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형할인점 가보니…파견직 전락한 ‘하루살이’ 노동자 급증 (한겨레, 4/18)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44
조회
1484
**대형할인점 가보니…파견직 전락한 ‘하루살이’ 노동자 급증 (한겨레, 4/18)

2년 전부터 인천의 한 까르푸 매장에서 비정규직 판매사원으로 일해 온 30대의 박정진(가명)씨는 올해 초 인력 파견업체 직원으로 갑자기 신분이 바뀌었다. 직영 베이커리 매장이 제조업체에 넘어가면서 직원들을 함께 떠넘겼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는 인력 파견업체를 중간에 끼워넣었고, 박씨는 결국 할인점의 1년 단위 계약직에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파견업체 직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항의 한마디 못했다. 비슷한 처지의 김정희(43·가명)씨는 “한 명이라도 결근하게 되면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꼬박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서울의 까르푸 매장 생선코너에서 일하는 이기연(46·가명)씨는 4년 남짓 일했지만 남은 것이라곤 다달이 받아가는 월급 80만원과 제때 소변을 보지 못해 생긴 고질병뿐이다. 말은 비정규 시급직(파트타이머)지만 실제로는 낮 12시부터 밤 9시까지 8시간을 일하는 풀타임 고용자다. 일이 시작되면 4시간 동안 자리를 뜰 수 없고, 교대 인원이 없어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다. 전쟁을 치르고 집에 가면 밤 10시가 훌쩍 넘어간다.

같은 매장의 계산원 강숙자(50·가명)씨는 하루에 손님 200여명을 맞느라 팔에 파스를 붙이고 일한다. 그러면서도 카드 회원 모집에는 열심이다. 행여 정규직으로 전환될까 하는 기대에서다. 그렇게 3년 넘게 일했지만 최근 정규직이 받은 보너스를 이번에도 받지 못했다.

까르푸만이 아니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할인점 비정규직 직원들은 최악의 노동조건에서 최저의 임금을 받는 밑바닥 노동자들이다. 언제든지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다 정규직의 3분의 2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있다. 거기다 고용보험, 의료보험 등의 혜택마저 못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특히 까르푸는 최근 비정규직 비중을 크게 늘린 상황에서 한국 철수 소식을 발표해 직원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다.

할인점의 고용 형태는 마치 현대판 신분제를 방불케 한다. 같은 일을 해도 신분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정규직은 매니저급 사원과 일반사원, 비정규직은 일반사원과 파트타임 직원으로 다시 구분된다. 회사 쪽은 ‘열심히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고 말하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는 최근 거의 없다. 여기에 비정규직 아래 또다른 계급이 있다. 인력 파견업체 직원들이다. 비정규직들이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고용되는 데 반해 이들은 한 달, 심한 경우는 하루 단위로 고용된다. 한 할인점에 6~7가지 신분이 함께 일하는 것이다. 특히 파견업체 직원은 고용계약서의 불리함 속에서 일하는데다, 월급에서 수수료까지 업체에 떼줘야 한다. 인천의 한 까르푸 매장에서 일하는 임연숙(가명)씨는 “월 단위로 계약을 해 불안하지만, 이 일을 안하고는 살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신분만 비정규직이거나 용역업체 사원일 뿐 정규직과 똑같이 하루 8시간 일하며, 때로는 주 16시간 연장근무까지 한다. 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정규직, 비정규직, 용역업체 직원 등 복잡한 고용구조를 만들어 언제든지 직원들을 해고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장치를 마련해둔 셈이다. 불안한 직원들은 당연히 회사 쪽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다. 한 인력 파견업체 임원은 “할인점 요구 때문에 열악한 조건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고 있지만 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법적,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