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신화와 종교의 창으로 본 과학 (한겨레, 6/2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7-12 23:44
조회
928
**신화와 종교의 창으로 본 과학 (한겨레, 6/26)
“우리 시대는 과학의 시대다 하지만 과학도 신화나 종교처럼 양면성의 개념들로만
설명될 수 있다 신화와 종교는 과학의 경계를 넘어 과학의 심층에서 삼투압적으로 소통한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바이츠제커의 ‘과학의 한계’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는 양자역학을 창시한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제자이며 핵물리학과 천체물리학 분야에 많은 공헌을 한 과학자다. 또한 플라톤, 칸트, 헤겔 등을 연구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과학의 한계: 창조와 우주생성, 두 개념의 역사>(1964년)는 바이츠제커의 이런 ‘종합적 안목’을 그대로 반영하는 저서이다. 과학을 논하면서 신화와 종교를 함께 아우르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리 흔한 일도 아니다.

여기서 ‘과학의 한계’라는 말은 양면적이다(바이츠제커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 ‘이중성’ 또는 ‘양면성’이다). 과학의 범위를 한정지어 논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과학과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와 종교는 과학의 변경을 넘어 과학의 심층에서 삼투압적으로 소통한다.

바이츠제커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의 시대는 과학의 시대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과학의 진리에 관하여, 즉 과학의 의미, 한계 그리고 그 과학이 가질 수도 있는 이중성에 관하여 다룰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우리 시대의 본질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의 표현은 의도적으로 모순과 이중성을 품고 있다. 진리는 그 개념상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한계를 논하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명제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바이츠제커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흥미진진하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 역할을 한다”는 것과 “신화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과학의 의미도 양면성을 나타내는 개념들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기본 주제뿐만 아니라, 이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세속화에 대한 독특한 해석, 갈릴레이의 일화도 하나의 신화라는 해석 등은 때론 복잡하고 혼란스런 개념에도 불구하고 독서의 의욕을 감퇴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비밀 코드는 다른 데에 있다. 바이츠제커는 암암리에 ‘어처구니없는 것’들의 전문화와 일상생활화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전문화와 일상화를 거치면서 인류의 역사를 끌어왔다는 역사철학적 발견이다. 어처구니없음은 ‘뜻밖의’, ‘생각 밖’의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처구니없는 일의 전문화와 일상생활화란, 뜻밖의 세계에서 뜻을 찾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우리의 뜻으로 의식화하고 내면화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 신화가 그렇다. 바이츠제커는 ‘우주생성론적 신화’들을 분석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빌로니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신화이다. 그 어느 것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압수와 디아마트는 태초에 각각 민물과 짠물의 대양이다. 그들 사이에서 에아가 태어나고, 그는 압수에 주문을 걸어 잠들게 한 뒤 그를 살해한다. 이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신들의 전쟁이 이어진다. 다른 신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신화 시대의 아이가 아닌 오늘날의 아이들도 똑같은 신화를 항상 똑같은 말로 들으려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역사에서 전지전능한 유일신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태인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신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다신교와 같은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그들에게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도달될 수 없는 윤리적 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이데아만이 진정한 실재이고 이 세상의 감각적 사물은 그 모상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 기하학적 도형은 객관적으로 결코 완벽할 수 없지만, 그것의 이데아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최고도의 객관성을 의미한다. 즉 이데아는 엄밀 과학을 낳는 유일한 원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철학적이다. 철학은 고대로부터 당연한 듯한 상식을 뒤집는 역설(패러독스)을 그 본질로 해왔기 때문이다. 즉 어처구니없음의 의미, ‘뜻밖의 뜻’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한계는 ‘외연 너머의 수용’을 의미한다.