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외칼럼] 프랑스적인 笑劇? (경향, 4/14) (2006/06/07)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01:43
조회
1193
**[해외칼럼] 프랑스적인 笑劇? (경향, 4/14)

회의 도중 에르네스트 앙투완 세이예르 EU경영자협회 회장이 영어 연설을 하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발끈하고 회의장을 나간 일 말이다. 그는 당황한 수하 장관들을 대동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소극(笑劇)효과를 더욱 높여준 것은 시라크 일행이 세이예르의 연설이 끝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회의장에 돌아왔다는 점이다.

프랑스 정치인 특유의 수탉처럼 뽐내는 제스처였을까. 아니면 무역과 에너지, 농업 등 까다로운 초국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국가와 문화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진지한 경고였을까. 아마도 두가지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시라크의 주장은 사실 우스꽝스럽다. 가장 성공한 프랑스 대기업의 이사회에서는 영어로 회의를 한다.

프랑스 사회는 전반적으로 ‘세계화’와 ‘현대화’의 무자비한 압력을 견뎌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프랑스는 의료지원제도나, 철도, 다국적기업 등 인상적인 강점들을 갖고 있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대화된 세계를 향해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걱정은 중요하다. 프랑스 자체가 유럽과 세계에서 너무 중요한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들의 농산물 수출 기회를 막는 EU의 공동농업정책은 사실 프랑스의 작품이다. 프랑스 늙은 농부들은 여전히 농산물 가격보조제도에 매달리고 있다.

교육을 천부의 권리로 간주하는 프랑스 학생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변화의 위협에 대항해 바리케이트를 쌓고 있다. 거대한 공공부문의 노조들은 임금인상과 사회적 혜택 및 모두를 위한 일자리 안전을 기대한다. ‘개혁’이 더 많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지만 프랑스만의 자부심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이론은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 누가 과연 도르돈이나 알사스 지방이 캔사스와 평평해지기를 원하겠는가.

시라크의 호전적인 반응은 뿌리 깊은 걱정을 반영한다. 프랑스는 이미 EU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잃었다. 새 회원국들은 거의 대부분 광대한 농업부분을 갖고 있다. 이는 EU의 농산물가격지원 제도를 결국 파산시킬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더욱 나쁜 것은 대부분의 새 회원국들이 영어사용을 원한다는 점이다. 파리에서 열렸던 연례 학회에서 프랑스 수학자들이 영어로 논문을 발표할 때 게임은 이미 끝났다.

시라크의 행동을 조롱하고 그 비효율성에 대해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기는 쉽다. 하지만 프랑스의 깊은 걱정은 우리 모두에게도 잠시 생각해봐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네브라스카(미국)에서 오베르뉴(프랑스)까지 지구촌의 작은 마을들이 모두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거대 슈퍼마켓이 소매상인들의 영역을 치고 들어오고 지구상에서 가장 헐값의 노동시장에 일자리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재미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식 비즈니스 규범의 표준화는 물론, 외국의 훌륭한 언어와 문화가 ‘영어 표준어’에 통합되는 현상을 보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국제회의장에서 비즈니스맨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시라크의 주장은 말이 안된다. 하지만 주장컨대, 우리 역시 막대한 대가없이 세계의 ‘현대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할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