰가 사회주의 기획의 새로운 전략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과 탈근대군주의 이론을 역설하였듯이, 이샤이 역시 인권운동의 새로운 전략으로 통합된 인권 운동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론적 대안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실망할만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탁월한 학문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권사상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은 인권의 역사적 보편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 권리와 권리를 위한 투쟁이 거의 일관적인 흐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룬 세 번째 내용은 사실상 한국어판을 위한 보충 이론으로 이샤이가 추가한 것이다. 책의 설명에 보면, 번역자의 요청해 저자가 기꺼이 보론을 작업해 주었다. 이 보론에서 이샤이는 인권운동과 관련한 지구화 시대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 모순을 돌파할 규범적 세계관을 제안한다. 제노사이드와 같은 반인도적 상황에 대한 인도적 개입과 관련한 스파르타쿠스파(반권위주의적, 반제국주의적 관점)와 시이저파(권위주의적, 제국주의적 관점) 사이의 상충되는 견해와 더불어서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각종 국제 문제들을 진정한 인권적 측면에서 해결하는 방안으로 이샤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의 법칙을 대안적 세계관으로 제안한다. 이 점에서 이샤이의 견해는 현실적 중도주의로 비쳐진다. 그녀가 중도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인권의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배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소의 피해와 최대의 행복을 위한 공리주의적 사상 또한 그녀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흐름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새로운 인권 사상의 패러다임 창출의 실패, 현실적 중도주의로 인한 분명한 대안적 세계관 제안의 실패 등에 있어서 안타까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에서 인권사에 대한 새로운 획을 그어준 그녀의 저작이 너무 반갑고 감사할 따름이다. 특별히 페이지 곳곳에 많은 인권 관련 자료들을 친절하게 삽입해 준 노력과, 부록으로 담아 준 여러 인권 관련 법들, 그리고 권미에 제시한 방대한 참고자료들을 친절하게 삽입해 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이 한 권으로 책으로 대부분의 인권 관련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이 방대한 서적을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의 노고도 서평에 즈음해 치하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모든 고마운 마음을 한국의 독자들의 헌신적인 일독으로 표시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